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선생 유작
그랬다.
시절인연이 비로소 도래했던 가보다.
모든 현상과 만남은 특정한 시간과 조건이 맞아야 딱 이루어진다.
인연 또한 오고 가는 시기가 있어서,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닿아야 만남이 이루어지는 법.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무연대면불상봉(无緣對面不相逢), 이는 춘추전국시대 한비자의 말이다.
인연이 있으면 천 리 밖이라도 만나게 되고, 인연이 없으면 마주 보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연기법(緣起法), 인연법(因緣法)은 불교의 핵심 교리다.
연기법이나 인연법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조건인 '연(緣)'이 화합하여 생겨나고(인연생기),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인과법칙.
우주 만물의 생성 소멸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인과법칙이 인연법이다.
모든 만물과 현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적이고 상호 의존적(相互依存的)인 관계로 이어진 존재다.
'만사는 인연 따라 일어난다'는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연생기설.
그처럼 인연, 참 아릿하게 아픈가 하면 다사롭게 행복감을 안겨주는 단어다.
좋은 인연이라도 끝이 있어 더 함께 할 수 없기에 애틋하지만 무릇 모든 관계에 집착하고 얽매여 고통받지는 말 일이다.
그 인연에는 때가 있으매 인연으로 만나더라도 때가 다하면 헤어지는 것처럼, 모든 것은 섭리에 따름이니 마음에 품지 말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오래 유념해 왔기에 한번 들러야지 생각은 했으나, 굳이 의식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절이 되니 만나게 마련인가 보다.
소라의 성을 다녀온 다음부터 김중업선생의 작품이 남아있다는 서귀중앙여중을 꼭 방문해 볼 참이었다.
그 앞은 무시로 다니던 길이다.
아마 백번도 더 지나쳤을 텐데 교문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가까이 있으므로 언제라도 가볼 수 있다는 미더움이 있어서였을까.
오전 일을 마친 후, 팀원끼리 금요일이라 점심을 함께 한 곳이 서귀포 원도심이었다.
온화한 봄날 같은 날씨인 데다 기분까지 느긋해져 설렁설렁 거처로 향하다가 서귀중앙여중 앞에서 멈춰 섰다.
순간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김중업(1922~1988) 선생 작품을 보고 가자 싶어 단박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분이 남긴 서귀중앙여자중학교 건물은 제주에 남아있는 그의 몇 안 남은 귀한 건축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은 1971년 옛 제주대학교 수산학부 본관으로 지어졌으며, 1981년부터 여학교 건물로 사용 중이다.
김중업의 최고 역작으로 꼽히던 구 제주대 본관이 철거되면서, 현재 제주에서 그의 건축 철학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가 여기다.
모더니즘 건축의 세계적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였던 김중업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브리즈 솔레이유(Brise-soleil) 기법.
이는 햇빛을 굴절시키거나 차단해 건물 내부의 열 증가를 줄이고자 건축물에 덧대는 차양 장치를 뜻한다.
여름철 직사광선은 막고 겨울철에는 빛을 들이며, 외부 시선을 차단하면서 채광은 그대로 유지시킨다.
나아가 단순한 기능성을 넘어 건물 외관에 강한 입체적 볼륨감과 독특한 조소적 미를 더한 건축 디자인이다.
건축심리학 측면에서도 사람들은 '등 뒤가 막혀있고 앞이 트인 공간'을 가장 안정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이렇듯 서쪽 면에 설치된 독특한 차양은 오후 빛을 조절하면서도 외관에 리듬감을 주었고, 북쪽 면의 창문들은 폭이 제각각 달라 마치 파동치는 듯한 생동감을 살렸다.
채광이나 통풍을 조절할 수 있는 차양막과 루버(Louver), 3차원 입체 구조물인 핀(fin) 등을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현대 건축에 적극 도입시켰다.
요즘은 실내 인테리어에도 커튼형 블라인드를 대신하는 루버셔터가 대세인데 건축에 진작 활용한 그다.
건축에 문외한일지라도 대뜸 눈길 사로잡은 건물의 독특한 서벽 디자인은, 요새 건축에서야 흔하나 70년대 초라면 낯설었을 터다.
천천히 교사 건물을 빙 둘러보았다.
학교라 평일에는 수업시간일 터, 내부 관람이 제한되므로 외부에서 건축의 조형미를 먼저 느껴보기로 했다.
지금은 흔한 건축기법이지만 60년대 말에 이처럼 회화적이고 기하학적인 건축설계를 시도했다니 시대를 앞선 선구자로 존경받고도 남을만.
시간은 모든 건축물 자체를 삭게 만드는 속성을 지녔다.
건축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지만, 역설적이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다행히도 김중업 선생이 남긴 건축물들은 대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존되고 있다.
낡은 것은 가차없이 새롭게 바꿔버리는 단견에서 벗어난 것은, 비로소 그가 지닌 참 가치를 인식하고 인정한 다음부터였다.
유람선과 비행기를 형상화한 역동적인 4층 건물이었던 제주대 옛 본관은 1996년 철거되었다.
현대 건축의 원리와 한국 정서, 특히 제주의 특징을 조화로이 보여주는 근대 건축의 교과서로 평가받으면서 가로늦게 복원 추진 중이란다.
그나마, 혹은 다행히 서귀포에 위치한 덕에 제주대 수산학부 본관만은 현존하고 있다.
서귀포 시청사 맞은편에 위치한 서귀중앙여중 교사는 접하는 방향마다 표정이 다르다.
4면이 모두 각각의 형태를 띠고 있어, 한 바퀴 돌아보며 각 면이 주는 독특한 미학을 감상하였다.
서벽의 브리즈 솔레이유(Brise-soleil) 기법이야말로 당시로는 파격이었겠다.
교사 남쪽에 나있는 두 개의 주 현관도 서로 다른 모습이고, 앞뒤로 보이는 교실 창문 프레임도 일정하지가 않다.
서귀포의료원과 접한 북쪽의 도서관 건물은 김중업의 트레이드마크인 직사각형이 아닌 반 원통형 건물.
구상화나 현대조각 같은 건축 구조물이 느닷없이 돌출해 있는 것이다.
오늘은 햇살이 강하지 않아 접하지 못했지만 층마다 넓게 드리워진 차양이 햇빛을 만나며 그림자가 생기면 차양과 그림자가 독특한 추상화를 만든다고.
기상과 시간대 맞춰서 적기에 다시 찾기로 한다.
파스텔 톤의 연보라와 하늘색, 부드러운 황토색이 전체적인 베이지와 흰색 벽면에 조화를 이룬 교사와 그에 걸맞은 교정의 화목들.
수선화 향기 스며든 정원에 벤치와 흔들 그네 풍경이 고즈넉 평화롭다.
이 학교의 교목인 은행나무 새잎 준비하고 교화인 목련이 교정 곳곳에서 봉오리 키우고 있으니 목련화 필 때도 와봐야겠고.
노거수 벚나무 개화시기에도 오고, 여름내 붉게 타오르는 목백일홍 꽃도 필히 보러 오리라.
배롱나무 꽃 한창일 땐 방학중이니 실내도 둘러봐야지.
오늘 생각잖은 시절인연 덕에 눈호강 푸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