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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5. 2024

미션 샌루이스 오비스포 ㅡ 은혜의 종소리였다면

미션 산책

스페인 국왕은 캘리포니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미 막강한 스페인 함대로 아메리카 대륙과 극동 각처에 식민지를 확장시켜 나가며 제국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다. 1602년 국왕은 원정대를 꾸려 샌디에고, 산타 바바라, 몬테레이 등 해안지역을 탐색케 하였다. 그 후 탐험대의 제안에 따라 정복 거점을 확보하려고 이 지역에 군인들과 함께 프란치스칸들을 파견시켰다. 1683년부터 1834년까지 당시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일대를 통치했던 스페인 정부가 정략적으로 건립한 미션은 종교를 앞장세운 침탈의 전초기지였다. 순결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선교 열정이 이렇듯 종종 정치집단의 야욕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센트럴 코스트를 따라 길게 늘어선 해변을 낀 샌 루이스 오비스포는 원래 스페인어로 La Canada de los Osos (곰의 골짜기)라 불리는 추마시 인디언들의 주거지였다. 곰이 서식할 만큼 깊은 산골짜기도 있는가 하면 바다와 낮은 구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이곳은 풍치 매우 아름다운 지역이다. 따뜻한 햇살과 습습한 안개가 내리는 비옥한 토양. 거기다 날씨까지 받쳐줘 일 년 내내 온화한 해양성 기후대를 보이는 최적의 자연환경이라 퍽 평화롭고도 목가적인 전원이었다. 그래서인지 도처에 포도원이 즐비하게 널려있다.


엘 카미노 레알 (El Camino Real)은 스페인 선교사들의 캘리포니아 선교 개척 통로로서의 미션 트레일이다. 바로 이 '왕의 길' 중간 지역인 샌 루이스 오비스포에는 특별하게도 캘리포니아 스물한 개의 미션 가운데 두 개의 미션이 자리했다. 미션 샌루이스 오비스포 데 톨로사와 미션 샌미카엘은 그렇게 서로 지척거리에 있다. 게다가 아늑한 포구 풍경이 펼쳐진 모로 베이,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허스트 캐슬, 아름다운 정원인 보태니컬 가든, 온천이 있는 아빌라 비치, 빅토리안 양식의 피에드라 블랑카스 등대, 최고의 와이너리로 통하는 파소 노블스, 클램 페스티벌이 열리는 피스모 비치와 빅 서 등이 주변에 몰려있다.


Mission San Luis Obispo de Tolosa는 주니 페로 세라 신부가 1772년에 세운 다섯 번째 미션이다. 프랑스 톨로즈 지방의 오비스포, 즉 비숍이었던 세인트루이스 오비스포의 이름을 붙였다, 루이스 주교는 나폴리 왕 찰스 2세의 아들이자 프랑스 루이 9 세의 조카라 한다. 미션의 왕자라 불리는 이 미션이 건립된 초기. 원주민들은 이주자들이 갖고 온 총이 그들을 위협해 오던 곰을 퇴치시켜 주었기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백인 이주민이 늘어나며 점점 정복 야욕이 노골화되자 반목이 깊어졌다. 1776 년 외지인들을 몰아내고자 원주민이 쏜 불화살이 미션의 초가지붕에 떨어졌다. 삽시에 불길이 짚섶으로 옮겨 붙으며 부속 건물 전부가 불타버렸다. 이를 계기로 이후 가마에서 구워 낸 붉은 기와로 지붕을 얹으며 미션의 상징처럼 돼있는 담황색 지붕이 자리 잡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의 중간쯤에 위치, 여정상 하룻밤 묵어가야 할 경유지라서인지 샌루이스 오비스포에서는 숙박업소가 흔히 눈에 띈다. 모터 (Motor)와 호텔(Hotel)이라는 단어가 합친 모텔 (Motel)이 처음 선을 보인 곳도 101번 고속도로가 지나는 이곳. 하여 오래전부터 중가주의 교통 및 교육의 요충지가 되었다. 항공 우주공학 전공으로 유명한 칼 폴리 샌루이스 오비스포(California Polytechnic State University) 캠퍼스가 이 도시 언덕 위에 서있다. 아보카도와 레몬 생산지이자 와이너리 명소가 산재해 있는 샌루이스 오비스포를 미국인들은 긴 이름 대신 아주 짧고 간략하게 SLO, 그냥 슬로라 부른다.   



미션 정문 위치가 모호해 주위를 한 바퀴 빙 돈 다음에야 경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도심 복판에 앉아있지만 바로 앞에 샌루이스 크릭이 흐르고 고목 플라타너스가 운치를 더해주었다. 미션 외관은 질박했으며 다섯 개의 종이 걸린 종각은 검소했다. 마당가 연못에 회색 곰과 원주민이 계곡에서 노니는 조각이 어우러져 있는데, 그 앞엔 생뚱맞게 놀이기구 회전목마가 돌고 있었다. 그래선지 전체 느낌은 미션답지 않게 산만하니 어수선했다. 조용한 쉼이 허락되는 여타 미션과 달리 안정감 대신 분위기 분다운 편. 뮤지엄도 건성 스치고 후원으로 나갔다. 종루에 달려있어야 할 종이 뒤뜰 정원 입구에 세 개나 매달려 각각 기쁨, 슬픔, 은혜의 종이란 이름이 붙어있었다. 산과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미션의 종소리가 은혜로운 평화의 종소리였다면 추마시들이 과연 불화살을 날렸을까, 아마도 그 종소리가 문명화의 기쁨보다는 착취로 인한 아픔과 자유를 빼앗긴 슬픔만 주는 신호음 같았던 건 아닐지.  

포도 시렁에 포도알 바짝 말라가는 황량하기만 한 후원을 가로질러 성당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미사가 봉헌되는 아담한 성당이었다. 실내는 자연채광으로 밝은 편이라 벽감 둘레에 그려진 자잘한 꽃무늬가 살아있는 듯 싱싱했다. 그만큼 사실적이기도 하지만 오롯한 성심이 담겨있는 정교한 그림이었다. 알타 캘리포니아 소재 대부분 성당이 그러하듯 멕시코 풍 제단은 장엄미나 경건함 대신 한국 무속신앙의 신당처럼 울긋불긋해 이질감이 느껴졌다. 절에 다니면서 탱화나 단청에 익숙해 있고 천지만물을 상징하는 오방색도 좋아하지만, 붉은색 계열의 샤머니즘적 색채엔 왠지 거부감부터 들었다. 앞뒤로 사진 두어 장 찍은 다음 성호 긋고 얼른 나왔다.  


미션 샌루이스 오비스포도 다른 미션들과 같이 역사의 질곡을 피할 수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운명의 파도를 전신으로 겪어야 했는데, 1822년 스페인으로부터 멕시코가 독립하며 신생독립국가의 제반 문제와 얽혀 쇠락해 갔다. 결국 1835년 미션 세속화 법령에 따라 63년간 지속된 미션은 폐쇄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Pio Pico 지사는 교회를 제외한 땅과 건물 모두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1846년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 중일 때는 John C. Fremont의 캘리포니아 대대 (California Battalion) 작전 기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때는 샌루이스 오비스포 카운티 최초의 법원과 구치소로도 쓰였다. 한참 후인 1859년 비로소 가톨릭 교회로 반환됐다. 현재의 건물은 1794년에 중건된 것이니 2백 년이 넘는 유서 깊은 역사유적지인 미션 샌루이스 오비스포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늠름한 노거수들이 유독 많았다. 캘리포니아 역사 랜드마크 325호다.

주소: 751 Palm St, San Luis Obispo, CA 9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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