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오전과 오후

한라산의 변모

by 무량화


엊그제 일요일. 무음처리를 해놨어도 삐익! 안전문자가 연신 외부 상황을 전해줬다.

《대설로 11600도로, 516도로 대소형 통제 △제1산록도로 대소형 체인 △차량 서행 △안전사고유의 [제주도]

5.16 도로, 천백 도로, 비자림로, 명림로는 전 구간이 통제됐으며 번영로, 평화로, 한창로, 남조로, 첨단로 등 중산간 도로는 체인을 착용해야 차량 운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활주로가 얼어붙으며 하늘길이 전면 통제되기도 했단다. 종일 음산한 강풍에 강추위를 예고한 기상도. 눈보라가 휘몰아쳐 외출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 어제 항공편 결항도 있었다는데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쾌청한 날씨였다. 서귀포 새연교에서 올려다본 한라산은 하얗게 분단장을 하고 있었다. 꼭 그리 보였다, 설문대할망이 아니라 새 신부가 곱게 치장하고 사틴 면사포 살풋 쓴 듯이. 새하얀 백록담이 겨울 햇살 아래 오연스레 빛났다. 저 위에 올라가면 얼마나 멋진 풍광이 기다릴 텐가. 부푼 설렘과 기대 품게 할 만큼 설경은 매혹적이었다. 시선은 자꾸 산으로 향했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눈이 녹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차질 없이 오전일을 마치고 서둘러 눈꽃버스를 탔다.


천백 도로 초입 위호텔에서부터 고도 높여갈수록 세상이 달라졌다. 우선 적설량부터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래는 여전히 봄날처럼 햇살 청명했으나 위로 올라가면서 기온 완연히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구름이 장악한 회색 하늘, 영실 지나 1100 고지에 이르자 차량과 인파로 도로는 혼잡했다. 올라오면서 대강 감이 왔지만 아니나 다를까. 나뭇가지에 앉았던 눈꽃은 더는 얼음꽃이 아니었다. 햇빛 나자 흰 결정은 풀어지고, 그새 투명한 물방울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설화는 오전 햇살에 거진 녹아 무화됐다. 모든 것은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에게 유형 무형으로 영향을 미친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 그 무엇도 없다고 하였다. 공명의 법칙에 따라, 연기의 법칙에 의해, 한때 만났다 스러지는 인연이 ㄱ.러하듯. 소음 속에서도 눈 녹아내리는 소리 또렷했다. 눈꽃은 아직 겨울이라는데, 떨어지는 물소리는 이미 봄이었다. 백록상이 선 숲으로 들어갔다. 전망대 뒤쪽은 여전 나무마다 설화 소담스러웠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에서 나뭇가지들은 하얀 꽃을 이고 조용히 서 있었다. 세상에나, 이리 정결한 아름다움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니 고맙구나.



그러나 천백고지 하늘은 우울한 회색빛으로 흐려 있었다. 두터운 눈안개가 사방을 감싸고 휘돌며 뭇 풍경을 지워냈다. 아랫녘에서 올려다본 맑은 하늘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천백고지는 완연히 다른 세계였다. 저 멀리 보이던 설경도, 한라의 정상도, 모두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보는 것과 그 안에 들어서서 보는 풍경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기대했던 조망 대신 만난 짙은 안개.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영산의 진면목에 더 가까웠기에. 산은 제 속내를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그다웠다고나 할까. 눈밭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눈썰매를 탔으며 젊은이들은 제 방식대로 겨울동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호젓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거리며 눈이 보드랍게 밟혔다. 새하얀 은세계, 눈안개 속에서 눈꽃 덩어리 진 나무들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소리마저 안개에 흡수되는지 사위는 적요했다. 안개는 가림이면서 동시에 드러냄인가. 멀리 보이는 것을 숨기지만, 가까이 있는 것은 더 또렷하게 해 준다. 눈앞의 눈꽃 하나하나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한참을 그렇게 설경 거닐다가 돌아섰다. 산을 내려와서 그제야 알게 되었다. 저 위에서는 지금도 눈안개 눈송이 되어 흩날릴 테고 눈꽃들 소리 없이 결빙되고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라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맑은 날에도, 구름 싸인 날에도 늘 여여하게.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그 모두를 통섭해 품에 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