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글동글 이마 맞댄 잎새들은 항시 푸르렀다. 아파트 울 역할을 하는 그 사철나무가 어느 날부터인가 병색이 완연하며 수척해졌다. 희끗한 반점이 기승을 부려 잎을 오갈 지게 만드는 증세는 나날이 깊어만 갔다. 기계충 번지듯 급속도로 나무 전체에 번져 가는 병. 시난고난 하는 기색으로야 안타깝게도 회생 가망성마저 기대하기 어려웠다.
새봄. 슬그머니 양지꽃 제비꽃이 피어났다. 얼음 풀린 계곡가 산수유 무리 져 축제 펼친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꽃망울 한껏 부풀어 오른 목련 가지 아래 아! 놀랍게도 새 움 부쩍 솟아난 그 사철나무. 병들어 죽어가던 묵은 잎을 완전히 압도해 버리고 기세 당당히 영역을 넓혀 가는 연녹빛 윤기로운 잎새들. 경이였다. 하루 다르게 사철나무는 생기찬 옛 모습으로 회복돼 갔다.
위대한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소생과 부활의 에너지로 충만한 봄이라는 계절에 있음이리. 봄은 순환을 멈추지 않는 자연계의 질서일 따름이라지만, 생명의 심지마다에 불꽃을 점화시키는 그는 누구인가. 아무도 일러주지 않건만, 아무도 불러내지 않건만 봄이 되니 예서제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정녕 찬양 바쳐 마땅한 축복의 봄이 아니랴.
용솟음치며 약동하는 힘찬 생명력이 미쁘다. 지팡이를 꽂아두어도 싱그런 수액이 차올라 푸른 움이 돋을 성싶다. 연두색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복숭아 과원은 햅팥을 뿌려 놓은 양 온통 불그레하고 백양나무 줄기 끝은 희기가 아기 속살 같다.
실크 자락 휘감기듯 부드러이 감기는 바람결에, 겨우내 삭풍에 쓸리던 가지마다 물이 오른다. 수액은 식물의 피다. 투명히 푸른 피다. 슬몃 봄기운이 스쳤는가 싶은데 어느새 피돌기가 빨라진다. 강해진다. 뜨거워진다. 가속도가 붙어 숨이 찰 지경이나 정작 나무는 고요 그 자체다. 靜中動.
도톰하던 눈엽이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차츰 술렁대기 시작하는 숲. 그 기운이 내게까지 전이돼 공연히 어깻죽지가 근지럽다. 묘하도록 아리아리한 느낌에 가만히 눈이 감긴다. 어쩌면 속된 욕정이야 순식간에 스러지는 불꽃놀이의 허무, 재로 날리는 가벼운 유희일 따름. 그보다는 넌지시 잡은 손길의 감촉처럼, 귓불 스친 은근한 숨결처럼, 오래되어도 절로 홍조 감돌게 하며 행복으로 되뇌어지는 짧은 추억 한 자락.
사랑은 미처 아닐지라도 그냥 한번씩 감미로이 달아오르는 가슴이게 하는 기억 같은 것 문득 떠오른다. 구름을 타듯 상기되는 가슴. 그 마음 골짝에 은근슬쩍 열꽃이 핀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양기 탓인가. 봄은 교태도 없이 그대로 안고 무너지게 만드는 야릇한 유혹이다. 닿는 곳마다 맹렬한 전파력으로 옮겨붙는 수상쩍은 열병이다. 봄바람은 아마도 그렇게 드나 보다.
침묵의 겨울은 넘쳐나는 氣의 계절인 봄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 냉엄했던가. 눈에 띄는 변화는 나무에서만 감지되는 건 아니다. 황량이 메마른 들판에 쑥이 뽀얗게 올라온다. 부지런한 까치는 털어내고 또 털어내도 전봇대 꼭대기에 알 품을 집을 짓는다. 꺼칠하던 참새 날갯짓에 부쩍 활력이 더해진다.
숫된 설렘이야 연분홍 진달래 만이랴. 홀연 꽃대 키워 귀태 드러내는 수선화 군자란도 제철을 맞는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현상이건만 이 봄, 보는 것마다 새로워 다시금 탄성이 터진다. 참으로 놀라운 이적이 아니랴.
그러한 이적이 우리에게도 다가왔으면 좋겠다. 고단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빛으로. 한때, 고도성장의 열기에 들떠 질펀하니 샴페인 터트리며 여름을 한껏 방만하게 즐겼다. 허나 결실의 가을을 맞기도 전 된서리가 내렸다. 아찔할 새도 없이 푸른 잎은 낙엽으로 졌다. 급전직하의 추락. 정신없이 하강 기류를 탔다. 추스르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이 마구잡이로 굴러떨어졌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그 유탄은 가까운 친척 집에도 친구네도 날아들었다. 공들여 가꾼 사업이 하루아침에 거덜났다. 삼십 대 한창 물오른 나이에 일손이 묶이고 말았다. 겨울은 춥고 그리고 길었다. 혹독했던 지난겨울.
겨울이 깊으면 봄도 머지않다 했던가. 그 봄은 어디쯤 오고 있는 걸까. IMF를 극복했다고, 경기가 풀렸다고 호들갑이지만 체감온도는 여전히 빙점 이하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시 봄. 그 봄의 경이를, 이적을 기대해 본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