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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0. 2024

비애 서린 창덕궁 내전

벼르던 비원 구경을 간 날, 황사로 하늘빛 뿌옇다.

금아선생이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비원에 가겠다'는 글을 읽고 한번 가봐야지 한 지가 언제인가.

그런데 이제 비원은 아무 때나 무시로 드나들 수도 없거니와 홀로 호젓하게 거닐 수 있는 자유로운 산책지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이름부터 신비스러운 비원, 시크릿가든이 아니라 창덕궁 후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예매를 통해 한정된 인원만 문화해설사를 따라서 매뉴얼대로 한바퀴 비잉 둘러보고 나오게 짜여 있었다.  

당일 현장예매를 하고 보니 세 시간여 공백이 생겼기에 창덕궁 여기저기 기웃대며 천천히 돌아다녔다.

동궐로도 불리는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저만치 진선문 지나야 정사를 보는 인정전 일원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숙장문 거쳐야 편전인 선정전과 여러 전각에 이른다. 말 그대로 구중궁궐이다.


젊은 처자들은 물색 고운 한복 차려입고 황녀 된 기분으로 궁궐 거닐며 봄 한철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왕의 공간보다 더 깊숙하게 들어앉은 내전인 대조전은 왕가 여인들의 생활공간이다.

왕비와 대비의 거처가 있으며 왕손이 태어나는가 하면 태조 성종 효종 순종 등은 여기서 눈을 감았다.

조선 역대 왕들 모두가 정통성 없는 왕인데 반해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원손-세손-세자-왕으로 즉위한 조선의 유일한 왕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지 이레만에 어머니를 잃고 어릴 적에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연달아 세상을 뜨자 단종에겐 왕실 후견인이 없었다.

결국 삼촌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은 이 대조전에서 유배 교서를 받고 돈화문을 나서서 궁을 뒤로했다 한다.

창덕궁 궐내에 있으나 사대부집처럼 수수한 낙선재는 구중궁궐 맨 끄트머리에 자리했다.

이 낙선재야말로 궁중비사가 숱하게 써내려 져 온 곳.

조선왕 가운데서 인물 가장 출중했다는 헌종이 지극한 사랑 쏟아부은 경빈 위해 지었으나 왕의 요절로 비련의 장소 된 낙선재.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열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이듬해 조선의 정궁으로 경복궁을 세운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 이방원은 정적인 정도전이 건설하다시피 한 경복궁이 꺼림칙한 데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피를 본 현장이니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지내기 꺼려졌을 게다.   

마침내 태종 5년에 이르자 왕은 경복궁을 비워두고 궁궐을 새로 짓고는 창덕궁이라 이름 붙이고 서둘러 이사를 한다.

조선 초기 왕들 대부분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에 머물 때가 많았기에 창덕궁은 오백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역대 임금이 정무를 본 궁궐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자 선조 38년 복구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당시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원되었다.

그러다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돼 인조 25년 궁을 재건하고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만들었다.  

조선말 서구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는 서양식 전등 시설과 전화가 개통되고 차고도 설치되었다.

현재 창덕궁은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북쪽 언덕 너머 비원이 있는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 내전(內殿)의 중심건물로 왕비의 거처이며 용마루가 없는 특이한 지붕이 눈에 띈다​.




창덕궁 안에서 왕조 내부의 암투와 권모술수의 비리 아무리 횡행했다손 쳐도 대대로 왕통 이어나갈 정도만 돼도 괜찮았다.  

기어이 쇠해가는 국운, 망국의 길로 치달아 한낱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비로소 왕손 됨의 뼈저린 비극을 맛본다.

"이곳은 국모가 사는 곳이다. 당장 나가라" 육이오가 터지자 궁으로 밀고 쳐들어온 인민군에게 이렇게 호령한 순종의 왕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보다 더한 비애감을 자아내게 하는 비통한 역사가 구한말 이후에 쓰여지니, 망국의 후손들이 일본을 떠돌다가 마지막 거처로 삼은 곳이 낙선재였다.

고종과 귀비엄 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은 영친왕은 일본에 유학을 가 육사를 다니던 중 메이지 천황의 사촌이었던 아버지를 둔 왕족 출신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한다.

무력한 왕실의 후손일지언정 육사를 마치고 중장까지 오른 이은은 아들 하나를 둔 평온한 가장으로 부부동반 유럽 여행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당시 그들은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의 조지 5세, 교황 비오 11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아돌프 등을 예방하였다니 망국의 황태자 자리일망정 나라 잃은 백성의 참담한 상황에 비하면 그나마 덜 불운했다고 할까.  

1945년, 일본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들은 한동안 무국적 상태로 궁핍 속에서 힘들게 살아야 했다. 물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민초들의 처절한 삶에야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1963년 박정희대통령의 호의로 귀환하게 되나 이미 혼수상태였기에 귀국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그는 결국 병상에서 숨진다.

고종과 귀인양씨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살던 중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나 한평생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덕혜옹주.

쓰시마 번주 가문의 백작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조울증과 조현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이혼을 하고 뒤늦게 낙선재로 돌아와 병상에서 지내다가 불행으로 점철된 한생을 마친다.

하나뿐인 아들마저 죽고 영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옹주와 의지하며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던 마사꼬 이방자 여사도 옹주가 죽은 지 불과 9일 뒤에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이들이 비운의 한생을 살아야 한 데는 침략자들의 죄도 있지만 자신의 나라를 지키지 못한 위정자(爲政者)들의 죄가 더 크다.

낙선재만이 아니라 창덕궁 경내 어디에서나 비극의 잿빛 가락이 스민 듯 느껴짐은 흐린 하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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