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밤새 겨울비가 내렸다. 아침이 되자 날씨가 들며 햇살이 퍼졌다. 속흙까지 젖어 부드러워졌을 때 풀을 뽑기가 수월해 미뤄왔던 밭을 맸다. 새들에게 뜯기고 추위에 놀라 앉은뱅이걸음을 하는 채소들과 달리 그악스럽게 영역을 넓히며 웃자란 풀들. 잡초의 생명력은 모질도록 끈질기다. 흙내를 향해서 촉수 뻗어 약간 실뿌리라도 걸치면 되살아나기에 밭 가장자리 멀찍이에다 한데 모아두었다.
가을농사 첫해는 온 밭자리에 비닐을 덮어주며 유난을 떨었다. 어느 아침, 영하의 기온에 겉흙은 성에가 가시처럼 돋아 부풀어 올랐고 채소의 어린잎은 하얗게 서리가 낀 채로 얼어 있었다. 옴짝달싹도 못한 채 땅에 붙박여서 얼어버린 잎이 안쓰러워 얼른 간이 비닐덮개로 보호막을 쳐줬다. 바람이 거센 지역이라 덮개가 견뎌내질 못했다. 가만 보니 비닐이 바람에 벗겨져버린 자리도 동해를 입지 않고, 해가 들면 얼었던 이파리가 풀리며 괜찮아졌다. 연하디 연한 어린싹이지만 섭리에 따른 저마다의 자생력을 발휘하는데야 절로 경탄이 터질밖에.
단 가을 농사에 맞지 않는 채소도 있어, 텃밭 아욱만은 잎이 얼어 거무튀튀하게 무너졌다. 시금치야 원래 열이 많은 식물이라 문제없지만 야들야들한 상추까지도 너끈히 지탱했다. 아욱은 아열대성 식물이라더니 추위와는 상극인 모양이고, 고추나 호박도 한번 서리만 덮치면 파그르르 주저앉아 목숨줄 놓아버리는 속성을 아는 터라 가을 파종에서는 제외됐다. 얼갈이배추나 알타리무 시금치 상추 고수까지 텃밭 야채들은 가녀린 싹으로 추위와 씨름하며 힘겨워 하지만 삼동만 지나면 이내 부활의 봄을 맞이했다.
첫해 이후로는 믿는 구석이 있어 알아서 살도록 그냥 두었다. 역시 스스로 잘들 견뎌냈다. 엊그제 늦추위에 뒤란 수돗가의 대야 물이 꽝꽝 얼었는데도 텃밭에 한 치 쯤 키를 돋운 채소들은 멀쩡했다. 만약 영하의 밤을 바람 피할 자리 하나 없이 텃밭 채소처럼 맨몸으로 견디라면 노숙생활로 이력이 난 사람이라도 동사하고 말리라. 유다른 환경 속 혹독한 조건의 고랭지 배추는 성애에 휘덮여 얼면서도, 고지대 나무는 얼음꽃 하얗게 피운 채 고드름을 달고도 살아남는다. 한겨울 삭풍과 눈보라를 홀로 견뎌낸 미더운 생의 이력들에 어찌 경의 표하지 않을 수 있으랴.
메트로 타고 LA를 가면서 지난번 '샌드 산불'이 난 광범위한 장소를 스쳐 지나갔다. 무심히 차창 밖을 내다보는데 슬쩍슬쩍 푸른 기미가 잡혔다. 등성이까지 볼품없이 불타버려 삭도로 민 듯이 까까머리 민둥산이 된 터에 대체 뭔가 싶어 자세히 살펴봤다. 나무고 풀이고 죄다 화마가 삼킨 빈터, 잿더미와 그을린 자국만 있던 곳에 초록빛이라니? 몇 달 새에 놀랍게도 나무 밑동 언저리마다 푸른 생명의 빛이 선연하게 어려있었던 것. 윗 둥치는 검게 타 숯이 됐으나 땅속뿌리만은 가상하게도 목숨의 끈을 꼭 부여잡고 있었나 보다.
오~~ 감탄사가 절로 터지는 순간이었고 그 경탄스러운 생명력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모든 게 불탄 죽음의 자리를 떨치고 불사조처럼 되일어난 생명의 가멸찬 힘. 외경스럽기도 하면서 대견하고도 신기했다. 비좁은 산도를 힘겹게 빠져나온 신생아의 꼭 쥔 주먹만큼이나 생명의 힘은 정녕 고귀하고 위대한 것. 그 대단하고도 굳센 의지 앞에 두 손 합장하고 싶었으며 성원과 격려의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지진 난 땅에도 샘은 솟고 초토에서도 풀은 돋아난다 하였던 말 그대로였다.
누리의 뭇 목숨마다 모질도록 강인한 생명력을 하늘은 부여했다. 그중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럴 수 없이 약한 존재다. 우쭐거리며 세상을 다스리고 최강자로 군림하나 인간만큼 나약한 생명체도 없다. 덩치가 크기로 말하면 코끼리도 있고 고래도 있다. 힘이 세기로야 들소나 곰에 비할 바가 아니며 빠르기로 치자면 타조나 치타가 앞선다. 협동심으로 따지자면 개미가 나설 테고 벌도 그 못지않다. 그럼에도 만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인지 기능이 뛰어나 도구를 만들고 불을 사용하였다는 데 있다지.
사람과 달리 짐승의 새끼는 갓 태어나서부터 걷는다. 물론 처음엔 비칠거리나 곧 중심을 잡고 제 발로 어미를 따라다니다 생후 몇 주만 지나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새들도 부화해서 며칠간은 찍찍거리며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지만 얼마 안 돼 날기를 시도한다. 웬만큼 깃만 자라주면 새는 객체로 떨어져 홀로 서려한다. 떡잎 여리기만 한 보드라운 채소들도 엄동 추위를 대지의 체온만으로 너끈히 견뎌내지 않던가.
반면 신생아는 세상에 나오면 그야말로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이 삼 년이 지날 때까지는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아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여러 해 동안 미숙한 상태로 돌봄 속에서 지내야만 한다. 며칠 몇 달이 아니라 인간만은 태어난 지 3년이 지난 뒤라야 겨우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다. 자리 가려가며 그간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은지의(報恩之義)를 다하기 위해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법도가 유가에서 행해졌음도 그에 연유한다. 고리타분한 구습이라고 진작 내다 버렸지만 여기엔 깊은 통찰의 지혜가 들어있거늘.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