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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9. 2024

아리디 아린 선인장 가시

한림읍 서쪽 끄트머리 짬에 위치한 전형적인 자연부락 월령리.

그래도 거리상 서귀포에서는 두 시간 남짓 걸리는지라 벼르고 별러 갈 수 있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이미 두 번이나 작정하고 길을 나섰었다.

하지만 가다가 도중에 다른 곳으로 새거나 중도작파하고 되돌아온 적도 있다.

혼자 가기엔 그만큼 지루했는데 도반과 나란히 앉아 담소 나누며 시나브로 가니까 그럭저럭 월령리였다.

천연기념물 제429호로 지정된 월령리 선인장 군락지에 비로소 닿았다.

아주 자그마하고 질박한 마을 월령리.


선인장 열매와 마늘 등의 농사로 실속 있게 살아가는 여늬 농촌부락의 하나였다.


손바닥 선인장이라 부르는 이곳 선인장은 여름철에 노란색 꽃이 피었다가 꽃 진 자리에  자줏빛 열매가 맺힌다.


백 가지 병을 고치고 백 년을 살게 하는 열매라는 뜻을 가진 이 열매가 천식, 소염, 해열제 등으로 널리 쓰이는 백년초.     


백년초가 몇 년 전부터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선인장마을도 동시에 떠올랐으니 백년초는 이 마을 효자동이인 셈.


더구나 돌 천지인 제주엔 뱀이 흔하다는데 담장 가에 선인장을 심어두면 가시 무서워 뱀이나 쥐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마을의 묵은 집일수록 거의가 돌담 넘어까지 무성한 선인장이 억척스레 터를 넓혀가고 있었다.


선인장은 아메리카대륙의 척박하기 그지없는 뜨거운 사막지대가 고향이니 사철 뚜렷한 우리 풍토와 어울리지 않는 식물이다.


희한하게도 멕시코 산 선인장이 마을 돌담과 해변가 현무암 바위 사이에 수도 없이 뿌리내려 청남빛 바다 풍경과 어우러져 퍽 이국적이다.


따라서 돌담을 감싼 선인장 무리가 빚어내는 분위기 역시 독특하고도 이색적이기만 하다.


모래 대신 바닷가 시커먼 현무암 암벽 틈에 돋아나 환경에 맞춰 빗물보다 짭조름한 간기에 더 익숙하도록 적응기 거쳐온 선인장.


쿠로시오 난류를 따라 태평양 건너 열대지방에서 표류해 와 스스로 바닷가 모래 땅이나 바위틈에 몸 붙여 자생지를 넓혀갔다.


이와 비슷하게 일부 선인장들은 씨앗이나 줄기가 파도 타고 떠밀려와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혹은 아프리카에 정착하기도 했다.


물과 양분을 저장하기 위한 다육조직 전면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가시를 달고 있는 선인장.


잎이 변형되어 생긴 가시는 수분 저장고이자 동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온  선인장은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


아주 작은 한쪽 심지어 일부분만 떼어내 심어도 완벽하게 새 생명체를 완성시켜 나가는 선인장.


어떤 시절인연으로 제주도 그중에서도 유독 월령부락을 새로운 삶의 터로 택해 대단위 군락지 이룰 만큼 번성하게 됐을까.


아리고 아린 한 제주 여인의 통한서린 기막힌 삶을 예견이라도 했던가.

선인장 가시에 찔려본 경험이 있다면 아릿거리면서 심히 거슬리는 묘한 느낌을 알 터.


해서 가까이 접근하지 않게 되는 성정 까칠한 식물이다.


그러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악조건인 환경이나 조건 모질게 참아내고 견디는 인종의 표본이다.


버겁고도 힘든 시련 묵묵히 감내하며 선인장 가시 박힌 채 아린 삶을 살아간 무명천 할머니가 생전에 거처한 집이 있는 골목.


그 집 굴뚝에 새겨진 한 마리 새는 할머니의 한 많은 세월을 증언하는 것일까.


한국근대사 최대 불행이었던 4·3이라는 광풍에 휘말려 평생을 남모르게 울음 삼켜야 했던 진아영 할머니.


서른 다섯 나이에 집 앞에서 턱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졌다.


그 후 무명천으로 턱 가린 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55년의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오다 외로이 숨을 거뒀다.


순박한 촌부였던 진아영, 그러나 아무도 돌봐줄 사람조차 없게 되자 언니가 월령리로 데리고 와 이 마을에서 지냈다.


선인장 열매나 톳을 따 연명했던 할머니는 턱과 이가 없어 씹지를 못하니 위장병과 영양실조로 일주일에 두 번은 병원에 다녔다.


상상만으로도 어깨 오싹 떨릴 만큼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후유증을 안고 산, 한깊은 인생사가 다큐로 만들어졌다.


1998년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천 할머니'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할머니가 남긴 두 칸짜리 빈집에는 고양이만 어슬렁거렸다.


선인장 가시보다 더 아릿하고 쓰라린 4.3의 처절한 흔적들은 실제 제주 그 어디를 가나 녹슨 못처럼 박혀있다.


진기하고 아름다운 풍광 즐기러 제주를 찾은 여행객들은 알 리 없는 역사의 아픔이 간직된 이곳.


극단의 이념에 매몰된 채 피아 구분 지어 그 몹쓸 편 가르기 분열로 대립해 벌어진 광풍만은 이 땅에서 더는 발생돼선 아니 되리라.


언제나 약자인 백성들만 피해자로 남을 뿐 윗녘에선 서로 상대 탓이라며 삿대질, 이젠 진저리 쳐지지 않는가.


오늘도 풍력발전기 시원하게 돌아가는 이곳. 바닷가 선인장 마을 월령리.


주변에 둥싯둥싯 오름이 분포돼 있는 데다 올레길 14코스 선상에 위치해 있는 월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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