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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5. 2024

각설하고 한마디로 자기만족

카미노여정 에필로그

더 말라가지고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하구나.

전체적으로 가무스름하게 타기만 했지 야위긴커녕 생기 넘치는 얼굴로 입국하는 나를 보자 언니가 그랬다.

루르드에서 갖고 온 성수를 나눠주려 만나게 된 이들마다 내 나이를 알기에 한층  놀랍다는 반응들이었다.

시간여유만 된다면 사실 누구라도 시도할 수 있는 일로, 카미노에 나서는 건 남다른 각오보다 용기만 필요할 뿐이다.

실제로야 날마다 무거운 짐 지고 걷는 일이 쉬운 게 아니고 그렇다고 잠 자리가 편한 것도 아니며 먹는 것 역시 변변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풍광 변하는 낯선 길을 맘 내키는 대로 자유로이 걷는다는 건 여간 매력적인 일이 아니다.

그 짙은 여운에서 채 빠져나오기도 전인 데다 주변의 자극에 고무받아서였던가.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돌아온 사람마냥 한동안은 치기가 발동해 자못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더랬다.



아들 친구들 모임에서, 한 달간에 이르는 나의  카미노 여정을 두고 무척 부러이 여기더라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대부분 경제여건이나 형편이 괜찮은 그들 부모님이지만 단체로 가는 해외여행조차도 맘대로 못 가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오십 대 자제를 둔 부모라면 일단 나이가 칠십 중후반.


그 연배에 이르니 건강상태가 여의치 않은 경우도 많아 장거리 여행 자체를 엄두내기 그리 쉽지가 않다.  

하긴 카미노 걷는 건 약과이고 히말라야를 등반한다든지 자전거로 대륙횡단하는 노익장들도 흔해빠진 요즘이긴 하다.

그러나 아들 친구 부모들은 별장에서 편안하게 쉰다거나 호캉스, 해외라면 기껏해야 크루즈 여행 정도란다.

나이 들면 거의 필수이다시피 한두 가지 꼭 챙겨가야 하는 성인병 약 아직은 복용하는 거 없다.

관절 지금까지는 별 문제없으니 수백 킬로에 달하는 장거리 마다하지 않고 걸어보겠다며 나설 수 있었던 나.

그 점 아이들도 가장 감사히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누구라도 자신이 스스로 즐겨서 진정 기분 좋게 하는 일이라면 힘든 줄도 모른다.

마음속 외침이나 갈망대로 자기 요구에 구순하게 따르는 일이라서 전혀 거슬림 없으니 좋을 수밖에.  

우리집 가장인 요셉은 한국 살 적부터 취미가 바다낚시였고 미국에서도 기회만 닿으면 바다낚시를 떠났다.

순수 취미 정도를 넘어 주말마다 눈비가 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낚시에 중독돼 있었다.

그것도 흔한 갯바위 낚시가 아니라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서 한 이틀 죽을 고생하고 돌아와도 또 갔으니까.

망망대해 내리쬐는 땡볕 거칠 것 없이 무지막지하고, 물기 닿기만 해도 쩍쩍 달라붙는 엄동설한 뼛속까지 스미는 해풍 마다치 않고 요셉은 사시사철 무시로 낚시를 즐겼다.

무엇보다 놓기 힘든 새벽단잠 결연히 접어두고 한밤중에 부스스 일어나 낚시채비하노라면 어느 결에 새 기운 솟으며 신명올랐다.

그렇게 심해에서 낚아온 싱싱한 생선이건만 당시 나는 회에 대한 선입견에 더해 날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입에 대지도 않았다.

잡식성이 된 요새 같으면 깊은 바다에서 잡은 자연산 만나기 어려워서 못 먹지만.



미국 와서 어쩌다 우연히 선택된(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세탁소 일에 잡혀서 십몇년을 꼼짝없이 옷먼지에 파묻혀 살았다.

아침 일곱 시 전에 출근하면 저녁 일곱 시 넘어야 퇴근, 그나마 일터 가까이 거처가 있는 덕에 피로감 덜었다.

환기를 위해 앞뒷문을 늘상 열어두었기에 뉴저지 하늘을 자재로이 오가는 비행기나 바라볼 뿐 그야말로 여행이란 휴가 때 며칠간 잠시나 가능했다.

아우의 그런 이민자 생활을 와서 보곤 기가 막혀 분기탱천한 친정언니.

 

화살은 애꿎게도 우리 집 아들에게 돌아가 엉뚱스레 조카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닦달했으니 영문도 모르는 채 아들은 만판 곤욕을 치렀던 모양이다.  

당시 그런 류의 직업적인 일이라고는 난생처음 해보는 나였지만 주부라면 진작부터 해온 일이라 별 문제없었기에, 영어도 형편없으면서 곧잘 적응해 나간 편이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짬도 없다는 말대로 워낙 바쁘다 보니 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이람? 회의감에 젖어 우울해할 새도 없었다.

울적해져서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지긴커녕 날마다 밝은 기분으로 오가는 들과 즐겁게 교류하며 일터를 '놀일터' 삼아 하루하루 바쁘지만 활기차게 보냈으니 뒤돌아 회한 같은 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일 속에서도 가치를 발견하고 보람을 찾았기에 자기비하나 불평불만에 빠지지 않았던 거 같다.   



분명한 목표, 그것이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된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목적으로 미국에 같이 건너온 딸아이는 원하던 대학원의 '유물보존처리' 공부 대신 형편 따라 등록금이 좀 낮은 한의대로 진학했다.

본래 고고학과 재학 중에도 중의학에 관심을 가져 독학으로 중국어를 마스터했던 딸이다.


96년도에 북경과 천진으로 유학 여건을 타진해보려 세 식구가 현지답사차
방문한 적이 있었더랬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치안상태를 비롯 여러모로 불안해서 계획은 접고 말았다.

대신 미국에서 늦게나마 자기 길을 제대로 찾아 정진하는 딸에게 보내주는 생활비란 명목의 얼마간 경비.


돈을 만들게 해주는 고마운 일거리, 해서 세탁소 일이 지겹다거나 힘들게 여겨질 리 만무였다.

비록 저녁이면 파김치 될 적이 많았지만 심적으로 만족하면 매사 행복감 충만해지는 법이다.

물론 전적으로 도맡은 건 아니지만, 일부라도 내 노력으로 딸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게 흐뭇해서 외려 흥이 나고 힘이 났기에 그 일을 내게 허락해 주신 하늘에 감사드렸다.

애오라지 일용할 양식 얻기만을 위한 노동이었다면 진작에 녹초 돼버렸을 테지만.


교민 대부분이 그러하듯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면, 무슨 일에 종사하건 없던 기운도 새로이 생겨났지 싶다.

그렇다. 내 삶을 이끄는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했기에 지치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행복한 워커홀릭이 될 수 있었던 것.

어떤 일을 하며 보람과 긍지 나아가 희열을 느낀다면 그 일 자체가 바로 심장 역동적으로 뛰게 하는 원동력 제공처렷다.

그렇게 정신없이 분주한 와중에도 글을 써 신문사에 보내고 블로그를 운영했으니 글은 또 하나의 내 버팀목이었던 셈.



나름 보람차고 기꺼웠던 그 시절은 지나가고 나이 든 이제, '먼 길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 같이 호젓한 시간과 마주 앉았다.

매사에 예각 곧추세우지 않을 만큼 성격 무덤덤해진 데다 긴장도 역시 느슨하니 헐거워진 지금. 


세사 별로 급할 것도 답답스런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부러운 것도 이젠 줄어들었다.

그 먼 여정에서 돌아와 다시금, 진짜 머나먼 카미노 길을 생고생하며 걸으려 했는데? 누군가 물으면 여전 답할 말이 궁해진다.

가급적 쓰기도 저어 되는 단어이긴 하지만 순례자다이 종교적 열망에 가득 차서도 아니다.


사진광이라서 맘에 드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긴 셀폰으로 기록사진이나 찍으니 어불성설)

색다른 이국 구경하러 가는 여행자나 별식 맛보러 가는 미식가도 있긴 한 모양이나, 산티아고 데 카미노의 애당초 취지는 그게 아니란 것쯤은 다들 안다.

조용히 혼자 걷는 시간이 많기에 자아찾기 또는 자기성찰, 이란 표현 곧잘 쓰는데 이에 이르면 닭살 돋는 걸 어쩌랴.

그 한편으론 내심 탐진치로 혼탁해진 영육 다스려 좀 맑혀볼까도 싶었고 감히 향기로운 영혼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꿈 막연하나마 지향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을 뿐.

글쎄? 어거지로 꿰어맞추자면 제멋에 취해서랄까.


각설하고 한마디로 자기만족, 본인이 좋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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