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지 계곡에서 메리어트 언덕으로

유채꽃 그리고 일몰

by 무량화


토요일 오후 늦게서야 날씨가 깨어났다.

며칠 봄비 부슬대다가 겨우 만난 푸른 하늘이다.

세시도 넘은 시각, 그러나 어디든 갈 곳은 수두룩하다.

이 점이 바로 서귀포 살면서 누리는 특혜다.

옆집 황선생과 유채꽃도 보고 석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중문 미라지 계곡에 들렀다가 여의물로 가 메리어트호텔 언덕에 가꾼 유채꽃을 보고 외돌개로~.

중문관광단지에 가면 우린 신라호텔 로비에서 잠시 쉬었다 가곤 한다.

이날도 바이올린 선율에 잠겨 마음 세척하며 기분을 환기시켰다.

일몰 전에 외돌개까지 가려면 마냥 감정의 호사를 누릴 수만은 없어 야외 수영장을 지나 산길로 올라섰다.

태평양 물빛 푸른 색달해변이 발치에 깔려있는 언덕길, 롯데와 캔싱턴 건물을 통과해 미라지계곡 들머리 나무계단을 밟았다.



몇 해째 봄마다 들리는 곳이라서 낯익은 유채꽃길.

보통 평지 밭자리에 유채를 가꾸기에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데 반해, 여긴 언덕에 자연스레 조성된 유채밭이라 곡선미 아름답고도 정겨웠다.

특히 유채꽃 사이로 구불구불 난 흙길 걸으며 유채 꽃덤불 속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청년들을 만난 게 이태 전인가, 여태껏 본 중에서 유채꽃 최고였던 그 해.

당시는 지금처럼 전 구간이 나무 데크로 된 산책로가 아니었다.

지금은 산책로 너머로 건너다보는 유채꽃이라 전과 같은 정감이 일지를 않는다.

더구나 유채가 튼실하니 키 훌쩍 자란 것도, 풍요로이 촘촘 무성한 식재도 아니라서 그리 볼품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골짜기 바람까지 냉기를 품어 빠르게 유채밭을 지나쳐 별 내린 전망대 쪽으로 내려왔다.

미라지계곡은 엉덩물계곡으로 통하나 어감이 별로여서인지 몇 해 전 새로 이름을 공모해 미라지로 바뀌었다.

아름다움이 비단처럼 펼쳐진 못이라는 미라지(美羅池), 그렇다면 이 땅의 내력과도 부합하는 예쁜 이름이건만 널리 통용되진 않아 아쉽다.

입구가 양쪽에 있어 위에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아는 이나 알뿐, 대부분은 아래쪽에서 우리와 반대로 거슬러 올라온다.



이번엔 삼매봉 근처 여의물에서 돔배낭길로 꺾어 들었다.

도로변에 인접한 귤농장 정원이 볼만하다며 황선생이 어느 귤밭으로 앞장을 섰다.

농장은 무척 넓었고 미로처럼 여러 갈래 길이 닦여져 있었다.

규모 큰 사업장인 이 농원엔 현무암 괴석들이 둘러서 있었고 소나무 분재가 수두룩했다.

언뜻 봐도 싯가가 꽤 나갈 귀물들인데 방치하다시피 관리는 소홀, 퇴근 후라서 인지 농원은 텅 비어있었다.

농원 곳곳을 사진에 담으며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지체돼 허둥지둥 출구부터 찾았다.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겨우 출입구를 찾은 우리는 늦장 부린 시간 벌충할 요량으로 올레 7코스를 달리다시피 했다.

급하면 뻔한 길도 헷갈리며 발길 더 꼬인다.

사유지로 난 길을 틀어막아 긴 성벽 같은 골목을 지나서 다시 돌아 내려가야 하는 길.

그 끄트머리에 조각상 다수 품은 별장 닮은 카페 힐끗 스친 다음 연신 내달렸다.

어느새 석양빛이 온데 스며들기 시작해서다.

일몰 시각이 6시 35분인데 어언 오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해는 곧 질락 말락.

메리어트호텔 언덕기슭에 유채와 애기동백이 선명한 빛깔로 조화 이룬 채 기다리고 있었다.

후다닥 사진 서너 장 찍고는 가파른 층계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해송과 볼레낭 뒤섞인 틈새로 드러나곤 하는 서쪽 바닷가는 이미 붉은 노을 흥건히 고여있었다.

오늘따라 적당히 깔린 구름층까지 일몰 장면이 극적이겠는데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엔 무리였다.

외돌개에 이르기 전, 이미 해넘이는 이루어져 황혼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외돌개 바닷가는 어스름에 잠겨 있다.

낙조를 보려는 마음에 숨차게 달려온 외돌개.

넘어간 해, 바다에 혼자 서 있는 외돌개가 문득 누구나 혼자 서 있는 존재라는 말을 전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빛은 한동안 하늘에 머물러, 늦게 도착한 우리에게 빛의 여운 한자락을 건네주었다.

하긴 오늘이 아니면 낙조를 만날 수 없음도 아니면서 구름층 아래 바다로 잠기는 해를 꼭 보고 싶은 마음과 이런 욕심조차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지는 이율배반을 넘어,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은 생의 감각이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떠났어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어서 해는 늘 여운으로 일출의 기다림을 남겨 놓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빛의 여운 은은한 자리에 잠깐 마음을 세워두러 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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