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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3. 2024

샌 가브리엘 미션ㅡ순례의 길


캘리포니아 미션 순례를 하고 나면 늘 다큐 <차마고도>를 다시 보곤 했다. 그중에서도 <순례의 길>을 찬찬히 음미하며 보게 된다. 온몸을 땅바닥에 던지는 오체투지 삼보일배로 2천여 킬로미터의 긴 여정을 순례한다는 것, 죽기 살기의 비장한 각오 없이는 결코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들 이마에 굳게 앉은 상처 딱지가 아니더라도 고통과 힘듦이야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순례의 길에 나선 티베트 청년들은 기도 공덕으로 부귀영화를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일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그들. 요즘 등교 시간이 앞당겨지며 매일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한다. 미사를 마친 후 으레 몇몇이 성체조배실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항상 지향은 누군가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 시간이었음이 상기된다.

그랬다, 내가 누리는 오늘의 이 안락은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우리를 위해 올리는 누군가의 기도 공덕이었구나 싶으니 가슴이 싸해온다. 교만과 아집에 빠진 여타 신앙인들과 널리 나눠보고 싶은 <순례의 길>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심인가를, 무엇이 참다운 종교인의 자세인가를 다시금 성찰하게 해 준다.

오래전 절에 다니며 백팔배를 하고 삼천 배를 하기도 했었다. 합장한 손을 오롯이 모아 내리며 깊이 엎드려 이마를 마룻바닥에 대는 백팔배를 올리다 보면 청마루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기운의 느낌만으로도 자신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백팔배도 힘들어 다리가 후들거렸고 삼천 배를 한 다음엔 어기적거리며 기다시피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티베트 순례의 대장정에 나서면 십만 배도 넘게 한다니.... 십만 배를 올리려면 2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는 오체투지. 나를 버려 맨 밑바닥에 내려놓는 일, 더할 나위 없는 겸손의 자세인 오체투지도 아무런 사심 없이 세상을 가슴에 품는구나, 하는 절절한 울림을 주지 않고는 한갓 쇼가 될 수도 있다. 언젠가 모 정치인과 종교단체가 새만금 공사와 관련, 이런 행위예술? 을 통해 이목을 끈 바도 있듯이 말이다.

가톨릭에서 처음 신부로 태어나는 서품 의식 때도 오체투지를 한다. 하늘과 땅 안의 모두에게 겸손하게 낮추면서 봉사하겠다는 서원이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늘의 제단에 바친 사제의 신심이 거룩하게도 혹은 낯설게도 여겨졌던 나였다. 성당의 종소리와 마더 테레사와 로만칼라와 장엄 의식 등은 내심 흠모하면서도 근처를 기웃대지조차 않은 신실한 불자였던 나. 미국에 와 가톨릭에 입문하고 비로소 평화, 감사, 용서.... 이런 단어들이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결혼 전까지는 특정 종교가 없다가 무량화라는 불명으로 산 세월이 30년, 마리아로 불린 지도 그새 이십 수년이 훌쩍 넘어섰다.

종교마다 부르는 신의 이름이 다르고 기도 방식이 다르지만 궁극점은 결국 한 곳이라 알고 있다. 티베트인들의 부처님은 하느님이요 활불 역은 수행자로 바뀔 따름이지 종국엔 진선미의 지향 곧 세상을 끌어안는 사랑, 仁, 자비심의 증득이다. 물론 기독교는 전지전능하신 유일신을 믿으며 불교는 해탈에 이르면 누구라도 부처, 즉 깨달은 자가 된다고 가르친다. 그중 티베트 불교는 이 세상 모든 중생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고행을 수행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들 수행의 방편인 순례는 예수께서 십자가 짊처럼 고통에 맞서는 인내의 결정판이다. 긴긴 윤회의 길목에서 잠시나마 진정한 의미의 가치로운 삶을 찾아보고자 나선 길, 그들은 사람의 몸을 받고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데 주어진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고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하여 나아가 삼라만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위해서 매 순간 기도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善을 행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윤회의 업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철저한 이타행이다.


사랑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기독교의 십계명 중 첫 번째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이다. 시샘 많은 인간도 아닌 전지전능하신 분이 유치하게 질투 때문이겠는가. 이는 “내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가 자기의 외모나 세상의 권세나 재물에 도취되어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 생각할 때 너희의 마음이 거기에 가 있게 되므로 이는 곧 너희가 나 이외에 다른 신(물질이든 명예든)을 모셔 두고 그런 우상을 섬김과 같으니 이는 너희가 나를 버리고 악에게 넘어가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깊이 새겨들을 말씀이다. 과연 오늘의 종교인들, 난삽한 용어로 覺者然 하며 이웃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언필칭 신앙인이면서 무늬만 신앙인인 짝퉁에다 엉터리, 사이비로 산 건 아닌가 자괴감을 느낄 법도.....

미션을 안내하는 종을 따라서 차례차례 캘리포니아 미션을 순례하다 보면 그 옛날 스페인 신부들의 꿈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이 캘리포니아 초기 역사와 함께 파노라마 되어 드러난다. 이번에 나선 산책길은 샌 가브리엘 미션으로 지난여름의 방문이다. 샌 가브리엘 미션의 정식 명칭은 미션 샌 가브리엘 아르깡셀(Mission San Gabriel Arcangel), 이는 가브리엘 대천사를 의미한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엄격한 요새같이 돌아앉은 미션은 그리 상냥스럽지 않았다. 출입구부터가 엉뚱해서 첫인상이 무뚝뚝하게 여겨졌던가. 건물 외곽만 돌아보고 싱겁게 끝나야 하나, 짐짓 맥이 풀리려던 차에 측면의 기프트샵을 통해 들어간 수도원 경내다. 저만치 왼쪽으로 이어진 건물들은 꽤 규모가 크다.

스페인 풍에 이슬람 건축양식인 무어리시(Moorish)의 특징을 접목시킨 독특한 스타일로 구성되어 다른 미션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좁고 높은 창문은 다른 미션들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라고 한다. 미션의 설계는 안토니오 크루자도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캘리포니아의 대표적 과일인 오렌지를 최초로 재배한 사람이기도 하다. 잦은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돌과 벽돌, 모르타르 등으로 견실하게 건축되어 바닥과 벽, 천장 등은 모두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나 라이트우드 지진으로 종탑이 무너져 철거하고 새로 만들었다. 미션의 종은 선교나 일상에 유용한 시설물로 미사 시간, 삼종기도 시간, 일의 시작과 끝, 휴식과 식사시간은 물론 출생이나 장례를 알리는 통신 도구였기에 아주 중요한 미션의 필수물이다.

미션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전교의 전초지이다. 자연인으로 살던 인디언(Tongva 부족)들을 데려다가 문명화란 이름으로 그들 고유의 생활을 변화시켜 나가면서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공동체를 이루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갔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선교사와 원주민 사이엔 더러 마찰과 소요가 발생했던 모양이다. 통버 인디언들은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이 있었지만 선교사들은 기술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영농법과 가축 관리법, 도구 사용법은 물론 유럽의 예술까지 가르쳤다고 한다. 비누와 양초를 제조하고 포도주를 생산하는 와이너리, 직물을 짜는 작업실, 각종 도구를 만들기 위한 대장간도 운영하였다.



그래서인지 깨어진 토기 등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유물 흔적과 대포로 상징되는 침략자인 유럽 문물이 혼재해 있는 어도비 박물관은 여타 박물관만큼의 별다른 관람거리도, 그다지 특별한 감흥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국왕인 카를로스 3세가 하사한 물품과 1771년 11월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은 원주민 아기의 세례 장식도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종교사적이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많이 남겨진 곳으로 캘리포니아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California Historic Landmark 158호)



미션 샌 가브리엘은 LA 다운타운과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다. 캘리포니아의 산업 발전과 로스앤젤레스의 탄생에 중추적 역할을 한 점과, 통버 인디언의 교화와 함께 이 지역에 많은 멕시칸들을 정착시켰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이곳. 또한 멕시코 & 미국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귀화하여 로스앤젤레스 시의원으로 활동하며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기반을 구축한 멕시코인 피오 피코(Pio Pico)가 1801년 미션 샌 가브리엘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거리 이름으로까지 남겨진 피코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이긴 하지만.



멕시코 땅이었던 곳답게 과달루페 성모상 앞에는 헌화된 꽃병이 수도 없다. 퇴락한 수도원 후미진 구석엔 들고양이 가족이 진을 치고는 나른한 듯 평온스레 오수에 잠겨있다. 여러 종류의 선인장과 열대 식물의 화려한 꽃 행렬에 질세라 만발한 무궁화와 상사화를 뜻밖에 조우한 오래된 정원에서는 해묵은 흙 때문인지 골방 같은 냄새가 퀴퀴하니 났다. 다소 조악하다 싶은, 무질서하니 작정 없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심어진 정원은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망고나무 아보카도나무가 열매를 매단 채 싱싱한 기운을 뿜어댔다.


경내에 들어왔지만 안내는 역시 그다지 친절한 편이 아니다. 미로 찾기 하듯 굽이를 돌아 무너진 흙벽 모퉁이를 지나자 무작정 높이 치솟은 종려나무 옆으로 창천에 초록물감 듬뿍 찍어 붓질하듯 사이프러스 나무 세 그루가 밋칠하니 서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이자 수도원 본채 건물과 잇닿은 정원을 대하는 순간 그야말로 전율이 좌르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한동안 말을 잊게 만들었다.



1774년에 심어진 포도나무와 깊은 연륜을 짐작케 하는 올리브나무뿐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의 묵뫼들, 그 앞에는 열 지어 선 철 십자가가 즐비했다. 족히 2천여 명쯤의 영혼이 잠든 곳이라는데 새하얀 세라 신부의 동상이 그 모두를 지그시 아우르고 서있었다. 경내는 참선에 든 듯 아주 고요했으나 내리쬐는 햇살은 사정없이 따가웠다. 어둑신한 나무그늘로 슬그머니 숨어들었다. 그늘을 만든 포도나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볼수록 굉장했다. 성 가브리엘 미션은 포도나무 하나로 요약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만큼 대단했으며 자연스레 탄성이 일 정도로 장관이었다.



1771년 9월 8일 네 번째로 설립된 생 가브리엘 미션인데 뒤뜰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1774년의 일. 1774년이라면 필라델피아에서 첫 대륙회의가 열린 해이니 독립선언서가 채택되기 전이며 조선은 영조 임금 때이다. 수령이 물경 이 백 얼마인가 되는 굉장한 노거수는 한 아름이 넘는 위엄 어린 몸통만이 아니라 뒤뜰 거의를 점령할만치 왕성히 뻗어나간 줄기의, 오랜 세월 이어진 무한 생명력이 놀라웠다.


무성한 포도넝쿨이 빚어낸 녹색 회랑 아래를 천천히 거닐다 보니 참으로 한유롭구나,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생활에 치이고 부대끼느라 곤고했던 심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상처 주고 상처받은 고단한 영혼을 쉬게 하는 은혜로운 힐링타임, 치유의 시간이 되어주었으며 역사의 향기에 취해보기도 한 잠시. 물외한인되어 삶에 대해, 종교에 대해, 세월에 대해 묵상에 잠겨볼 수 있음도 값진 시혜였다.



머리 위로는 시렁을 타고 한정 없이 뻗어나간 포도 줄기, 푸르른 이파리 새새로 송글송글 포도송이가 늘어져 있었다. 수도원에서 사용할 성혈을 제조하기 위한 포도주를 담그는 포도라서인지 알이 아주 자잘했다. 포도덩굴 그늘 아래 벌새가 노니는 정원에서 모처럼 느껴본 감정, 아아~마치 꿈결이듯 평화롭고 행복하구나. 오욕칠정 멀찍이 벗어나 세상사 말끔히 초탈한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랄까. 먼 추억의 갈피 속 새벽안개 냇물처럼 흐르던 운주사에서 너무도 비현실적이라서 거의 환각 같았던, 비몽사몽 같았던 하루 이후. 비록 잠시 몇 시간일 뿐이지만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충일감이 감지덕지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성가가 자연스레 읊조려졌다. 경내를 벗어나서도 한참토록 '나를 마시는 자 목마르지 않으며.....'가 음표를 달고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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