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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3. 2024

뉘라서 들꽃 한 잎 피어나게 하리

뉴스 화면은 연신 산더미만 한 눈을 밀고 가는 제설차량에 맞춰지고 있다. 이어서 엄청난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 만 가옥이 비친다. 이번 폭설로 무너진 집이 여러 채라고 한다. 다음에 나오는 화면은 필라델피아 공항이다. 공항 구내 한켠, 여행 가방을 베개 삼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젊은 여행객이 앵글에 담긴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결항되자 오도 가도 못하고 한 데서 새우잠을 청한 그. 날씨 탓, 천재지변이니 어쩔 도리 없는 노릇이다. 눈 때문에 꼼짝없이 갇힌 것은 그 여행객만이 아니다. 차바퀴는 물론 차창까지 반 넘어 파묻힐 만큼 수북 쌓인 눈으로 요지부동 발 묶인 자동차. 차를 움직일 수 없으니 모든 일상이 전면 정지돼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원 공급이 끊기지 않은 것이랄까.



주말에 폭설이 내린대. 16인치 정도 온다나 봐. 미리미리 쇼핑들을 해두느라 도로 정체가 퍽 심해. 가게에 들르는 사람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였다. 대설주의보를 전하는 이웃들 전화도 바리바리 왔다. 처음 맞는 비상사태인 만치 충분한 먹거리를 준비해둬야 한다는 조언들이었다. 이곳 기상예보는 빗나가는 적이 거의 없다. 과연 예보대로 정확히 토요일 오전부터 눈은 퍼붓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 겨울 폭풍까지 동반한 눈발이 거칠게 날렸다. 월요일이 되어도 눈은 멎을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점령군처럼 온 천지를 장악한 백색 괴물, 한 앵커의 표현대로다. 이미 눈은 낭만 어린 정취를 자아내는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가공스러운 존재였다.



뉴저지를 비롯하여 뉴욕과 워싱턴 등 미 동부를 고립시킨 엄청난 눈. 한 치 앞도 구분 안 되게 고래질 치는 눈이 시계(視界)를 완전히 가리는 데다, 치우고 또 치워도 소용없는 활주로의 눈으로 인해 볼티모어 공항이며 케네디 공항조차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을 금지시켰다. 최첨단 기술의 결집체인 비행기마저 제구실을 못 하게 만든 어마무지한 눈이다. 삼십 년 만의 대설이라고도 하고 팔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도 했다. 아마겟돈 대신 스노겟돈이라는 신조어를 갖다 붙이기도 하였다. 눈에 파묻혀 세상이 멈춰 선 듯 고요하니 낯설고도 놀라운 풍경은 차라리 아득함이었다. 산간 오지 적소(謫所) 같은 단절감. 사막 한가운데 고립된 것도 같고 망망대해 외딴섬에 속수무책으로 갇힌 기분이 들었다.



가본 적 없는 북구나 시베리아의 설경도 이리 막막할까. 안타까운 사랑이 깔려서인지 닥터 지바고의 영상 속 정경은 가슴 아릿하도록 아름다웠다. 깊은 눈 속에 그대로 함께 전설로 묻혀도 좋은 연인들이 있어서였던가. 같은 눈세계이건만 현실로 접한 느낌은 그것과는 영 달라 오히려 두려움이 앞섰다. 움직이는 몸짓이며 두런거림 같은 외부인들의 자취가 그새 아쉬워지기도 했다. 하다못해 그 흔하던 다람쥐일지라도 살아있는 생명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막막감은 덜할 것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공황상태였다. 마치 갱도 깊숙이 매몰된 채로 잊혀 가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소리라도 크게 지르고 싶었다. 끝장난 지구 뒤편에 어쩌다 홀로 남겨진 듯싶은 공포심마저 일었다.



한 주가 시작되는 활기찬 월요일이건만 사위는 바다 밑처럼 적요히 가라앉아 있다. 정지된 세상, 모든 게 박제품이 된 듯 그야말로 괴괴한 정적만이 감돈다. 사람들의 일상이 빚는 번다한 소음에 익숙해 있던 청각이라서인지 절대고요가 주는 생경감은 심신을 잔뜩 긴장하게 만든다. 해서 유리창에 부딪는 눈발 소리마저 관솔 불꽃 튀는 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눈에도 무게가 있구나, 고개를 끄덕대면서 문고판을 꺼내 들었다. 미국 생활에서 갖기 힘든 모처럼의 느긋한 휴식에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는데 환청인 양 새소리가 들려온다. 끼룩끼룩~둔탁하면서도 목쉰 듯 음울한 울음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 구스다. 기러기 떼처럼 시옷자 모형으로 대열을 지어 하늘을 나는 구스 무리를 만나면 구슬픈 울음소리 때문인지 괜히 심사가 처연해지곤 했더랬는데.



구스는 거위와 흡사한 몸집에 깃털 색이 청둥오리 비슷한 북미 산의 아주 큰 새다. 부들이 키대로 자란 늪지나 연못이 있는 공원이면 물가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새로 도통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는다. 갓 부화해 솜털에 싸인 아기 구스는 본능적으로 맨 처음 눈에 담은 사물을 어미로 여긴다고 한다. 그렇게 만나 뒤뚱거리며 따르던 한 소녀로부터 차츰 나르는 법을 익혀 드디어 비상에 성공, 다른 구스와 마찬가지로 머나먼 여로에 오르게 되던 감동적인 영화 <아름다운 비행>의 주연 역이었던 새. 워낙 둔중한 덩치라 하늘을 난다는 것이 언뜻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이나 그들은 먹이를 따라 광활한 북미 대륙을 잘도 날아서 이동한다.



이곳에서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사슴이며 구스가 그려진 도로 표지판과 종종 마주치게 된다. 근처 숲에 사슴이 살거나 구스 떼가 머무는 늪이 있으니, 운전 시 혹여 그들이 찻길에 나오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의 표시다. 철 모르는 아이처럼 유유히 도로를 횡단하는 동물들과 실제로 만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일단정지하고 그들이 지나가도록 기다려 준다. 경적을 울려 위협하거나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는 행위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거 전담 팀이 오기까지 도로상에 처참히 널브러져 있는 짐승의 주검을 목도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야생동물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이리라.



이 세상은 그들 모두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客) 일 리 없이 그저 허락된 시간 동안 잠깐씩 머물다 갈 뿐 아닌가. 만물을 지으신 분의 눈으로야 그 모두가 차별 없이 다 같이 존귀한 것, 애당초 잘나고 못남에 따른 등급을 매기지 않을뿐더러 우열의 순위도 없을 터. 아무튼 미국이란 나라에서 제일 부러운 게 바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의식의 선진화인가 삶의 질이 높아서인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의지는 물론, 무엇보다 환경보호라면 이 나라만큼 철두철미 신경 쓰는 데도 없을 것 같다. 원래 서양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 중심 사상. 반면 동양정신의 근저는 모든 자연계를 아우르는 생명 중시 사상이다. 하건만 당장의 제반 여건이 팍팍한 까닭에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가 보존에 앞서 개발을 우선시하다 보니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하.



그나저나 대체 비행기조차 뜨지 않는 이런 악천후에 하늘을 나는 새가 있다니. 신기함에 블라인드를 올리고 소리 나는 방향을 좇아 허공을 주시해 봐도, 멀어져 가는 새소리는 들리나 새의 자취는 잡히지 않는다. 창밖 가득 여전히 푸덕지게 흩날리는 눈발. 분명 구스는 어딘가를 향해 거친 눈보라 속을 주저하지 않고 날고 있으련만 분분한 눈발에 가려 새는커녕 천지 구분조차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망연히 응시하는 허공. 더러는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아도 때로는 그리며, 기루며 마냥 바라보기도 하는 우리이니까.



굴지의 국제공항마저 자연의 힘에 굴복하고 마는데 비해 신이 부여한 타고난 감각에 의존, 유유히 하늘을 나는 구스. 그 새는 험한 날씨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찾아 고래치는 눈 속을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혹여 두려움으로 망설이는 낙오병 하나 연못 어귀에 남아 있진 않을까 하는 우려는 괜한 것. 새들은 제 무리에서 뒤처짐 없이 앞장서고 뒤따르며 항상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뿐더러 작은 몸피로도 용케 대양을 건넌다. 험준한 산맥을 넘는다. 그러면서도 길을 잃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수많은 철새가 동시에 날아올라도 서로 부딪쳐 상하는 법이 없음은, 그들만의 월등한 신호체계나 질서가 있음이리라.



창조주는 이 세상 그 무엇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으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못지않게 생명체마다 공평하게 나름의 경이로운 감각을 하늘은 선물해 주셨다. 이를테면 고도로 정교한 시력 또는 예민한 후각이나 놀라운 청력으로 먹이를 찾는 동물도 있고 자기장을 이용하여 위치나 방향 및 거리를 파악하는 동물도 있다. 뛰어난 음파탐지력을 가진 돌고래는 그래서 기뢰 제거를 위한 전술용으로 동원되기도 하듯, 나름대로 뭇 생명 모두 특별하고 놀라운 능력을 부여받았다.



제아무리 인지가 뛰어나다 해도 우리 또한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일 따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의 힘으로 인공비를 내리게 하고 심지어 복제 양이 태어나기도 하는 세월이지만 그러나 뉘 있어 진정 들꽃 한 잎에겐들 그 생명을 불어넣겠는가.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경이로운 신의 섭리 앞에 절로 옷깃 여미게 된다. 나아가 인연이라 하고 운명이라 하는 그 모든 것이 섭리 안의 작용 아닌 것이 없음에 나이 들수록 겸허로이 무릎 꿇게 되는 자신을 본다.         

2001-미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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