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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9. 2024

목가적인 너무도 목가적인

카미노 스토리

길고 지루했던 메세타지역이 끝나고 저만치 거대한 산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도가 꽤 되는 겹겹의 산맥인 데다 남성적 풍모인 산세까지 험준해 보여 아예 차로 이동,

 소모사며 엘칸소 외의 이름도 길고 발음하기 까탈스러운 마을들을 휙휙 지나쳤다.

차길에서 굽어보니 걸어서 넘었다간 또 SOS 타전할 뻔했겠다 싶을만치 난코스인 데다 거리도 멀다.

탄광지대라 강원도 못잖게 숱하 많은 터널 지나고 나서야 고원의 청남빛 호수와 강이 보이면서부터 비로소 지형 완만해졌다.

산티아고까지는 이제 2백 킬로 남짓, 해 뜰 무렵 뭇 새소리와 양치식물이 숲을 이룬 한적한 마을길을 걷는다.

이른 시각이나 기온 과히 싸늘치는 않아 걷기 아주 적당한 대기, 촉촉한 공기가 기분 상큼하게 해 준다.

그래선지 카미노 주제곡 같은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가가 절로 새들 노래에 섞여든다.  

이상스레 발리시아지방은 왠지 한번 와봤던 곳 같은 느낌, 이 데자뷔현상은 향토색 짙은 부드러운 흙빛 때문인가.  

그렇게 한국의 남도지방마냥 차진 황토흙의 거름진 농경지가 연달아 이어진다.

낯설지 않게 살갑고도 푸근히 다가와 유정스러이 안겨드는 풍광들,

풍요로운 들녘이며 습습한 숲의 이끼며 드넓은 들꽃 향연이며 병아리 떼 이끈 암탉이며 목장의 한가로운 워낭소리며...

가난했지만 인정 다사로웠던 50년대 한국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소박한 농가들은 안갯속에 낮게 엎드려 있다.

 숲에는 우거진 소나무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인가에는 사과나무 석류나무, 물론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도 흔하다.    

스페인 농촌 역시 젊은이들은 거개가 도시로 떠났는지 부락에서 만난 주민들은 대부분 노년층.

목장지대에서도 목동 아닌 나이 지긋한 목부가 나무지팡이 짚고서서 양 떼 돌보고 소 무리 관리한다.

길가 바로 곁 돌담 안의 너른 목장을 지나는데 허물어져 흘러내린 담을 넘어
 미나리아재비 닮은 풀을 한 움큼 쥐고 나오는 노인이 있었다.

맨손으로 잡아 뜯어 한큼 움켜쥔 무성한 잡초, 꽃을 보아하니 미나리아재비가 틀림없다.

독초라서 행여 소가 먹으면 탈이라도 나는가 묻고 싶어 다가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들고 있는 내 폰을 가리키며 자기 가슴을 손가락질해 보인다.  

아마도 진작부터 길거리 캐스팅되어 모델노릇을 어지간히 해본 모양이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순박한 얼굴 가득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끄덕댄다.

사진 찍을 준비 마쳤으므로 어서 찍으라는 신호 같다.

할리우드 거리나 명승지에서 특이한 복장을 하고서, 같이 사진 찍어주며 대가 받는 알바생도 있다.

마릴린 먼로 차림의 금발아가씨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적극 엉겨 붙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영혼이 달아난다면서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아프리카 어느 오지인들도 있다고 들었다.

반면 유럽 할아버지는 자진해서 길 한복판에 떡하니 서서 포즈 잡더니 한 컷 찍으란다.

전달할 길도 없는 사진이라 일단 찍힌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법 없이도 살듯 사람 좋은 얼굴로 흐뭇하게 웃는다.

치아 빠져 오물거리면서 잘 가라고 손짓하는 그분이 예전 우리네 땅에서 뵈었음직한 촌노 같았다.  

갈리시아는 비교적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 데다 위협적인 높은 산이 있어서인지 외세에 시달린 흔적이 별로 없는 평화로운 지역.

주 깃발 문장의 중앙에 성작이 새겨져 있어서 하늘의 보살핌 각별했던가.


중세 스페인어로 성작의 Calice라는 발음이 지역명인 Galice와 발음이 같아서 일뿐이라지만.


훗날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데 선두에 섰던 국토회복운동의 근거지가 된 갈리시아라는 자긍심 드높은 이곳.


저 멀리 산과 산을 연결해 길게 뻗은 사회기반시설인 고가도로가 목가적인 농촌마을 걷는 동안 계속 따른다.


프랑코 독재시절 유독 착취가 심해 곤궁해지고 피폐했던 갈리시아에 대한 국가 차원의 배려일까.


덥고 건조한 스페인 타 지역과 달리 갈리시아 날씨는 서늘하고 습한 편으로 강수량 넉넉해 농지가 비옥하다.


눈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일교차가 적으므로 매우 살기 좋은 고장으로도 꼽힌다.


뭉게뭉게 소담한 구름 때론 잿빛 무거운 구름장, 짓궂게 오락가락 비도 살짝, 파랗게 갠 하늘에 해 쨍쨍, 그러거나 말거나다.


우리는 고만고만하게 낡아가는 농가를 지나고 이끼옷 입은 나무마다 담쟁이덩굴 휘감긴 숲 오솔길 즐거이 걷는다.


어쩌다 가끔 심심한 듯 뻐꾹 대는 뻐꾸기, 그에 비해 딱따구리 소리 선심 쓰듯 유독 쟁쟁히 들린다.


소와 말을 방목하는 언덕 위 푸르른 목초지를 지나 성문같이 생긴 오래된 아치 터널을 지난다.


강 건너 저편에 아슴아슴 내려다 보이는 규모 제법되는 도시 점차 가까워진다.


이정표에 폰페라다라고 쓰여있다.


​https://brunch.co.kr/@muryanghwa/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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