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r 11. 2024

지지리 복도 없는


기천이, 의령 남 씨에 터 기(基) 하늘 천(天) 자인 남기천은 대단한 작명가가 지은 이름도 같고 급한 대로 막 지은 이름도 같다. 기천이는 외삼촌 아들로 사촌지간이나 한번도 외사촌이라 여겨본 적이 없는, 이를테면 눈칫밥만 먹고 자란 천덕꾸러기 아이였다. 당시야 추호도 불쌍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그저 밉기만 하던 구박덩이 아이.

지금은 아마 오십 줄 후반에 들었을 텐데 그 애 어렸을 때 보고 이후로는 도통 만난 적이 없다. 네댓 살짜리 얼굴이건만 누굴 닮았는지 아이다운 천진함이나 귀염성은 찾을 수 없이 지지리 궁상인 인상을 가진 아이. 살성도 거무스레한데다 코가 유난히 낮아 전형적인 '천상'이라고 타박했던 아이. 하는 짓마다 무조건 밉살스럽고 꼴도 보기 싫었다.

뜬금없이 그 애가 생각난 건, 며칠 전 무척 아파 누워있을 때였다. 항상 활기차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작스레 심한 다리 통증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만 잡념 중에는, 무단이 닥친 이 고통은 어쩌면 그간 알게 모르게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지은 죄에 따른 벌이 아닐까 하는, 마치 옛날 고릿적 촌노 같은 발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기천이,  아무 철없는 어린 기천이에게 끄떡하면 마구 소리도 쳐댔고 괜히 미워서 야단치기 일쑤였으니까. 요즘에 그랬다간 아동 학대에 해당돼 당장 걸리겠지만 당시야 제 자식도 예사로 매 타작에 화나는 대로 함부로 혼찌검을 내던 시절이었다.

외삼촌 집은 색색 고운 비단실로 수 놓인 내 유년기 추억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어릴 적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외삼촌네는 우리집에서 삼십 리 떨어진 대호지라는 농촌이자 산촌이고 어촌인 시골이었다. 외숙모 등에 업혀 홍역을 치렀을 정도로 어릴적부터 난 외삼촌 댁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버지보다 더 따순 정을 쏟았던 외삼촌, 밥을 푸며 중간에 계란을 톡 깨서 넣어주거나 잠들 때까지 횟배를 쓸어준 외숙모는 엄마만큼이나 살가웠다.

사진 속의 외삼촌은 동그란 안경에 망토를 걸친 동경 유학생이었고, 외숙모는 굽실거리는 파마머리에 검정 구두를 신고 양산을 쓴 하이칼라 신여성이었다. 해방 즈음부터 인천에서 미두장을 운영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좌우 대립의 극심한 혼란기에 재산을 정리하고 낙향한 외삼촌. 고향인 대호지에서 그 후 외삼촌은 규모 반듯한 방앗간을 차렸다.

근동 통틀어 광석 라디오가 있던 집도, 우체부가 배달해 주는 신문을 구독하는 집도 외삼촌네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병이 나면 구급약을 구하러 오는 집도 외삼촌네였다. 급하면 달려와 만병통치약 같던 다이아찡을 얻어갔고 삐거나 다치면 멘소래담을, 피가 나면 광목쪼가리로 동여맨 채 아까징끼를 바르러 쫓아왔으니 간이 보건소 역할도 했다.  

재넘어 쑥박골 성깨 선녀골에서 아녀자들이 찾아와 군대 간 아들한테서 온 편지를 외숙모에게 내밀기 일쑤였다. 편지를 외숙모 앞에 펴놓으면 기꺼이 대독은 물론 편지 대필 주는 일을 도맡아 하던 외숙모. 붓글씨까지는 아니고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세로줄로 줄줄이 사연을 적어 내릴 때의 외숙모 달필은 마주 앉은 사람들을 아주 작아지게 만들곤 하였다.

외숙과 외숙모 두 분은 동네에서도 인심 얻고 사는 후덕한 부부였다. 외숙부는 온화한 성품이었고 외숙모는 서울내기답게 상냥스러웠다. 양주분은  평소 서로 깍듯했으며 경제적으로도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결정적인 한 가지,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배태조차 못한 외숙모는 그래서인지 외삼촌도 피우지 않는 담배를 태우며 말 못 할 시름을 하염없는 연기로 토해내곤 했었다.

외삼촌은 기계 부속이 필요하거나 발동기가 고장 나면 인천에 가야 했다. 또는 석유를 사려면 똑딱선을 타고 대처인 인천 출입을 해야 했다. 양복 입은 외삼촌은 서재필 박사를 연상시키는 점잖은 외모에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 소문난 애처가답게 인천 다녀올 적마다 내 선물은 물론이거니와 외숙모를 위해 새로 나온 옷감 같은 걸 사 왔다.

일 년에 몇 차례 그렇게 인천 내왕이 잦을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후 외삼촌은 기어이 인천에서 딸을 하나 만들어 왔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려던 무렵, 당진 본가로 돌아가기 직전의 일이다. 얼마간의 재산을 아이 친모에게 떼어주기로 하고 데려온 갓난아기를 외숙모는 미음과 암죽을 먹여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때부터 외삼촌 집은 기옥이네 집으로 불렸다. 그 이전까지는 당연히 내 이름이 들어간 OO네 집으로 통했었는데. 내 자리를 빼앗긴 듯 시샘이 날만도 한데 당연하다 여겼던가. 조금도 서운치 않았던 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어린 소견치고는 희한스럴 정도다. 방학마다 내달려가 외사촌 동생의 숙제를 정성들여 도와주면서 우린 친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외삼촌을 빼닮아 살색이 뽀야니 이쁘게 자라는 딸아이를 가운데 두고 부부는 한동안 행복과 화락을 누렸다. 근동에 하나뿐인 방앗간은 더욱 번성해 정미소로 칭해졌다. 당시 볏가마 보릿가마를 정미소로 실어 나르려면 소달구지가 이용됐다. 좁다란 시골길에 트럭이야 언감생심이고 경운기조차 나오기 훨씬 전이었으니까.

정미소가 증축되며 모든 허드렛일을 맡아하던 행랑채 문호오빠 외에 윗마을에서 한 사람 더, 일 거들 마차꾼을 쓰게 되었다. 애들이 여럿 딸려있다는 덩치 자그만 마차꾼 사내는 눈이 유난히 반들거리는 게 어딘가 간살스럽게 생겼었다. 정미소에 이런저런 핑계로 마차꾼 아낙이 자주 들락거렸다. 젊은 여자는 입술연지를 빨갛게 '쥐 잡아먹은 듯이' 바르고 나타나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간들거리고 해죽거리며 여자가 정미소 앞에서 오락가락하더니 드디어 사단이 터졌다. 우리가 사는 당진 읍내는 무서웠던지 서산에 가서 턱하니 아들을 낳아가지고는 뻔뻔스럽게도 기세등등 외숙모 앞에 아이를 내밀었다. 갓난이를 외숙모는 말없이 거뒀다. 허나 그때부터 평화롭던 집안은 수시로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수군거리는 마을 인심에 차츰 외삼촌 성격도 이상하게 변해가며 집안은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급기야 방앗간도 거덜 나고 그야말로 문전옥답 땅마지기 마저도 야금야금 날아갔다. 그렇게 한 집안이 시나브로 무너져 내렸고 결국 풍비박산이 났다. 야비하고 비열한 서방과 공모한 가증스런 꽃뱀에게 휘감겨 망쪼가 들어도 추하게 든 것이다. 그 와중, 외숙모는 화병으로 돌연 한 서린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외삼촌은 가로 늦게 고생길에 들어서 측량기사 일을 하며 전국을 떠돌다가 객사로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외삼촌이 정해진 거처 없이 지낼 적에, 오갈 데 없어진 기천이가 고모집이라고 우리집에 얹혀 지냈다. 막상 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안 그래도 친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돌던 밉상덩어리 기천이 꼴을 더 이상 참아낼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정미소집 큰 재산을 날로 다 회쳐먹은 마차 꾼에는 인천으로 이사가 탄탄한 살림 산다는 소문을 들었던 차다. 지 에미한테로 연락했더니 갑론을박 끝에 결국은 아이를 데려갔다. 그때 기천이 나이 여섯 살이었다.


살면서 미워한 사람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나어린 아이를 그처럼 모질게 미워했다니.... 인천 어미집으로 들어가서인들 배다른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눈칫밥이나 먹으며 냉대 속에 살았을 가여운 아이. 지 에미가 지은 죄 때문에 오나가나 죄 없는 아이가 시련을 겪었던 셈이다. 하여튼 외숙모의 맘고생을 생각하면 진저리 쳐지는 그들 모자로 지금도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외삼촌은 제삿날 냉수 한 그릇 떠올릴 재목도 못 되는 아들 하나 두려다 너무 많은 걸 댓가로 치른 셈.


하늘에 머리 두고 살며 인간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한 에미 대신 기천이가 죄를 뭉뚱그려 다 뒤집어쓴 것인가. 기천이는 겨우겨우 고등학교만 마쳤다고 했다. 결국 직장생활도 어려운 데다 운도 안 따라줘 손대는 일마다 신통치가 않았다고. 그런 형편이라 결혼을 못한 상태로 여전히 주눅 든 생을 마지못해 사는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지리 복도 없는 참 가엷은 인간이다. 에미 잘못 만나  인생 자체가 배배 꼬인 채 내내 기죽어 살며 좋은 시절도 없이 시들고 말다니.


다시 볼 일이야 있겠나 싶지만, 아프면서 기천이가 떠올랐을 적에 비로소 그 애한테 잘못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 야멸차게 굴었던 게 자꾸만 걸렸다. 기천이에게 미안하다, 라며 손 부여잡고 사과하고 싶은.... 그냥 그랬다. 이젠 길에서 만난다 해도 알아보기 어려울 테지만.   


​​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나 혼자만이 그대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