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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1. 2024

나 혼자만이 그대를

소설은 픽션이라고 한다. 그러나 완벽히 허구로 꾸며진 창작물이 얼마나 될까.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된 소설도 있긴 하겠다.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 모티브 또는 영감을 얻어서 그걸 줄거리로 쓰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부터 소설 속의 이야기보다 더 극적일 수 있는, 유행가 가사대로 소설 같은 인생사를 한자락씩 펼쳐보려 한다. 직접 보거나 듣거나 겪어본 픽션 같은 논픽션들이다.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 풀어놓으면 소설 몇 권 분량은 된다고들 한다. 대동아전쟁부터 육이오를 거친 험한 세대가 아니라도 각기 굴곡진 시간을 살아낸 까닭이다. 이만큼만 살아봐도 안다. 세상 그 누구도 충족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주어진 내 인생과 바꿔 살고 싶을 만치 부러운 삶을 사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삼십 대 초였다. 사십 후반의 시이모는 내 주변에서 보아 온 여러 사람 중에 오직 한 분, 선망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두루 좋은 건과 환경을 갖춘 장군 부인으로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의 표본처럼 사셨다. 그만큼 모범적인 가정의 안주인이었다.


그분은 당시로는 드물게 키가 후리후리하니 크고 늘씬한 데다 매우 세련된 지성인이었다. 경북대 사대를 나와 교직생활을 하다가 늠름한 육군 장교를 만나 연애결혼을 한, 그 시절에서는 특별히 앞선 여성이기도 했다. 결혼 피로연에서 이모부가 불렀다는 '나 하나의 사랑'은 전설처럼 오래 회자되었기에 지금도 그 멜로디는 낯설지가 않다. 노래 가사대로 오직 그대만을~ 바라보겠노라는 첫 마음 내도록 간직한 남편의 사랑 듬뿍 받으며 사는 행복스러운 아내가 이모였다.


해운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양지에 갖가지 수목이 잘 가꿔진 너른 정원. 봄철 매화에서부터 연산홍, 목련, 라일락  비파꽃, 태산목 우아한 꽃이 각 계절마다  피고졌다. 정원 한켠엔 돌다리가 놓인 커다란 연못이 있어 수련과 잉어가 보기 좋게 어우러졌다. 멀리서도 눈에 들던 견고한 석성같이 근사한 이층집이 이모집이었다.


인물 좋고 총명한 두 아들을 두고 윤택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부러운 건 지극한 부부애였다. 항시 서로 깍듯이 존칭어를 쓰는 만치 일상에서도 매사 예를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잉꼬부부 사이라 너무도 존경스럽기만 하였다. 알뜰하고 교양 있는 어머니에 오랜 군 생활로 절도 있는 생활습관이 몸에 밴 부친 슬하의 반듯한 가정교육으로 자녀들도 훌륭하게 자라 큰아들은 법대로 동생은 의대로 진학했다.

이모부는 오십 초에 준장으로 예편을 했다. 당시는 군부대가 주둔했던 산골짝인 현 해운대 신시가지 요지를 비롯해 그동안 장만해 둔 부동산이 제법 많아 곧바로 아파트 신축사업에 투신했다. 올림픽을 치르고 한창 경기가 좋던 시절이라 아파트는 기초공사만 시작해도 벌써 청약이 끝나곤 했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 그대로였다. 이모집은 점점 근동의 손꼽히는 거부가 되어갔다. 그렇다 해서 이모가 큰손으로 씀씀이가 헤프거나 흥청망청 사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재산가라 해도 항상 검소하게 사셨다.


충분한 경제력 다음에 따르는 남자들의 명예욕. 정석대로 정치권에 줄을 대 고향에서 국회의원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수억 대의 돈만 날렸다. 오래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하는 등 대외적인 봉사활동은 많이 했으나 인척들에게는 퍽 인색한 편으로 인맥관리를 잘못해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던 게 패인의 하나였다.


이모부 환갑이 되었다. 해외로 골프여행을 자주 다니긴 했지만 환갑 역시 여행으로 대체하겠다며 동유럽을 다녀온다 했다. 통상 부부동반이 당연한 일이건만 혼자 나선 여행길이었다. 사업하는 측근들과 동행한다는 말에 여행 가방을 찬찬히 챙겨드리며 이모는 잘 다녀오시라 다소곳 인사했다.


진갑 다음 해 봄 이모부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되어 중환자실에 눕게 됐다. 아침식사 후 여늬때처럼 차를 몰고 사무실로 출근한 뒤였는데, 병원에 실려가기 전 사고를 당한 장소는 의외로 고급 아파트 어느 여염집이었다. 급히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쫓아간 이모는 그땐 아무 경황도 없어 전후 사정을 헤아려 볼 겨를도 없었다. 즉각 뇌 수술을 받았으나 식물인간 상태로 4개월을 병원에서 지내다 이모부는 마침내 눈을 감으셨다. 말 한마디 못 남긴 채로...


그 몇 달 동안에 의문의 행적들이 하나씩 밝혀졌다. 아파트 단지에 주차된 승용차를 찾으러 파킹장에 갔을 때 이미 야릇한 말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를 안 쓰는 이유도 거기 있었지 싶다. 퍼즐 맞추듯 아귀가 맞아떨어지며 차츰 드러나는 전모들. 세상에 감쪽같은 비밀은 없었다. 이모부의 이중생활에 관한 증언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하기사 전부터 그런 말들을 이모에게 해줬다는데도 듣는 당사자가 일언지하에 묵살해 버리는 데야 말을 하나마나. 이모는 이모부가 서쪽에서 해가 뜬다, 팥으로 메주 쑨다 해도 무조건 믿을 정도로 전적인 신뢰를 보냈는데 철저히도 배신을 때렸으니. 결국 죄는 지은 대로 가게 마련 아니던가.

잖은 이모부의 가려졌던 이중생활이 하나 하나 백일하에 드러났다. 시작은 이러했다. 사십에 남편을 암으로 여윈 한 여자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 보험 외판원을 했다고 한다. 이모부가 아파트를 짓던 분양사무실에 들러 보험을 권유하러 왔던 것이 인연의 시초. 그로부터 내연관계를 맺은 지 이미 십 년도 넘었다고. 그녀 몫으로 이전시킨 재산만도 물경 삼십억이었는데 그보다 더 이모를 분노케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해외여행 시마다 동반했던 그녀였다는 말에 이모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환갑 여행때도 그 여자와 함께였다. 그녀 아들이 결혼할 적엔 이모부가 혼주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는 소리를 듣자 이모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에도 병원에서 직접 그녀를 만난 면전일지라도 상스런 욕은커녕 '년'이란 비속어 한번 쓴 적 없는 이모였다. 독하도록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오기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어 점점 기운 잃어가던 어느 날. 이모답지 않게 자존심조차 다 접어버린 듯 내게 그 집을 한번 찾아가 봐 달라고 부탁했다. 소문대로 정말 그 여자와 살림차리고 사는지 확인해봐야 겠다고 했다. 마침 신문사에 근무하던 때였으므로 기자증으로 그곳을 찾아갔다.


입구 관리실 아저씨는 아파트 호수를 대자 아예 그 집을 윤 장군 댁이라 불렀다. 이모부가 늘 친구 부인이라 칭했다던 그녀를 만나본 나는 상상 밖의 상황에 그만 어이가 없었다. 교양 있는 귀부인인 이모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펑퍼짐하게 퍼진 예사 아줌마였으니. 어쩌면 그 무한정의 편안함에 끌렸던가. 그녀는 처음 본 나를 잘 아는 듯 조카며느리 칭찬하시는 거 많이 들었어요, 담담히 그랬다. 기가 막혔다. 그 순간, 오래 지녀왔던 이모부에 대한 환상이 거짓된 허상으로 드러나며 존경심이 싹 가셔 버렸다.


하늘의 수는 정말 묘했다. 하필이면 그 집에서랴. 부끄럽고도 허망히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거짓된 이면사. 비극적이고 추한 이따위 종말 설정이야말로 정녕 아이러니 아닌가. 변명이나 이해 한번 구해보지 못하고, 참회는커녕 용서 한번 빌어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재 뒤집어쓰듯 고스란히 덮어쓴 채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야 하는 형벌.


무섭다. 누구라도 한 세상 살면서 남 가슴 아프게 하거나 억울하게 하는 짓만 은 하지 말고 살아야겠지 싶다. 그날 그 일만 없었다면 이모는 평생을 남부럽잖게 살았으련만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버린 행복. 이모에게 그 많던 재산이 무슨 소용이며 그 무엇이 기쁨이 되고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었으리라. 이모부가 쓰러진 순간 이모의 삶도 같이 무너져버렸을 테니까.


이모는 그 일을 겪고도 십오 년을 더 버티셨다. 원래 용의주도하고 차분한 성품이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후 재산상속문제 등속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겉보기에 이모의 일상은 평온스러웠다.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며 증오감 불태울 것 같은데 드러내놓고 나쁜 말을 한 적도 없고 별로 미워하는 거 같지도 않았다. 당연히 제사도 극진히 모셨다. 정녕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모도 사람이다. 우리가 미국으로 떠난다 하자 너희마저 가고 나면 적적해 어쩌냐며 눈물 보이시던 분. 국제전화를 하면 전화를 끊지 않으려 하시더니 두 아들 성혼시키고 홀로 지내다 칠십 중반 목욕탕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고관절을 상한 후유증으로 결국 세상을 뜨셨다. 차라리 끝까지 비밀로 묻어두고 가지, 마지막 이별 장소인 현충원에서 흙을 떠 얹으며 원망하듯 흘리던 한 서린 이모의 푸념. 끝끝내 입술을 꼭 다문 채 흐느낌도 곡소리도 내보이지 않더니 맺히고 맺힌 그 한마디 남기고 돌아서던 이모의 하얀 옷자락에 '나 혼자만이~'선율이 쓸쓸히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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