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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3. 2024
화성 행궁에서의 봄날 하루 -3
화성행궁을 찾을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으나 막상 기회가 닿지 않더니 이제야 비로소 때가 왔다.
서울 올라간 길에 잠깐
수원 화성을 들리기로 작정했던 것.
영조를 알고 사도세자를 알고 혜경궁홍씨를 알고 정조를 안다면 누구라도 화성행궁이 궁금하지 않으랴.
조선조 최대의 궁중비사로 각인된 영조와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은 한국인이라면
거의
모를 리 없다.
읍혈록이라고도 불리는 한중록을 통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혜경궁홍씨다.
워낙 드라마틱한 삶을 산 정조 이산이라 그에 관한 소설, 드라마, 영화 중
아마
하나쯤은 보았을 테니까.
하루 일정으로 넉넉한 코스라 언니와 외사촌도 여정에 기대감 컸고 운전은 형부가 기꺼이 맡았다.
봉긋한 산자락에 다소곳 감싸 안긴 행궁을 지키는 홍살문 뒤로 신풍루가 보였다.
드넓은 광장 규모에 걸맞은 느티나무 노거수 두 그루, 수령이 물경 350년이나 됐다.
그럴 만도 하다.
사적 제478호인 화성행궁은 1796년(정조 20)에 완공됐으니 느티나무는 정조의 대역사를 지켜보았을 터다.
화성행궁 중심전각이자 정전인 봉수당에서 거행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 축하 행렬도 보았을 터이다.
봉수당은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위해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행궁 내 여러 대문을 통과해 누각과 당과 헌과 청을 다
둘러보고 나니 다리 묵직할 지경이다.
그만큼
너른
행궁이다.
정조가 화성행궁 청사진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겨 완성을 보기까지에는 7년의 세월이 걸렸다.
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동시에 이상 도시를 새로이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완공에 이르기까지 고작 7년.
공사기간을 최대로 단축시킬 수 있었던 데는 빠른 시일 안에 완성시키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작용해서이다.
정조는 화성을 만드는데 동원된 백성들에게 넉넉한 품삯을 주었으며 여러 특전과 시혜를 베풀었다고 한다.
건립 당시의 과정과 모습은 정조의 명에 따라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기록과 그림으로 소상히 남겨 놓았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화성행궁은 병원과 경찰서로 사용되면서 1920년대 이를 즈음 옛 자취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춘
훌륭한
건축물로 알려졌다.
수원 화성에 딸린 화성행궁은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로서 조화 이룬 건축미와 웅장함이 돋보인다.
규모도 규모지만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현군 정조 임금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의 발로인 행궁이 아닌가.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지방으로
거둥
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
.
그 용도에 따라 구분되는데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도
있다.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여기 해당된다.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온양행궁, 임금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화성행궁처럼 목적과 용도도 각각이
다.
명당터로 알려진 화성 원륭원으로 아버지의 능을 이장하고 아버지를 무던히도 기리고 또 기린 정조 임금.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 엎드려 피눈물로
써 내린 한중록을 쓴 어머니 혜경궁홍씨.
억울하고 원통해 서리서리 한이 맺히고 서린 부모를 둔 세손의 처지는 늘 외줄을 타듯 위태위태했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임오화변을 목격하는 등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등극해
왕에
오른 정조
.
즉위 원년부터 자객이 침투하는 정유역병을 겪고도 탕평책을 쓰면서 개혁군주로 우뚝 섰다가 석연찮은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이 정조다.
오죽하면 조선 임금 중 이산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그리도 많을까.
한마디로 그는 스토리텔링감이다.
여기서 그 얘기
갈래들
장황히
펼칠
수 없으니
정조의 식견과 안목이 담긴
'
화성성역의궤'만은
다음 순서로 이어서...
.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세워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가 1795년 신풍루라 고쳤다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으로 1790년
완성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으로 1790년 완성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데,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 건물로 1795년(정조 19)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여기서 거행
혜경궁의 회갑상과 어머니 앞에서 임금이 아닌 신하 복장으로 예를 올리는 정조 모형
정조가 행궁에 머물 때 지내는 처소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 중 혜경궁의 침전으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
궁중무용 공연 시 아악을 연주하는 악기들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의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 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 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
사도세자의 죽음을 상징하는 뒤주도 서넛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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