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 대신 백마를

by 무량화

문득 유채꽃 생각이 났다.

봄마다 유채꽃을 보러 갔던 산방산이다.

개화 정도가 궁금해 오후 늦게 차에 올랐다.

다섯 시도 넘어 도착해 동작이 나르듯 빨라졌다.

저녁시간이라 맑은 기상임에도 바람결 매우 찼다.

목도리와 장갑을 꺼냈다.

매무새 단도리를 하며 나름 머리를 굴렸다.

용머리해안부터 갈까, 사계리 쪽으로 먼저 갈까?

해 넘어가기 전에 유채꽃을 담으려니 마음이 급했다.

산그늘 내려앉기 시작하는 사계리동동 방향이라 그쪽으로 내려갔다.

어디 어디가 산방산을 배경으로 한 유채꽃 스팟인지 알기에 조르르 내달았다.

식당 옆 유채밭 꽃무더기가 실했다.

싱싱한 꽃대를 살리려 해도 바람 거세게 불어 내동 흔들리는 유채꽃.

산방산 측면을 유채밭과 함께 담아 몇 장, 여행스케치 건물을 넣은 유채꽃 정경도 몇몇 장 기분 내키는 대로 담는다.


이제 용머리로 향하는 언덕길을 걷는다.

새로이 건물들 하도 들어서 시야 가린 때문인가.

유채밭 그쯤에서 만날 법한데 노란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눗누렇게 메마른 공터와 새 건물만 나타난다.

어라? 이게 아닌 데~.

용머리 초입까지 내려가도 매양 그 타령이다.

갓 유채 씨 뿌린 듯 겨우 푸릇푸릇한 밭자리만 기다릴 따름이다.

마치 이쪽저쪽 상권이 유채꽃 개화기를 조절해 자네 먼저, 그댄 뒤에 하면서 약조 아닌 단합이라도 한 듯.

이 방향이 단아한 산방산을 뒤배경 삼아 유채꽃 넣고 찍으면 프레임 최고인데 하는 수 없다.

용머리 해안길 다 잠긴 물때라 이리저리 헛수고만 하고 눈치껏 퇴각한다.

허위허위 언덕길 오른다.

해풍 여전히 거칠어도 온화한 잔광.

곧 넘어갈 해님이 마지막 자비 베풀어 누리를 따스한 빛으로 감싼 덕분이다.

산방산 아래 공터 저만치 한 마리 백마가 마른풀 뜯는 중이다.

송악산 저 너머로 노을 서서히 내리고 있어도 산방산 이마 위 벽공 아직은 짙푸르다.

형제섬 띄운 바다도 여전 청청하다.

거기서 날 위한 풍경 만들어 줘 반가워 그리고 고마워.

천천히 馬氏 향해 다가간다.

관광지 마 씨라 사람들 익숙한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식사에 진심이나 가끔 고개를 치켜든다.

한참을 산과 말과 나, 그렇게 마주하고 서있었다.

성큼 산그늘 깊어진다.

깃친 나무에 찾아든 까치소리 청량하게 들린다.

병오년 새해를 맞아 적토마이건 백마이건 잘 생긴 말도 만나고 길조도 만났으니 올 한 해도 승리할 줄로.

이 나이엔 심신 건강하게 잘 놀고 잘 지내는 사람이 곧 승리자다.



불평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던가.
대신 은총 목록, 감사할 일들을 적어보라고 했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숨 쉬는 것부터가 축복이라는 말대로 꼽아보니 많고도 많다.
불만에 속지만 않는다면 하루하루 그야말로 넘치는 축복이요 고마운 일 천지가 아닌가.
나이들어도 혈압약 안 먹고 혈당치나 콜레스테롤 수치 신경 안 쓰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살아가는데 첫째 자리 차지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창을 열면 신비로운 여명이 번지는 남녘바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데다 오늘도 하늘은 눈부신 벽옥, 푸르른 하늘빛이 반겨주니 이 아니 미쁜가.

현관 여니 한라산 씻은 듯 맑은 자태 오연히 떠오른다.

제주에 살며 이만하면 더 바랄 거 없이 족한 환경이다.
아랫집 뜨락 나목 잔가지들이 고요한 걸 보니 바람도 잔잔한 모양이다.
걷기에 아주 좋은 날씨, 사대육신 아무 데도 불편한 데 없어 가고 싶은 곳 가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껍고 고마운가.


나이를 핑계 삼아 누구 눈치 볼 일없이 자유자재로 심중 생각과 오피니언 개진도 구애됨 없이 펴놓으니 후련하다.

시시콜콜한 일상사 펼쳐놔도 흉보다는 공감 눌러주는 좋은 글벗들이 있으므로 황감하다.
멀리 떨어져 지낼지언정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만큼 다행스러운 일도 없으리라.
맡은 일에 성실한 것 또한 훌륭한 기도라 하였듯 주어진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살고 있는 자식들도 든든하다.
할머니라 불러주는 손녀가 벌써 증손을 안겨주겠다니 그야말로 신비롭고도 감사 충만이다.
허송세월하지 않게 적당한 일거리 맡겨져 꾸준한 내 역할 갖는다는 것도 생각사록 감격이다.

심심치 않게 이끌어주는 이런저런 놀이터도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작지만 편안한 내 거처가 있다는 것도 참으로 큰 기쁨이다.

웃음 짓게 하는 좋은 인연들을 만나니 행복지수 한층 높아짐도 충만한 복이다.


네덜란드의 하위징아(J. Huizinga)는 ‘놀이는 문화 자체이며, 놀이가 빠진 문명은 상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고로 삶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여야 한다.

놀이의 목적은 즐거움이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삶을 놀이로 채우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일거리나 직업을 노동으로 대하면 힘겹기만 하다.

노동과 놀이가 삶 속에서 자연스레 어우러진다면 우릴 지치게 하는 노동의 피로도 반감시키련만.

미국에서 단순노동인 세탁소를 하며 그곳을 난 놀일터라 명명했다.

짬짬이 카운터를 녹색 플랜트로 가꾸고 계절 바뀔 적마다 공간에 변화를 줬다.

하루의 반을 저당 잡혀 지내면서도 깝깝하다거나 지겹지만은 않았다.

어느 여건에 놓여지더라도 그 환경에 구순하게 맞춰가기, 말하자면 적응력이 꽤 좋은 편이다.


하나일지라도 애틋하게 챙겨주는 동기가 있음도, 善緣 이어질 수 있었음도 감사할 대목이다.
만나러 오겠다는 먼데 친구들이 있고 속내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벗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행복이다.
그립고 보고 싶다 하여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늘.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이 있는 것도, 즐겨 몰두하는 취미가 있는 것도 축복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등 두드려 격려하고 성원해 주는 이웃들이 있음도 고맙다.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멋진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며 향긋한 풀 내음 맡을 수 있는 오감과 감성이 싱그럽게 깨어있음도 소중스런 은혜다.
가까이 비다가 있고 새소리가 들리는 전원의 투명한 공기 속에서 살 수 있음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북쪽이 아닌 남한에서 태어난 것에 거듭거듭 감사한다.
그리고 또....... 헤어보니 끝이 없다.
정녕 그랬구나.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라 했는데, 너무도 무심히 당연한 듯 살아왔구나.

포스팅 읽어주신 모든 분, 올 한 해 두루두루 청안(淸安)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