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긴 회색 계절 이후.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희망의 빛으로 부활의 의미로 다가선 입춘. 창가에 권태로이 꽂혀 있던 드라이플라워가 새삼 칙칙하다고 여겨진 것은 근자의 일이었다. 비록 박제된 메마름 속에 본래의 향과 빛을 잃은 꽃이지만 고담(枯淡)한 색조가 아늑해서 좋은 드라이플라워. 그 변함없는 표정에도 의외로 싫증 내지 않고 몇 달 동안 가까이 지낼 수 있었음은 칩거의 계절 탓이리라.
정남향 베란다 가득 햇살 맑게 내리는 아침. 미안쩍기는 하나 드라이플라워를 치우고 그 자리에다 프리지어 한 묶음에 서너 송이 아이리스를 곁들여 꽂았다. 그랬더니 금세 감도는 봄기운. 몇 송이 꽃에 이렇듯 봄은 실려 오는가. 꽃들로 하여 빗장 여미는 완고한 겨울. 이로써 옥죄이던 질곡의 매듭이 하나씩 하나씩 풀려 나리라. 침체의 암울함. 은둔의 외로움도 더불어. 이젠 부질없는 허명(虛名)에 몰두하던 환(幻)에서 깨어나 진실로 겸손하게 생활 앞에 서야 하리. 얼마쯤 무례한 오만이며 감정의 사치까지도 부끄러워해야 하리.
꽃에서 전해지는 싱그런 생기가 내게도 선혈(鮮血)의 맥을 새로이 뛰게 한다. 하여 내 온 전신이 건강한 탄력으로 재충전됨을 느낀다. 생명이란 이리도 미쁜 것인가. 문득 곁에 있는 모든 것을 한껏 보듬어 따뜻이 감싸안고 싶어진다. 순일한 정감의 파장을 일구는 그 꽃들은 빛깔부터가 초봄에 어울리게 은은하다. 게다가 순하디 순한 꽃잎에 풀 내음 같기도 한 여린 향. 그러나 아직은 봄의 들머리에 서성이는 바람결 차다.
지난겨울, 우리가 가졌던 긴 여행은 동천(冬天)의 시린 빚 있음에 아름다웠다. 지순히 맑아 오히려 조심스러운 청청함이며 눈부심이며…. 저토록 허심(虛心)히 비울 줄 아는 그답게 산뜻한 결미(結尾)로 장식하지 못하고 무엇에 그리 집착과 미련이 깊었음일까. 버림에 익숙하고 새것에 쉬 탐닉하는 세간(世間)의 정(情)쯤이야 연민으로 다독이고 겨울은 이제 초연해야 하리. 어쩌면 말없이 떠나는 뒷모습의 남루를 보이기 싫어 겨울은 몇 번인가 거친 용트림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리 드센 저항이나 반발도 결국은 우주의 섭리에 맞서지 못하는 것. 틀림없이 오가는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이러한 사계의 순환에서 자연스레 윤회를 배우는 우리가 아니던가.
끝 모를 되풀이. 그 반복 속에 그래도 시작이며 출발과 동질의 의미로 느껴지는 건 역시 봄이다. 시작의 부푼 마음 그 신선함과 출발점에 선 들뜬 마음 그 설레임을 함께 수용하고도 저리 침착할 수 있을까 봄은. 새벽이 칠흑의 어둠에서 태동하듯 삼동(三冬)의 설백(雪白) 딛고 일어서는 봄의 의지. 그 가슴 두근거리는 숨소리에 덩달아 출렁이는 자신이지만 굳이 가라앉히려 애쓰진 않는다. 닫힐 수밖에 없는 겨울의 그늘 앞에 극명한 대비로 선 신춘의 양광(陽光). 그러나 어쩔 것인가. 안으로 다스려 온 열정이 더 이상 참아 견디지 못하고 용암처럼 솟구쳐 오르는 뜨거움 있으니.
봄의 징후야 서서히 풀어지는 해빙의 유역 따라 물오르는 버들가지뿐이랴. 마른 풀 아래 푸른 숨결 가다듬는 나무새뿐이랴. 연한 부리로 발돋음함 수선(水仙)의 떨리는 꽃 열림뿐이랴. 이리도 벅차게 올올이 실핏줄 마다에 넘쳐 나는 생명의 힘찬 맥박. 겨울 동안 흠뻑 취해 들었던 침묵과 침잠에서 일제히 깨어나 열린 세계의 소리를, 빛을 받아들이고자 촉수 펴는 삼라만상의 힘찬 도약을 보라. 온 누리에 충만한 자연의 합창은 거부할 수 없는 순리이며 질서임에야.
무형에서 비롯되고 빈터에서 이루어지는 신비 그 범상치 않은 조짐 앞에 어찌 의연할 수 있을까. 더구나 봄은 뜨거운 정열 짐짓 다스려 온유의 미소로 발길 어여쁘게 다가오는 것을. 삼가는 듯 조신한 몸짓으로, 망설이듯 다소곳한 걸음으로 그렇게 뜰에 내리는 봄. 창밖에 봉긋한 목련 망울이 백옥을 품고 무르녹을 봄이 머잖음을 일러준다. 빈 가지에 잎 돋고 깃발인 양 나부낄 멧새의 지저귐. 골목엔 끊겼던 아이들의 함성이 노랫소리로 되살아 나리라.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양 맨살 그대로 바람에 떨던 마른 줄기지만 그 속에 간직된 나무의 푸른 꿈을 안다. 가을 이후 생명의 가락이 고요히 잦아들었을 뿐 영영 그 자취 사라진 것은 아니었음을. 새봄에의 기대. 윤기로운 긴장감을 사랑하면서 이 봄 찬란한 비상도 함께 꿈꾼다. 마중하지 않아도 한사코 오는 봄. 서두름 없이 그러나 늦춤도 없이 이리도 부드러이 정녕 봄은 오고 있으니. 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