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도 기찻길이 있다

by 무량화


에이~~ 설마?

섬에 무슨 기차가 다닌다구!

관광지 놀이기구 기차라면 모르겠지만.

미니 열차나 증기기관차가 다니는 테마파크도 아니다.

바다로 향하는 이 기찻길은 해녀들이 이용하는 협궤철도다.

해녀 탈의장에서 삶터인 바다까지 이어졌다.

거리가 제법 된다.

기차가 다니는 선로가 아니라,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무겁게 지고 나오는 대신 수레에 싣고 운반하게끔 시에서 레일을 설치했다.

어장진입로 정비사업이 의외의 성과를 거두며 새로운 관광명소로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사진작가들이 몰리는 핫스팟이다.

LA 도심의 유명한 미니 기찻길은 길이가 약 90m로 언덕을 오르내리는 데, 세계에서 가장 짧은 철도다.

Angels Flight 철로에서 '라라 랜드'라는 로맨틱 영화도 찍었다.

그에 비해 진입하는 구간에 120m가량의 레일이 설치돼 있으니 외려 더 긴 편이다.

레일 양 가에는 돌탑이 죽 서있다.

현무암 소탈한 검은 탑들은 말없이 해녀들의 무사한 하루를 기원해 준다




이 동네는 전부터 자주 왔던 곳이다.

일과리 ㅡ영락리 ㅡ 무릉리 해변은 뭍에서 돌고래들을 관찰할 수 있는 목이기 때문이다.

처음 돌고래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일주일에 서너 번도 왔었다.

오후 서너 시경이면 걔네들은 무리 지어 모슬포 방향으로 틀림없이 이동하곤 했다.

이번에 온 주목적은 돌고래가 아닌 신춘굿 구경하러 나선 걸음이다.

제주 해녀들의 공동체 의식과 해양 신앙이 담긴 문화유산인 굿거리다.

바다속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의 무사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정이월의 민속 제례에 속한다.

어제는 동쪽인 남원 신례리 어촌계에서 아침 아홉 시에 신춘굿을 한다는 신문 보도만 믿고 일찌감치 나섰으나 밤에 지낸대서 헛걸음질.

오늘은 서쪽 동일리에서 해녀굿을 한다기에 부지런을 떨었으나 어촌계도 못 찾고 강한 해풍만 맞으며 헛수고했다.

물론 전화질도 안 해볼 리 만무, 주말이라 두 곳 다 전화를 받지조차 않았다.

신례리 바다는 서귀포 해변치고는 색다른 곳, 현무암 깔린 대신 검은 모래밭에 몽돌이 많아 한 시간 여 탐석객이 됐었다.

수석에 문외한이 아무리 돌밭을 누벼봤자 안목이 없으니 산수석은 고사하고 월석도 띌 리 없다.

돌을 집었다 놨다 계속하며 바로 곁 파도소리만 질리도록 듣고 왔다.

용왕굿, 영등굿, 해신제, 수신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열리는 한바탕의 굿판, 신명나는 심방의 춤사위는 만나지 못한 채 헛걸음질하기는 여기도 마찬가지..

동일리는 잘 아는 마을이자 노을해안길이 있어 진작에 걸어본 곳.

이번엔 거의 마을 탐방하듯 샅샅이 훑고 다녔는데 그 포스팅은 내일로 미루고.



오전엔 하늘이 꾸므레해서 동네길만 걸었는데 차츰 날이 들었다.

그렇다면 전에 왔다가 바다 거칠고 물때도 놓쳐 못 걸어 본 바다 기찻길을 보러 가자!

아는 길이라 빠르게 직진했다.

일과리 어촌계 탈의실 건물 인근 도로에 차량과 인파가 뒤섞여 있었다.

인당수처럼 시퍼런 바다, 세찬 해풍에 파도는 검은 현무암 해변으로 거듭거듭 허옇게 밀려들었다.

멀리까지 뻗은 레일 로드가 보였다.

물이 들어오고는 있었으나 타이밍 마침맞았다.

슬로 달리 인(Slow Dolly In) 기법처럼 천천히 바다 향해 레일 위를 걸어 나갔다.

가족들이, 연인들이 레일 위를 걸어서 바다 끝으로 나아갔다.

끝까지 가다가 파도에 막히면 뒤돌아섰다.

그러나 맨 앞에 삼각대 세우고 진을 친 세 사람의 사진광은 발 적셔가면서도 파도와 맞서 자리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결국 내 피사체는 사진 찍는 그들 뒷모습.

수시로 포효하는 파도 담느라 거기 몰입한 그들은 자신들 뒷태가 찍히는지도 모르는 거 같았다.

사실 내 경우 파도보다 더 좋은 스토리텔링감이 되어준 그들이다.

레일은 앞으로 곧장 뻗어 있지만 내 시선은 멀찌감치 물러선 자리에서 사유의 시간을 새긴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뒷모습을 선택한 건 이미 한 겹 깊은 풍경을 만드는 일.

바다를 찍는 그들보다 바다를 찍는 이를 찍는 내가
더 깊은 물가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사진은 셔터로 찍지만 이 풍경은 오래 마음에 간직될 터라서일까.

바닷물이 자꾸 밀려와 레일 위로 차오른다.

그들은 삼각대를 거둬 어깨에 얹고는 그제사 하나 둘 퇴각했다.

나도 느릿한 걸음으로 바다와 멀어졌다.




주소지 ㅡ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일과대수로27번길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