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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9. 2024

푸르고 푸른 잔디

히스로 공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시계를 뒤로 돌리는 일이었소.


덤으로 얻은 여덟 시간, 어쨌거나 생광스러웠소.


여행 중의 시간이야말로 밥 먹는 잠시도 아까울 지경인데 여덟 시간의 보너스라니 흐뭇하지 않을 수 있겠소.


더구나 일본 혹은 동남아도 아닌 머나먼 땅 유럽이 아니오.


그것도 단 혼자 떠난 첫 해외여행인 배낭여행, 설렘으로 첫날은 두서없이 거리를 마냥 쏘다녔다오. 발바닥에서 불이 날 때까지.




새벽, 켄싱턴 가든은 안개에 젖어 있었소.

아스름한 윤곽만으로 떠오르는 길을 따라 몽환 속을 거닐 듯 천천히 호수 쪽으로 접어들었다오.

부드러운 안개의 애무에 혼곤히 취해 버린 거목들이 드러낸 밑둥치에는 푸른 이끼 가득했소.

그 아래, 안개 무게조차 겨운 양 여린 꽃잎의 달맞이꽃은 다소곳 고개 숙이고 있었소.

가벼운 차림으로 조깅하는 젊은이며 개와 더불어 산책에 나선 노인의 모습이 깊은 안개 사이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는 하더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오.



미미한 햇살 기운에도 안개는 스러지기 시작했으며 뭇 새소리가 이슬방울처럼 맑게 들려왔소.

오동나무, 보리수나무 무성한 잎새가 자태를 드러냈다오.

잘 다듬어진 푸르른 잔디밭, 조각을 품은 분수대의 우아한 물줄기, 조화롭게 가꾼 색색의 꽃들이 저마다 선명한 얼굴로 다가섰소.

깨어나는 삼라만상, 침착하면서도 생기 있게 일어서는 가로는 그저 감동 그 자체였다오.


절절 끓는 풋사랑이나 마찬가지인 맨 처음의 해외 나들이이니 왜 아니 그렇겠소.



거리 곳곳에 공원이 수 놓인 런던. 런던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정원 같았소.

켄싱턴 가든과 이어진 하이드 파크는 넓디넓은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오.

영국 의회 정치가 싹틀 수 있었던 자유 토론의 광장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낸 하이드파크.

푸르고 푸른 잔디밭 너머로 그보다 더 짙푸른 녹음의 숲이 펼쳐져 있어 시선 닿는 데마다 온통 녹색 천지를 이루고 있었소.



투명하니 상쾌한 대기. 맨발로 걷고 싶을 정도로 잔디의 감촉은 아주 근사했소이다.

아침 시간을 이용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마치 초록 들판에 피어난 흰 마거릿 꽃처럼 신선하니 보기 좋았소.

버킹검궁의 근위병 교대식을 시간 맞춰 구경하기 위해 질러갔던 센트 제임스 파크.

끝 모르게 이어진 너른 초원과 온갖 물새 노니는 호수도 소문대로 아름다웠소.

그 이웃의 그린파크 또한 이름값을 할 만큼 녹색 잔디 푸르렀는가 하면 조경이 아주 기막혔다오.

시내에 이러한 대소 공원이 이백수십여 군데라니 정녕 런던 시민이 부럽지 않을 수 없었소.

침략자, 약탈자로 세계 속에 군림했던 영국의 역사야 샘낼 것이 못 되나, 진정 탐이 나는 것 중 하나가 공원이라면 이해가 될는지요.


그도 그럴 것이 내 나이 막 사십을 넘긴 때였고 한국은 산업발전에만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오.




풍토나 기후 덕인지 어디를 가나 고르게 잘 자란 잔디밭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 윤기로운 초록빛의 싱그러움이라니.

특히 런던 타워 안의 한 잔디밭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소.

암굴의 미로 속을 헤맨 듯한 블러디 타워에서 정복왕 노르망디 공이 세운 화이트 타워를 거쳐 긴 줄을 섰다가 한 전시실에 들어갔소,

그곳 보물관을 둘러보는 데는 규모가 어찌나 엄청난지 한 바퀴 도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고 다리는 묵직했소.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된 곳은 영국 왕실의 보석과 집기들이 전시돼 있는 방으로,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굽이굽이 얼마나 길던지요.

막강한 힘과 권위를 상징하듯 각종 보석으로 찬란하게 장식된 엘리자베스 2세 왕관을 비롯, 호화로운 궁정 생활을 엿보게 하는 온갖 귀물들.

순금 잔, 순금 촛대 등과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삼천여 캐럿의 다이어먼드가 아마도 그리 많은 관람객을 유혹한 모양이오.




대영 박물관의 엄청난 소장품들을 둘러볼 때나 마찬가지로 여러 식민지에서 강탈해 왔을 보물들의 양에 지질려 고개 흔들며 밖에 나왔소.

마침 길 옆에 쉼터처럼 너른 풀밭이 기다리고 있었소.

피곤한 발도 쉴 겸 디귿(ㄷ) 자 모형의 잔디밭 가에 걸터앉아 맞은편 건물에 시선을 던졌더랬소.

한때는 성이었으나 중세 이후 반역자, 정치범을 유폐시키거나 처형하는 장소로 쓰였다는 런던 타워.

어린 왕 에드워드 5세가 암살당했다는 음산한 지하실에 놓인 형틀과 고문 기구들은 참으로 끔찍스러웠소.

죄수들이 절망에 빠져 휘갈긴 낙서 흔적들이 런던 타워의 내력을 암시했다면요.

겹으로 된 성곽의 높고 견고한 벽, 조그만 창에 촘촘한 쇠창살 등이 런던 타워의 성격을 설명해 주었다오.



쉬는 동안 무심코 안내문을 펼쳐든 나는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오.

내가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끔찍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던 거였으니까요.

영국의 세 여왕을 포함한 일곱 사람의 죄수가 처형된 장소였음에 아연실색, 튕기듯 일어나 버렸소.

그러고 보니 곁에 있던 목판으로 매끄럽게 쌓인 낮은 자리가 목을 자르는 받침대였던 거였소.

망나니가 큰 칼로 목을 치는 방법도 혹스럽지만, 도끼로 내리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일이겠소.

그 방식은 기요틴이 만들어지기 전 서양식 처단 방법의 하나였던 모양이오.



왕비에서 죄수로 그리도 참혹스럽게 죽어 간 비극의 여인 앤 볼레인.

‘천일의 앤’으로 불리는 헨리 8세의 왕비 앤 볼레인, 그대의 처형장이 여기었다니.

여행을 떠나기 전 유럽 역사를 찬찬히 읽고 더러는 메모해  갔더랬소.

소설과 영화 속의 그대 이름은 당연히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새겨져 있었다오.

영국 국왕 중 가장 특별난 생애를 산 헨리 8세.

헨리 8세는 여섯 번 결혼 경력에 두 왕비와 이혼하고 또 두 명은 사형시키는 등 숱한 화젯거리를 남긴 사람이었소.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앤 볼레인 그대는 젊고 매혹적인 시녀였다지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대와 사랑에 빠진 왕은 첫 아내를 버리고 그대를 맞았는데 그 과정의 우여곡절이야 능히 소설 감이 아니던가요.


첫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구실로 왕이 이혼을 신청하자 로마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소.

온갖 외압에도 불구하고 왕비를 버린 뒤 드디어 앤과 결혼함으로 왕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지요.

그렇다고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가톨릭과 인연을 끊고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탄생시킨 헨리 8세.

종교까지 바꾸며 선택한 그대가 왕의 기대를 저버리고 딸을 낳은 뒤, 두 번째 아기마저 사산하게 되는데요.

그러자 앤 그대는 억울하게도 간통죄를 뒤집어쓴 채 목이 잘리는 무참스러운 종말을 맞게 되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방적인 남성의 횡포에 희생된 여성이 무릇 그 얼마였나요.

또한 예측하기 어려운 우리의 삶, 그리고 마음자리의 가변성과 사랑의 덧없음이 허망감을 들게 하였소.



그대는 왕비가 된 지 햇수로 삼 년, 천일 간의 영화 누리고 한 점 혈육을 남겨 둔 채 죽어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더랬소.

왕비의 절통한 죽음 뒤에도 세월은 흘러 그대의 어린 공주는 자라서 엘리자베스 1세가 되었지요.

물론 어머니가 모반죄에 간통과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위험한 처지에 놓이나 용케 목숨만은 부지해 나갔지요.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이복 오빠와 이복 언니가 연달아 죽게 되지만, 블러드 메리로 불리는 이복언니 메리 여왕과의 대립은 살벌했더랬지요.

왜 아니 그러겠소, 메리 여왕 입장이라면 아버지가 앤 볼레인을 맞아들이며 생모인 왕비를 권좌에서 쫓아낸 데다 국교까지 바꾼 계기를 만들었으니.

오죽하면 메리는 재직 시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세우는 등 엘리자베스를 노골적으로 박해하며 둘 사이 갈등 국면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오.

운명의 여신이 손을 들어줘 결국 엘리자베스는 여왕이 되어 역사에 길이 남을 황금시대를 이룬 통치로 온 국민의 존경과 찬사를 받게 되지요.

하여, 앤 볼레인 그대 사무친 한이야 어느 정도는 풀렸을 법도 하오.



한때 ‘고향의 푸른 잔디’라는 팝송이 유행을 탄 적이 있었소.

영어의 몸인 한 남자가 다시는 밟을 수 없는 고향의 푸른 잔디를 그린다는 애절한 가사였소.

이 세상 모든 것과의 단절, 밝은 태양과도 작별해야 하는 마지막이 주는 절망감, 그것을 이 나이에 어찌 안다 하리오.

다만 그대가 죽음에 임해 두 눈에 담았을 초록빛을 나 지금 바라보며 그대 비탄 젖은 심사를 상상해 보았소.

문득 푸른 잔디 잎잎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시야 흐려지기 시작했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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