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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1. 2024

경계 긋고 살았던 그들 역시 측은


영화 속 주인공에게나 있을 법한 백혈병으로 자성이가 세상을 떴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십에도 이르지 못한 한창나이에 눈을 감았다는 게 인간적으로 안 됐을 뿐 별다른 소회는 일지 않았다.  

크리스천은 아니나 성야인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났다고 항렬에다 '성'자를 붙여 이름이 자성이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피부가 하얘 머스마라도 꼭 가시나 같았던 아이. 성격까지도 남아답게 활달하다기보다 아주 내성적이어서 더 여자애 같았다.

엄마 살아생전엔 내 엄마의 아들로 호적에 올랐던 만치 법적으로는 분명 동생이 맞다.
아버지 막내아들이니 내 동생이겠으나 애당초 동기간이라고 인정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사실조차 싹 묵살하고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형제가 몇이냐고 물으면 늘 자매뿐이라고 말했지, 그 애들을 동생으로 취급하고 셈해 본 적은 꿈에도 없었다. 편협하고 완고한 데다 차디차기 이를 데 없는 대쪽 같은 성정인 나였다. 경계해야 할 것은 임의대로 경계(선)를 긋고 '너'를 정상치의 선 밖으로 내 몬 나의 교만. 그 점 사순절 마무리 날인 오늘, 나를 부끄럽게 한다. 가톨릭에 귀의하며 비로소 용서란 단어가 심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니 앙금 진 감정도 다 해결된 줄 알았다.


그 세월만 해도 살만한 남정네들은 오입질 정도가 아니라 버젓이 첩실을 들어앉히던 얄궂은 세월이었다. 아버지를 소실 집에 빼앗기고 살았던 언니와 나였으니 걔들은 우리보다 경제적 환경적으로 더 윤택하게 지냈으리라 여겼다. 그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인한 미움도 있었을 테고 아무튼 은연중에 그 애들과 거리를 두었고 거의 투명 인간같이 취급했다.

실재하나 마음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괄호 밖의 용납될 수 없는 아이들로, 있으나 마나 한 무의미 그 자체였다. 야멸차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성정이 그리 모질지 않음에도 그 애들에 대한 감정은 정확히 그랬다. 그 애가 성장한 다음엔 아버지 장례 시에 언뜻 본 것이 전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원망과 분노도 함께 묻혔다. 자성이네와의  관계 역시 아득히 멀어졌으며 무상심해졌다. 당연히 그 후 그렇게 그 애들도 잊힌 이름이 되어갔다. 왕래도 전혀 없었고 남남으로 살며 기억에서 잊혔던 사람들이다. 헌데, 갑작스러운 그 애의 죽음으로 과거사가 돌연 되살아나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나보다 마음결이 여린 언니건만, 처음 자성이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땐 장지에 갈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한다. 소식을 들은 후 삼 일간, 그 일이 자꾸 가시처럼 목에 걸릴 적마다 의식적으로 밀쳐냈으나 잘되지 않더라고 했다. 마음이 영 편치 않아 우선은 자기 맘 편안케하려고 마지막 가는 길 배웅하기로 했다는 언니.


아들과 자성이는 불과 나이 두 살 차이다. 대구로 내려가 잠시 살았으나  아들이 어릴 적, 한동안 충청도로 돌아와 교직에 재취업해 있었으니 그 동안 아들은 외할머니가 키우다시피 했다. 그때 동갑내기인 이종사촌과 자성이가 외갓집에서 한데 얼려 놀곤 했는데 아들은 "자성이 형~형~"하며 따랐다. 말도 안 되는 호칭을 도 바로잡아주거나 뭐라 하는 사람 없이 그냥 지켜보며 우린  쓴웃음이나 지었다.

그 애가 워낙 조용하고 순하니까 꼬맹이들도 만만한 동내형처럼 같이 쉽게 어울려 놀았다.
말싸움할 적엔 말 노릇을 시키고 숨바꼭질하며 놀 적엔 술래를 시켜도 고분고분 응해줬다. 언덕 위의 우리 집과 그 애네 집은 십여 분 거리에 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그 애는 큰엄마 집으로 달려와 놀곤 했다.

아버지가 날마다 집에 오는 이유는 온실의 화초들 거름도 주고 전지도 하는 등의 관리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 역시 자성이가 그런 대우를 받으며 어울려도 야단을 치거나 뭐라 하진 않았다. 하긴 유별스레 촌수 바로잡아 줄 입장이 아니라서 그냥 봐넘겼던 지도.

60년대 초부터 우리 집 앞마당에는 구공탄 난로를 피워 난방을 하는 유리로 지은 커다란 온실이 있었다. 군내에서도 유일한 온실이었다. 아버지가 대전이나 서울에 다녀올 적마다 사다 모은 진기한 화분이 온실 안에 즐비했던 우리 집. 학교 행사 때는 우리 화분을 빌려 가 단상 좌우를 장식하곤 했는데, 그래서 꽃 가게는 아니지만 근동에서 꽃집으로 불렸다.

몬스테라, 히비스커스, 테라리움, 군자란, 아스파라거스, 고무나무, 종려나무, 소철, 동양란 등 갖가지 특별나고 멋진 화목들이 가득 찬 온실. 그곳은 항상 따뜻하면서도 배양토 내음과 이끼들로 공기는 습습했다.   

세 끼니 곯지 않고 밥 먹고 살기만도 급급하던 당시, 이웃사람들이 엄마에게 그랬다. 남편이 내심 미안하니까 자기 대신 고운 화초 보며 시름 달래라는 뜻인가 보다고...꿈보다 해몽은 그럴싸, 화분에 줄 물 길어 나르느라  시름 대신 힘든 노역은 더 보태졌음에도.


천상 한량인 아버지는 한평생 나무와 밀접한 인연 속에서 살았다. 생의 전반기는 산판에서 벌목, 후반기 이르러서는 산에다 밤나무와 호두나무 식재를 했다. 자유당 시절 정치 바람 탄 아버지는 벌채 허가를 쉽게 따냈다.
그 연결로 자연스럽게 목재상을 하며 여유자금이 생기면 민둥산을 사서 융자받아 밤나무 단지를 대규모로 조성했다. 자성이는 목재소에 딸린 집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다. 60년대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70년대 초반 결혼하며 고향을 등졌다가 다시 돌아와 이태를 교직생활하다 떠난 이후론 가지 않은 고향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는 당진에 갈 일이 거의 없었던 셈이다. 그때 이미 엄마는 언니 근무처를 따라서 대전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으므로.

볕 좋은 삼월 봄날, 장례를 마친 다음 선산에서 자성이 친누이인 자연이가 언니에게 넋두리를 하더란다. 몇 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이젠 남매 모두 성혼시켰다는 오십 대 그녀는 인생의 떫고 신맛을 고루 겪은 터였다.

"언니, 항상 나는 두 언니가 너무나 부러웠어. 그래도 큰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언니들 대학 보내 당당한 사회인을 만들었잖아. 큰엄마가 우리 친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했어. 철들자 첩의 자식이란 멍에를 쓰고 살면서 뒤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질하고 수군대는 거 같아 늘 주눅 든 채 살았어. 언니는 그 기분 상상도 못 할 거야. 보이지 않는 경멸의 시선만큼 괴로운 게 없어. 언니, 우리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직접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우린 언니와는 다르지만 또 다른 피해자였어."

목이 메 울먹거리더니 종당엔 통곡하더라는 자연이 말을 전해 듣고 보니 딴은 맞는 말이었다. 그 애들만이 아니라, 떳떳지 못한 신분으로 비루하게 살며 음지에서 늙어가는 그들 생모까지 모두 가여운 존재다 싶은 게 측은해졌다.

예전에도 그랬고 여전히 그랬었다. 그 애들을 죽어라 미워하거나 저주한 적은 없으나 우리와 다른 부류로 취급하고 차별 둔 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하고 냉대했다.

말 없는 그 질타가 더 큰 압박이고 아픔이고 치명적인 상처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사 들었다. 옳게 인간 대접 못 받고 사람 취급 제대로 받지 못할 때만큼 참담한 기분도 없으련만....

사람들은 저마다 제 고통의 무게에 치여 허우적거리느라 타인의 고통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상대방의 고뇌 같은 건 헤아려 이해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다 오만까지 해서 자신만은 아무런 흠결 없이 깨끗하고 고결한 의인인 양 행세했다.

하지만, 과연 하늘 우러러 한 점 걸림 없이 떳떳한 자 있을까. 오히려 죄를 짓고도 제 눈의 들보로 인해 자기의 죄성을 못 느끼는 우리가 아니던가. 게다가 언제라도, 누구라도, 인간적 욕망으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에도 자신만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는 오만이라니.

또한 누가 누구에게도 추하고 역겹다 제쳐놓을 자격을 준 바 없으며, 누구도 누군가를 죄인이라 정죄할 역할을 맡긴 바 없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어찌 처단할 것인가를 예수께 묻는다. 그러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했다.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하였다.

왜 나이 많은 이들이 먼저  자리를 떠났을까?
그 물음이 죽비 되어 등짝을 내리친다. 갓 태어난 아기의 순수무구함도 세파에 부대끼다 보면 결국엔 변형되고 탈색되듯 우리도 겹겹의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때를 타게 된다. 그만큼 세상 죄악에 노출이 많이 될수록 너나없이 죄성이 두터워지게 마련 아닐지.

이제는 낮게 고개를 숙여야 할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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