동백마을에 마실 온 백설

볼고롱동백원

by 무량화


일요일 서귀포 기온은 최고 5도, 최저 영하 1도로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기록했다.

간밤 제주산간에는 대설경보가 발령되며 곳곳의 교통이 통제됐다.

아직까지도 중산간 아랫녘은 눈구름에 푹신 싸여있으며 서귀포 시내에도 아침 내내 뿌옇게 폭설이 흩날렸다.

자욱한 눈보라 사이로 어디선가 급박한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행안부 안전문자도 연신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이 쌓이자 갈 곳이 떠올랐다.

눈발이 좀 수굿해지기에 옷 두터이 입고 나섰다.

전날 다녀온 동백원, 꽃이파리 흥건히 낙화 져 붉은 카펫이 깔린 정경을 보고 왔는데 오늘은 백설에 싸인 동백꽃이 기다릴 터다.

몇 년째 별러온 설중동백과의 만남이 곧 이루어 지리니 뭘 망설이랴.

나이는 이럴 때 단지 숫자에 불과할 따름이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서라.

철떡서니없이 나대다 눈길 낙상 사고라도 당하면 면목없는 일. 조심조심 찬찬히 움직이기로 한다.

폰과 카드만 코트 주머니에 넣고 가벼이 출발했다.



동면에 든 곰처럼 따스한 실내에서 쉬면 좋으련만 용감히 칩거를 풀고 나서게 하는 마성의 유혹.

설중동백(雪中冬柏)은 조용한 유혹자다.

아니나 다를까.

동백원은 어느 때보다 붐볐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이 엇비슷하다.

물론 성향에 따른 개별성은 있겠으나 보통 사람인 나.

아직도 여전히 호기심 왕성하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붉게 핀 애기동백은 숫제 흐드러졌다.

만개한 꽃의 다음 순서는 낙화다.

애기동백의 낙화야말로 아주 볼만하다.

이번엔 모처럼 백설이 동백마을에 마실을 왔다.

머리에 그려지는 강렬한 대비는 감각을 일깨우는 각성제다.

동백의 붉은색은 꽃잎의 색이되 차디찬 겨울을 뚫고 나온 뜨거운 혈관이 박동 치는 생명력의 표징이다.
​여기에 짙푸른 잎사귀의 윤택이 더해지면 시각적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순백의 눈(雪)은 세상의 모든 혼탁과 소음을 지우며 그들 가까이 다가온다.

붉은 꽃, 푸른 잎, 그리고 하얀 눈.

마치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한 장면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이리도 곡진한 아름다움이라니.

예서 제서 환호성이 터진다.

꽃 아래 서있으려니 강풍이 일면서 가지에 쌓인 눈 우수수 흩날리며 쏟아진다.

그 바람에 백설의 세례를 다 받아본다.

아침녘 유배지처럼 막막하게 만들던 폭설 기억 아스라해진다.

오늘도 이렇듯 눈부신 풍경을 예비한 하늘 선물에 그저 감사!



예까지 왔으면서 동백군락지 안 들린다면 예의가 아니다.

더구나 토종동백꽃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동백나무 노거수 백 여 그루가 밀밀하게 둘러싸 서로가 서로를 껴안은 곳.

이름대로 동백은 한겨울을 알리는 계절의 전령사다. 그 꽃은 더없이 단아하나 뜨거운 감성을 자극하는 불꽃같은 꽃이다.

꽃 숭어리에 얹힌 백설은 대뜸 동백꽃을 고혹적인 미인도로 환치시킨다

순결함 속에 감추어진 전혀 색다른 면모다.

더더욱 우릴 미치도록 매혹시키는 건 동백이 질 때.

송이째 툭 떨어지는 낙화의 처연함이다.

동백꽃 특유의 비장한 미학은, 단두대에서 사라진 천일의 앤 볼레인 일생처럼 완성된다.

눈발이 다시 거칠어진다.

바람도 거세다.

꽃이 떨어진다, 툭 툭 툭!

하얀 눈밭 위에 떨어진 점점의 붉은 꽃송이들.

눈길에 꽃머리 하나를 내려놓고 스스로 눈을 감는다.

가장 붉을 때 떨어지는 일은 이곳에서야 늘 있어 온 일상다반사일 뿐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처럼 비극적이라 더욱 처연한 마무리, 왕왕 자기 절제는 사랑을 품위 있게 만들기도 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하여 동백은 작별 의식도 없이 조용히 눈밭에 누워 체온 식어갈 수가 있는 것..

그 나머지, 자연은 그냥 절로 절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무위자연으로 돌아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