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의 설화

1989

by 무량화

저물녘 여장을 푼 덕유산 아래 삼공리, 산마을이라 금세 칠흑의 밤이 덮친다.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깊은 산의 적막을 한층 두텁게 한다. 봄기운 감도는 도심의 쇼윈도에서야 겨울은 이미 전송해 보낸 계절. 그러나 덕유산은 겨울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절기는 우수 경칩을 지났는데도 덕유산 자락에는 아직 한겨울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튿날 이른 시각 산정을 향해 출발했다. 자욱이 눈발은 날리고 새벽 냉기는 뼛속 깊이 스며든다. 한낮이면 눈이 녹았다가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며 다시 얼어붙기를 되풀이한 길은 온통 빙판이었다. 아이젠 없이는 한 발짝도 내딛기가 어렵다. 한 점 수묵화로 저만치 서있는 덕유산.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이 속리 황악 연봉 일으키며 지리산으로 뻗어내리는 중심부에 자리한 산. 품에 무주구천동을 껴안고 평균 고도 1천3백 미터의 긴 능선이 영남과 호남을 동서로 가른다.


삼공리 주차장에서 매표소를 통과하여 백련사까지는 넓게 닦인 관광 도로다. 곁을 따르는 구천동 계곡은 처처에 폭포와 담소(潭沼)로 치장한 채 기암괴석을 거느리고 기운차게 내닫을 터다. 비파 소리를 청해 듣는다는 청금대, 용이 누운 형상이라는 와룡담, 학들이 모여 노닐었다는 학소대. 뿐인가, 조선말 송병선 선생이 한일 합방을 통탄하며 관직을 내놓고 와 은거했다는 일사대를 비롯 청류가 호탕하게 또는 부드럽게 여울진다. 그러나 이 하류는 차를 타고 휑하니 통과하기 때문에 거의가 놓치는 절경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나제 통문에서부터 걸어서 쉬엄쉬엄 오르며 구천동 계곡의 진수를 음미해 볼 만하다. 나제 통문은 바위를 뚫어 만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으나 지금은 구천동에 이르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삼공리에서 출발하면 처음 만나는 곳이 제16경인 인월담. 옥류에 달그림자가 찍힌다는 곳이다. 이름마저 감칠맛 나는 월하탄, 비파담, 구천폭포, 명경담, 현화폭포, 이속대를 지나면 계곡은 백련암으로 마무리된다. 문자 그대로

구절양장의 골짜기를 힘찬 물살이 때로는 솟구치며 공구르며 도처에 비경을 연출한다. 허나 지금은 얼음장 하얗고 바위마다 베레모처럼 소복이 눈을 쓰고 있다. 그러나 물가에 모여 앉은 도톰한 버들은 봄이 머잖음을 눈짓으로 일러준다.



덕유산은 과연 종잡을 수없이 묘한 산이다. 이십 수년 전 여름, 대학 친구들과 찾은 무주 구천동은 깊디깊은 산골짜기였다. 장마로 물이 불어난 계곡을 겨우겨우 거슬러 백련사에 닿기까지는 하루 낮이 걸렸다. 당시는 나제 통문 훨씬 못 미친 무주에서 차를 내렸다. 두 번째로 재작년 겨울 무주 리조트를 찾았을 때는 구천동 계곡은 자취조차 희미했고 험하던 골짜기는 허허벌판만 펼쳐놓았다. 인조 눈이 풀풀 날리는 스키장의 완만한 슬로프와 갖가지 시설물들. 그 옛날 계류 넘쳐흐르던 골짜기를 떠올리기엔 엄청난 탈바꿈이었기에 차라리 황당할 정도였다.


구천계곡은 행정구역 상 무주군 설천면에 속해있다. 이 골짝에서 성불에 힘쓴 자가 구천에 이르러 그들이 먹을 쌀을 씻은 뜨물이 눈처럼 하얗게 흘렀다던가. 속설은 전혀 근거 없이는 나오지 않듯 구천동에는 열네 개의 사찰이 있었다는데 현재 유일하게 남은 것은 백련사뿐이다. 해발 9백40미터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흥덕왕 5년 무염 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6,25 때 소실된 것을 새로 중수했으며 조선 경종 3년에 주조된 범종이 종루에 걸려있다. 절 입구에는 지방 문화재 43호인 매월당 부도탑이 서 있는데 부여 무량사에서 생을 마친 김시습이 구천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간간이 눈안개가 시야를 가리나 날씨는 맑게 깨어나고 있었다.


쾌청, 푸르른 하늘 아래 점차 덕유 자락이 웅자를 드러낸다. 산세 덕스럽고 너그럽다 하여 덕유산이라 했다던 대로다. 오른쪽 비탈로 접어들어 향적봉으로 접어들었다. 첫 쉴 자리 제공해 준 백련사 계단​(戒壇) 앞에 서서 둘레를 돌아보니 덕유산은 과연 덕유산이다 싶어진다. 덕(德), 밝고 옳고 크고 아름답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나 행실을 덕이라 일컫지 않던가. 신라시대에 조성됐다는 백련사 금강 계단은 석종형 무늬 없는 탑 모양인데 지방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 계단은 전국 명산대찰마다 승려들의 계율 의식을 행하던 장소라 한다.


16세기 조선조 선비였던 갈천 임흔 선생이 남긴 덕유산 등정 기행문에는 향적봉 가는 길 중턱의 백련사를 비롯 영각사, 삼수암, 향적암이 등장한다. 서쪽에 향림이 즐비하게 서 있어 이름을 향적봉이라 했다는 얘기며 덕유산 정경과 풍물들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산에 오를수록 쌓인 눈이 깊어진다. 눈에 덮인 산봉우리가 신비롭고 눈꽃이 핀 나목들은 선경을 이루고 있다. 설경의 으뜸은 설악이다. 그러나 설화는 덕유산을 꼽는다. 따라서 겨울 덕유산은 산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곳. 석양을 배경으로 한 고사목과 주목이 근사한가 하면 철쭉 무리와 구상나무에 핀 설화도 일품이다.



'처절하고도 미칠 듯한 산수의 아름다움'이라고 설경을 노래한 어느 시인이 있다. 끝없는 설원, 보석같이 빛나는 눈, 짙푸른 창천 아래 펼쳐진 순수 무구한 은세계는 숭고하되 매혹적이다. 햇빛에 반사돼 눈이 부신 순백의 누리. 계속되는 탄성과 환호, 오를수록 천만 송이 하얀 설화가 연출하는 비경은 별유천지 그대로이다. 거대한 백산호초 군단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용궁과도 같고 얼음 궁전에 초대받은 느낌도 든다. 도무지 이 세상 정경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인 백설의 축제에 감격 감읍할 따름이다. 이는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자연의 시혜다. 신비로운 풍치 앞에서 문득 떠오르는 아이들. 한창 공부할 때이지만 언젠가 이 풍경 속 액자에 그들도 담기게 되기를.


겨울 산행 초보자들의 도전의 대상이기도 한 덕유산은 가파르고 힘든 코스는 별로 없다. 미끄러운 비탈에는 나무 등걸이나 바위 뿌리가 오묘하게 손잡이 역할을 해준다. 백련사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반 정도에 드디어 정상 가까이 올라섰다. 장쾌한 조망, 출렁이는 파도처럼 굼실거리는 능선들. 또는 천군만마가 머리 조아려 부복하듯 한 산봉우리들이 저 아래 질펀하다. 향적봉 아래 대피소인 산악인들의 집은 덕유산 유일의 산장이다. 동굴 속 같은 산장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지척거리인 향적봉에 오른다.


드넓은 산정에는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구름이 달음박질을 친다. 밋밋하게 이어진 중봉까지는 삼십 분 거리. 화석 나무라는 구상나무 고사목과 주목 철쭉의 군락지이자 오월 원추리꽃이 또한 유명한 곳이다. 중봉에서 남덕유산은 십분 정도의 거리로 영남 알프스에 필적할 만한 덕유평전이 호방하니 펼쳐졌다. 남덕유산 정상에서는 지리산 주능선이 아스라이 보이고 가야산이 한눈에 든다. 덕유 종주 아니면 중봉이나 향적봉에서 다시 구천동으로 하산하게 되는데 온 길 되짚어 내려와도 좋고 오수자 굴을 거쳐 이속대로 하산하면 또 다른 운치를 맛볼 수 있다. 설화 청정한 덕유산을 내려오며 "바라옵건대 옳게 쓰임 받는 아이들 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 정화된 심신으로 하늘에 기원 오롯이 바쳤다. 1989


사진: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