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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3. 2024

무지개 허리띠

지난해.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뉴스 메이커가 있었다. 그는 깨끗하게 잘 생긴 백인이자 사회 지도급 인사였다. 정계에서도 주목받는 전도유망한 뉴저지 주지사였던 그. 동성애자였음을 공식 시인하고는 뉴저지 주지사 직에서 자진 사퇴한 맥그리비. 아내와 딸을 둔 가장이기도 했던 그의 발언은 아무리 개방적인 미국이라 해도 뜻밖의 충격파로 전해졌다.



자기 파멸의 길을 가게 한 상대 보좌관으로부터 모종의 협박을 받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자 스스로 자멸을 택한 그. 민주당의 차세대 다크호스 중 하나였던 그는 정치생명이 끝남은 물론 가정적으로는 파탄을 불러오고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다 멀쩡히 가정을 지닌 그가 그 위험한 관계에 빠지게 됐을까. 몇 년 전의 이른바 ‘지퍼 게이트’는 호기심 어린 관음증을 유발했다면 그의 변태성욕은 차라리 측은함마저 들게 했다. 그날, 고역스럽게도 기자회견장에 동행했던 무표정한 아내. 그보다 오히려 착잡한 심경 고스란히 드러나던 아버지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안쓰러웠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도덕성과 윤리적 가치관을 무엇보다 중히 여긴다는 미국이다. 그럼에도 동성애자가 허다한가 하면 주에 따라 동성결혼이 허용되기도 하는 나라. 묘한 양면성이다. 동성애는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 배치된다. 그래서 동성애자이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무지개 허리띠를 두른 이들의 교회 출입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 미국이다.



재작년이었던가, 필라델피아 국제영화제 때였다. 미국 도심 한복판의 극장에서 영어 자막이 깔리는 한국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당시는 신기하고 특별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날 상영되는 <번지 점프를 하다>는 감독과의 만남 시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극장에서 관람하는 한국영화에 감격하여 정작 영화감상은 건성이었다. 아무튼 미국인들로 가득 찬 극장에서 듣는 익숙한 한국어 대사는 귀가 간질거리도록 안락감에 취하게 했다.



영화가 끝난 뒤 평상복 차림의 젊은 감독이 박수를 받으며 객석으로 내려왔다. 관객의 질문이 이어졌다. 윤회사상을 알 리 없는 미국인들로서는 좀 난해하고 모호한 스토리여서인지 영화 형식보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각도에 집중됐다. 제자와의 동성애가 문제시되어 교사인 주인공이 학교를 그만두는 설정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거였다. 왜? 어째서 그 남자가 직장에서 밀려나야 하는 거냐고들 물었다. 한국인의 통념과 관습과 정서상 당연한 얘기가 서양인인 그들에겐 이상스레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와 너무도 다른 의식의 간극을 보여주는 그들이 새삼 낯설고도 멀게 느껴졌다.



동성애자. 아직도 우리에겐 외설스럽고 불경스러워 어쩐지 신성모독 비슷한 기분이 들며 입에 올리기조차 금기시되는 단어다. 떳떳지 못함은 물론 결코 권장할 일이 못되지만 그러나 점차 동성애도 아름다운 또 하나의 사랑으로 파악되는 추세이다. 사랑의 다양성 중의 한 갈래라고는 하나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이 보는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으로도 함묵적으로 혐오감, 비정상, 부도덕, 불결감, 변태성욕자, 성도착증 등의 정신적 결함으로까지 몰고들 간다. 근자 들어 많이 보편화됐다 하나, 동성애자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에이즈라는 병의 만연은 얼마나 그 기류를 꺾을 수 있을지.



동성애의 역사는 의외로 아득한 옛적부터다. 동성애를 뜻하는 레즈비언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 계관시인 사포의 고향으로 거슬러 오른다. 여러 소녀들을 거느리고 산천을 소요하며 사랑의 시를 읊은 사포는 동성애자의 원조 격으로 그녀의 고향 이름인 '레스보스 섬의 여자들'이란 뜻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실제에 있어 사포는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로부터 실연당해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여류시인이니, 오히려 그녀를 흠앙한 많은 소녀들을 중심으로 동성애가 발생되지 않았나 싶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동성애가 죄악시되기는커녕 인구 증가를 막고 결혼제도를 보완하는 바람직스러운 방편으로 유행하였다고 한다. 중국 야사에는 궁중에서 미소년을 가까이 두고 그의 기를 탐하는 문란한 왕 이야기며 호모섹스를 즐기는 환관의 작태가 심심찮게 그려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종의 계비가 동성애로 파란을 일으킨 바도 있으며 신라의 원화제도가 화랑으로 바뀐 이유의 하나가 동성애였다는 보고다. 동성애자가 된서리를 맞기는 히틀러 시대, 집시와 유태인 그리고 동성애는 나치의 표적감이었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타락한 부르즈아로 매도되며 돌림을 당했다.



동성애자는 스스로 자신이 원해서 동성애자가 되는 건 아닐 터이다. 맥그리비 주지사도 어릴 적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왔노라고 말했다. 그렇듯 동성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은 대체로 호르몬의 부조화나 불균형에서 비롯되고 남성적인 강건한 어머니를 둔 경우에 자주 발생한다고 보고된다. 또는 유아시절의 환경적 요인에 의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으며 고정된 성역할에 자신이 없거나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도 한다. 그러나 남성 속의 여성성, 여성 속의 남성성은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것.



동성끼리 우정 이상의 관계에 이르게 되는 요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성애자가 아닌 다음엔 이해될 수 없는 사항일 터. 자연의 섭리대로, 음양이 조화 이룬 이성을 사랑하지 못하는 동성애자의 비극, 꼭히 비극이랄 수도 없을지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사랑이란 이성끼리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며 부당한 편견에 반기를 들는지 모를 일.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있어도 멀쩡한 외관을 지닌 채 동성끼리 팔짱을 끼고 다니면 눈살을 찌푸린다. 샌프란시스코 한 마을은 아예 게이들이 모여 산다. 그 동네

집집마다에 내걸린 무지개 깃발은 이제 구경거리도 아닌 세월이다. 그래도 무지개 허리띠를 두르고 다닌다면 교회 출입이 제한되며 보통사람들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게 된다.



왜 그들은 동성을 사랑할까. 그것은 어쩌면 일반인이 왜 그 남자를? 왜 그 여자를 사랑하는가와 마찬가지 질문이 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지옥과 행복의 정점인 천국을 두루 오가는 사랑의 감정은 그것이 이성간이든 동성 간이든 마찬가지라 하니까. 결국 어떤 성의 형태를 선택할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어쩔 도리 없는 태생적 숙명이 아닐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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