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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0. 2024

성북동 올레길의 보석함

서울 한복판에 이리 진귀한 보석들이 촘촘 깔려있었을 줄이야.

마치, 진주 목걸이 알을 흩뿌린 듯도 하고 살짜기 예단함을 열어본 것도 같다.

오랜만에 누린 호사다.

그 자랑이 하고 싶어 얼마나 목젖이 간질거렸던지...

 이날의 외출은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관람이 첫 번째 목적.

두 번째는 수연산방과 간송미술관을 방문한 뒤 성북동 둘레길을 순례하는 일정이었다.

긴 줄을 서서 두 시간쯤 기다린 끝에 <귀로>와 <빨래터>가 있는 박수근 전을
인파에 떼밀리다시피 하며 관람하였다.

한국동란 당시 미군부대에서 같이 일했다는 박수근은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서는 말수 적은 화가로 그려졌다.





성북동엔 이름 있는 재벌가가 몰려있는 ‘부자들 동네’ 답게 골목마다 성채 같은 저택들이 즐비했다.

호주, 캐나다, 콜롬비아 등 30여 개의 대사관저가 집중된 관저촌으로도 명성 높다.

그보다 더 우리 발길을 유혹하는 것은 문화재 지킴이였던 간송의 미술관이 자리한 지역.

상허 이태준 고택인 수연산방, 만해 한용운의 기개가 돋보이는 심우장 자리도 그 근처다.

요정정치의 산실에서 종교시설로 변신한 길상사가 있으며 민간모금운동으로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인 최순우선생 고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 성곽길까지 품고 있는 성북동이다.

 이처럼 다양한 역사문화유산이 한 골목에 밀집되어 있어 볼거리가 널려있는 곳이다.

 

간송미술관은 5월과 10월 두 차례 전시회 때만 일반에 무료 개방한다.

마침 <조선 망국 백주년 추념 회화 전>이 열리고 있다기에 기회를 놓칠세라 북악 산허리 넘어 성북동으로 나들이를 갔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가 마구잡이로 휩쓸어가던 조선조 문화재인 전적 서화 도자기 불상 등 국보급 미술품을 모았으며 훈민정음해례본을 소중히 지켜낸 분이다.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에 수집품을 보관 전시, 명실공히 우리나라 첫 근대식 사립박물관을 열었다.

거기에는 집 다섯 채 값을 주고 구입했다는 훈민정음 원본,

청자운학상 감문매병은 현시가로 백억에 이르나 당시 깎지도 않고 들고 왔다는 국보 68호가 있다.

추사 겸제 혜원 단원을 비롯 김득신의 파적도 등 귀한 문화재 다수가 소장돼 있는 간송미술관.

여기에는 국보 16점, 보물 10점이 포함되어 있다.

숲 여기저기에 숨은 돌탑이며 불상, 녹음에 가려진 고양이 석물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다니던 도중이었다.

아릿한 모정의 기억을 일바치는 때죽나무 은종처럼 하얀 꽃을 만나 잠시 그 향훈 아래 서있기도 했다.

화가의 작품 앞에서 가족 함께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심우장 가는 길’이라는 조그만 표지판은 얼핏 놓치고 스쳐가기 십상.

가파르고 좁은 골목인 심우장길을 오르느라 숨이 턱에 찰 즈음.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 선생이 일제에 저항하는 삶으로 일관된 생의 말년(1933~1944)을

은자처럼 보낸 한옥인 조촐한 심우장(尋牛莊)이 나온다.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치기 때문에 일부러 북향으로 틀어 자리 잡은 삼 칸 누옥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 선생의 휘호 <심우장> 현판이 걸려있다.

깔끔스레 빗질된 마당의 향나무는 만해가 손수 심었다고.

거기서 조금 내려오면 상허 이태준 고택이다.

‘시는 정지용, 문장은 이태준’이라 해서 최고의 산문가로 꼽히던 상허다.

서양화가 근원과 함께 30년대 한국문화예술계를 선도했던 상허는 월북 후 숙청 당한다.

현재는 외증손녀가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전통찻집을 열었는데 담장 너머로 북악산 자락이 보이는 명당이다.

기와집 천지였다는 철원의 한옥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수연산방.

산방은 이태준이 1930년대 초 철원 고향집을 뜯어다 복원시킨 기와집이다.

차분하면서도 고담한 분위기가 운치를 돋워, 누각에 올라 차 한잔 한유로이 마시고 싶게 만든다.

골목을 한참 내려와 한굽이 휘돌면 나타나는 길상사 뜰엔 초파일 뒤끝의 어수선함이 느껴진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고급요정 ‘대원각’이었고 주인인 김영한은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

김영한이 1987년 1천억 원대에 달하는 부지와 건물을 법정스님에게 시주, 대원각은 길상사로 바뀐다.

요정 시절 건물 그대로라 단청이 없는 법당이며 스님들 처소로 바뀐 별실 등
여느 절과 다른 독특한 구조가 불경스러이 눈에 띈다.

<요정과 수행>이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대비로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도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가 살던 옛집이 근처에 있다는데 개방일을 놓쳐 들리지 못했다.

성북동 재개발로 한때 헐릴 위기에 처했으나 민간모금운동으로 구입해서 복원시켰다.

지금은 ‘시민문화유산 1호’가 된 전통한옥이라는데 다음 기회로 미뤘다.

혜곡이 사랑했던 ‘달항아리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만나보기도 하고 이 집에서 집필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음미해 볼 수도 있었으련만 아쉽다.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김환기의 수필 <산방기>중에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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