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리ㅡ무릉리
대정골 노을해안로를 우연히 걷게 됐다.
이름과 걸맞게 노을질 무렵이 아니라 이른 아침에 걸었으나 어쨌든.
이 길은 모슬포에서 대정서초등학교를 거쳐 서우봉까지 길게 뻗어있는 해안도로다.
보통은 대정읍 일과리에서 신도1리까지로 규정하나 대정서초가 있고 해넘이길이며 해넘이축제를 여는 동일리도 자동 포함될 터.
서쪽바다답게 환상적인 일몰 명소이면서 오후엔 남방큰돌고래의 유영을 볼 수 있는 노을해안로다.
올레길 12코스와 겹치며 탁 트여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풍광과 포효하는 파도소리와도 동행하게 된다.
출발은 동일1리 어촌계 앞이다.
흠! 얄궂게도 마땅치 않게 여기는 돌고래 투어간판이 떡하니 내걸린 파란색 건물.
당시 환경부는 낮잠만 잤나?
2019년 해양수산부가 주관하는 해양관광상품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고래 힐링투어다.
이는 수애기들의 삶터를 휘젓는 만행으로 걔들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데 뭐라! 힐링?
매사 인간 위주다.
자연계의 주인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생명체인 동식물을 총망라한다.
불가에서는 이를 마음과 생각을 가진 유정물과 마음이 담기지 않은 무정물로 구분한다.
생명 존중의 가치는 인간을 넘어 모든 유정물을 포함하며, 나아가 생태 환경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범위이다.
환경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살아가야 할 공간 ’이라면, 생태는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의 생존 형태’를 이른다.
고래 관광투어가 인간 욕망을 채우기 위한 공간의 확장인 반면, 수애기의 삶터에 대한 장애물이 되어 일방적인 수애기의 희생을 요구당한다면?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적인 인연(因緣)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된 채 공존하는 관계다.
불경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온 생명체에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불성이 무엇인가.
부처가 될 몸과 마음의 바탕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일체 중생 모두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였듯 연기법에 따른 상생의 원리에 따라 뫼비우스의 띠가 보여주는 자타불이(自他不二) 가르침에 맞닿게 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거늘.
당장 목전의 잇속만 챙기려 마을 앞을 지나가는 고래를 상품화한 아이템에 정부 수산청 당국에서는 대상도 안겨줬다만.
그 덕에 고래 투어를 위한 선착장 가는 길도 널찍하게 닦여있고 무지개 색으로 방책도 야물게 세워놨다.
하지만 동네 목선은 고래 투어길 터 닦아 대형선박회사만 배불리 게 해줬다.
요새는 운진항에서 매일, 야생고래 투어용 새하얀 요트나 유람선을 띄운다.
하지만 동일리에서나 일과리 영락리 무릉리 해안가에서 육안으로도 능히 돌고래 떼 재롱을 볼 수 있는데.
모슬포 서북쪽 방향에 위치한 해안마을인 동일리다.
그날은 마을 어촌계에서 신춘굿 연다기에 구경 왔던 차, 허나 허탕치고 모슬포 역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작 소식 듣고 일부러 찾아온 굿은 못 봤으니 대신 근처 볼거리인 염전터와 서림연대라도 보고 가기로.
날씨도 궂은데 고행자처럼 거센 해풍에 허뚱대며 잔뜩 웅크리고 걷는 꼴이라니 한마디로 가관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절대로 못할 짓, 고로 다 제멋에 산다지.
용천수 샘솟던 홍물을 지나 바다를 왼짝에 거느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예전 '날외염전터'는 밀물이 솰솰 차오르며 염전 바닥을 지워나갔다.
내 걸음보다 물 들어오는 속도는 훨씬 빨랐다.
하필이면 들물이 해안가로 급하게 밀려들어와 바닷물 벙벙한 시간대인 마침 만조 때였던 것.
금세 물이 가득 차서 해수면 높고 넓게 펼쳐졌다.
염전터는 이제 낚시터가 될 정도였으므로 염전 구경도 포기했다.
김상헌의 '남사록'에 제주 염전이 나오는 걸로 미루어 조선시대부터 소금을 만들어 쓴 흔적이 읽힌다만.
그중 동일리 염전은 제주 서부지역 최대 규모의 뻘밭형 염전으로 한때 소금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였다는데.
반반한 현무암 위에 뻘을 채워 바닷물을 가두었던 해안가는 무성한 갈대만 드러난 채 시퍼러이 출렁대는 바다 일색일 따름.
곧장 연대 향해 걸었다.
다리 건너부터는 일과리다.
초입에서 장수원이라는 참한 용천수 터가 기다렸다.
바다와 곧바로 연결된 지점에서 마을 샘터가 될 만큼 수질 좋고 수량 풍부한 단물이 솟았다니 신통하다.
이어서 만난 갯대추 자생지 보호구역, 가시 투성이 대추나무가 군락을 이뤘다.
몇 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자세히 살펴봤으나 빈약한 가시나무 그 어디에도 열매를 단 적은 없었다.
'탄소를 흡수하는 세미맹그로브정원'이란 안내판을 읽고는 뭐지? 싶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 흡수 나무를 다량
심어서 해양생태계를 복원시키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펼친 모양이다.
맹그로브는 열대 해안가에 무성한 뿌리 드러낸 독특한 수형의 나무다.
이 식물은 일반 산림보다 탄소저장 능력이 네다섯 배 넘는단다.
갯대추나 황근 같은 염생식물에게도 그 특별한 기능이 있음을 발견, 이들 군락지 500여 군데를 확보했다고
노란 무궁화인 황근은 일출봉 맞은편 식산봉 아래 해수면 근처 군락지에서 처음 본 이래, 근자엔 서귀포 곳곳에 식재된 걸 보고 의아했는데 까닭을 알듯 했다.
탄소를 흡수하는 기특한 수종이라니.
갯대추 군락지에서 몇 걸음 옮기면 석성 같은 연대가 무뚝뚝하게 서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일과대수로 27번 길 53-1에 자리한 서림연대(西林煙臺).
조선시대 왜구로부터 섬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 통신 시설이 연대다.
북쪽으로 우두 연대, 남쪽으로는 무수 연대에 각각 연결되어 있으며 대정현 모슬진 소속이었다고.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위급 상황을 알리는 장소로 봉수대와 같은 역할인데 제주에선 연대라 통칭된다.
연대는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 설치되었고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했다는 차이는 있다.
연대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영락리 해안, 서쪽으로는 하모리까지 볼 수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3-22호이다.
재작년부터 인근에 황근을 아주 많이 식재했길래 의아했는데 갯대추 자생지 설명글 통해 고개 절로 끄덕여졌다.
정월달 황근은 특유의 노르스름한 줄기에 마른 씨앗봉오리만 물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스며드는 꽃향.
향기를 따라가 보니 황근 덤불 뒤편 풀숲에 연미색 수선화 만발해 있었다.
숨어서 은은히 풀어내는 수선화 향기는 더없이 맑고 고아해 유혹적이었다.
가시덤불 헤치고 다가가려다 모든 유혹에는 마성이 숨었느니, 마음 다잡고 후딱 연대를 떠났다.
왼편은 바다, 오른편은 대정마늘밭이 따라온다.
다음에 들른 곳은 바다철로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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