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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1. 2024

기적의 항해 그리고 아름다운 보은

흥남철수작전

잊혀가는 동족상잔의 비극 6.25. 기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일단 <기적의 배>를 검색해 보십시오. 특히 북쪽이 고향이신 분, 감회가 남다를 겁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찬 흥남부두...." 생과 사가 갈리는 여기에 감히 진영논리 따위라니요


제가 기적의 배를 알게 된 것은 미국에 온 2001년 가을, 어느 수사님의 선종 소식을 접하면서였습니다. 그 기사는 뉴욕판 중앙일보에 실렸더랬는데요. 눈길을 끌게 한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어요.

배를 타려고 바닷물에 뛰어든 피난민들로 북새통 이룬 한겨울 흥남부두. 낯설지 않았지요. 연결이 쉽지 않은, 수사님의 선종과 흥남부두의 피난민 사진이 제 관심을 모으게 했습니다.

한국전 때 수많은 인명을 구한 상선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라루씨는, 후에 마리너스 수사가 되어 크리스마스트리 가꾸며 베네딕또회 뉴턴 수도원에서 은거했는데요. 1954년부터 2001년까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수사 생활하며 트리 농장을 가꿨는데, 그간 수도원 밖으로 나가본 일이라곤 병원 가는 일 외엔 오직 한번 1960년 미국정부가 주는 공훈장을 받느라 워싱턴에 간 것뿐이라네요.

헌데 그분 사시던 수도원이 현대 사회 어디나 그러하듯 성소자 감소로 폐쇄 위기에 처할 즈음, 독일 베네딕또 본원에서 한국 왜관 분원으로 SOS를 보냅니다. 전원풍의 뉴저지주 써섹스 카운티에서 북서쪽 한 모퉁이, 500 에이커 (약 62 만평)의 광활한 대지에 자리잡은 수도원. 한때 80여 명에 이르는 수도자들이 고등학교, 여름캠프, 크리스마스 농장을 운영하면서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전통대로 기도와 노동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 생활에 헌신하려는 지원자 수가 감소하였고, 성 바오로 뉴턴 수도원 역시 머지않아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구조대가 도착한 겁니다. 왜관 수도원에서 온 수사들은 무언중에 "이제 우리가 무엇인가 돌려줄 때라고 믿습니다"라는 마음가짐이었지요.

반세기 전에 베푼 인도주의적 헌신ㅡ나중에 수도자로 살았던 한 선장이 수많은 한국인을 구조한 일ㅡ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되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법도 했습니다. 뉴턴 수도원은 현재 베네딕토 왜관수도원에서 파견 나온 수사들에 의해 위탁 운영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뉴욕 및 뉴저지  일원에 사는 한인 교우들을 위한 피정이나 세미나 등을 수시로 열어 우리들의 영성생활을 신장시키는데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에 구상나무 전나무 숲 푸르고 숲길 사이에 호수도 여럿, 오솔길에선 사슴이며 비버, 스컹크도 만날 수 있지요.


처음, 왜관 분도 수도원의 김구인 신부님을 비롯 몇몇 분이 뉴튼 수도원에 닿은 건 2000년 봄이었대요, 그리고 이듬해 가을,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었던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에서 온 수사들 덕에 안심하고 눈을 감습니다. 이후 한국으로부터 파견된 수사님들은 문 닫을 위기의 수도원을 푸르게 푸르게 재건시키지요. 뉴욕과 가까운 거리라서 콩이며 고추 등 유기농법으로 키운 채소 공급도 하는 수도원인데요.

그 일을 통해 아름다운 인연의 고리를 거듭 생각했습니다. 어려울 적에 우리가 받은 은혜를 훗날 이렇게 되갚았구나 싶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네요.


캠프시설이 잘 된 숲 사이에 너른 호수를 끼고 있으며 농사처에서는 콩이며 고추 등 유기농법으로 키운 채소를 가까운 거리의 교민들에게 공급도 하고 있는 수도원인데요. 특히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이 명성 높은 그곳. 미 동부지역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수도자들이 정성 들여 가꾼 크리스마스트리를 구입하러 뉴튼수도원을 찾는데요.

십 년째 12월 첫 주말부터 트리 판매가 시작되는데 가장 선호하는 나무는 우리의 구상나무라고 해요. 다 같은 트리 같지만 어느 건 향기가 좋은 나무, 어느 건 푸른 잎이 오래가는 나무가 따로 있다더군요.


                              ***

동족상쟁의 비극인 한국전, 그 육이오로 무고한 백성 150만이 죽어갔으며 무수한 이산가족의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슬픔으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전쟁의 와중,

일사후퇴 당시였어요. 쉰들러 리스트의 천여 명이 훨씬 넘는 물경 1만 4천여 생명을 살린 기적의 배, 혹시 들어보셨나요? 혹한의 겨울바다에 뛰어든 피난민태우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보여준 화물선 한 척이 있었더랍니다.


남으로 밀리기만 하던 한국전이 역전돼 서울 수복 후 북으로 치고 올라가 중공군이 개입하는데요.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인해전술에 말려 북녘 끝 장진호 전투에 패한 유엔군은 철수 명령에 따라 눈보라 치는 한겨울 흥남에서 대규모 철수작전을 폅니다.


이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두로 밀려들었지요. 공산주의 체제에 몸서리치던 북한 동포들이었습니다. 선창을 따라 빽빽하게 운집해 있는 피난민들은 저마다 배를 타려고 아우성쳤습니다. 바로 시오리 남짓, 아군 방어선을 바짝 죄어오며 북한군과 중공군이 해일처럼 밀고 내려오는 중이었답니다.


피아간에 쏘아대는 대포 소리, 기총 사격 소리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으며, 등 너머 흥남 시가지는 이미 포화와 포연으로 자욱한 게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지요.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흘러간 옛 가요 속의 흥남 부두에서는 십만에 가까운 피난민이 삶의 터 뒤로하고 자유를 찾아 무작정 수송선에 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남부여대, 피난 보따리를 저마다 이고 지고 달구지에 끌고 오는 그들 입성인들 변변할 리 있겠어요. 12월 모진 해풍에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오직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는 배에 올라타고자 바다로 뛰어들더랍니다. 자유의 땅,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하여....



그때 그들을 태운 한 화물선이 있었습니다.

1950년 12월 23일 레너드 P. 라루라는 이름의 37세 선장은 한국의 흥남 부두에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해외 군사시설에 보급품과 장비를 수송하는 1만 톤 급 화물선이었답니다.


빅토리호는 가으내 인천 부산 일본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지요. 12월 중순이 지난 어느 날, 도쿄에서 화물을 싣고 목적지인 흥남으로 향했습니다. 화물은 연포 공항에 있는 해병대 항공단에 보급할 10만 톤의 제트연료였습니다. 그러나 해병대는 후퇴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부산에다 연료를 하역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겁니다.


부산으로 가서 하역작업 중 철수 작전을 돕기 위해 즉시 흥남으로 올라오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졌습니다. 12월 20일 저녁 흥남에 도착한 메러디스 호에 미 육군 제10군단 죤 H. 차일즈 대령이 승선했습니다. 그는 러니 선장에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피난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만 피난민 얼마라도 구할 수 없겠는가를 물어왔답니다.

선장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피난민을 태우겠습니다”



총부리를 겨누고 뒤쫓는 공산정권을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지는 끝도 없는 피난민의 행렬. 오직 생존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수많은 피난민들이 운집해 있는 부두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 흥남 시가지는 이미 화염에 싸여 벌갰습니다.


승선 작업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시작돼 밤을 새우고도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됐답니다. 드디어 배에는 한 치의 공간도 없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14.000명 승선에 부상자 열일곱 명 만삭의 임산부 다섯 명.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승선해 있었습니다. 그만한 공간이 있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있었습니다.


화물선으로 건조된 그 배는 그 많은 숫자의 피난민을 수용할 아무런 시설도 갖춰있질 않았답니다. 12명의 상급 선원과 승무원 35명을 태울 수 있도록 설계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배 안에는 여분의 구명보트도 구명구도 없었습니다. 물과 음식물도 없을뿐더러 화장실도 의사도 통역관도 없었답니다.


연근해 10킬로미터 안에는 기뢰가 거미줄처럼 매설되어 있는데 기뢰 탐지 장비도 없었습니다. 적의 잠수정은 그 수역에서 계속 활동 중이었고 그 어떤 적의 공격이든 대항할 수단은 전무했답니다. 일단 항구를 떠나면 철저한 보안 때문에 무선통신을 할 수 없는 상태. 다만 혼자 공해상을 헤쳐나가야 했는데, 따르는 호위함도 물론 없었습니다. 게다가 배에는 아직도 300톤의 제트연료가 실려있어 여차하면 대형화재사고가 발생할 소지도 충분했습니다.


승무원들로서는 죽음의 공포와 이웃한 항해였겠지요, 피난민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함께하는 3일간의 항해였을 테구요. 그러나 아무런 사고 없이 무탈했던 3일간의 기적 같은 항해. 모든 논리의 법칙으로 볼 때 인명 손실이 엄청날 수 있는 조건임에도 한 명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기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배 안에서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당시 상급 선원이었던 뉴욕 주 변호사 러니씨는 그때 한국인으로부터 받은 깊은 감명을 이렇게 전합니다. ”힘든 상황의 연속 속에서도 피난민들은 놀랄 만치 침착하게 대처했으며 조용히 인내했습니다. 위대한 해상구조의 중요한 역할자는 피난민 자신들로, 자유에의 갈망을 불굴의 투지로 이뤄낸 것입니다."


처음으로 빅토리 호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찰스 리갈 기자는 한 칼럼에 이렇게 썼습니다. ”역사상 어떤 화물선도 이처럼 많은 사람을 태운 적이 없으며 어떤 배도 이렇게 대단한 화물을 실은 적이 없다”라고.

한 척의 배가 이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구조작전으로 전대미문의 세계기록을 세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상선 사관학교 내의 미국 상선 박물관에는 <용감한 배>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답니다.


2004년 영국 기네스북 본부로부터 인증된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세계 기록을 세운 빅토리 호.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만 사천 여명을 죽음에서 건져낸 라루 선장,

그는 1954년 세속을 떠나 뉴저지 주 뉴튼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바오로 뉴튼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흥남에서의 기억이 절대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신앙심 깊은 그를 수도원으로 인도한 여러 요소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겁니다. 마리너스 수사에게 어떤 이가 질문을 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피난민들을 구하겠다는 운명적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성경 구절을 들려주었다 합니다. “이웃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는 이후 2001년 10월 선종할 때까지 46년 한결같이 한자리에 머물며 마리너스 수사라는 수도명으로 순명 청빈의 수도자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일하면서 기도하라’는 수도회 정신대로 그는 구상나무가 푸르게 자라는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을 가꾸었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수도원 내 성물 판매점을 돌보며 아주 조용히 살았답니다.


위 내용은 워싱턴 포스트 기자인 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란 책에서 부분 발췌했고요.

그 책을 뉴튼 수도원에 갔다가 사 왔는데 친구 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교민 2세인 그녀는 예일을 졸업하고 그 후 한국전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기에 참고 자료의 하나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요.


오묘한 하늘의 섭리인가요 인연의 귀결인가요, 수많은 북한 피난민을 사지에서 구해낸 라루 선장이 은거하던 수도원. 이

수도원은 그간 캠프장, 피정의 집을 운영했으며 인근 미국인들에게는 세인트 폴 성당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수도원 부속고등학교도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70년대 중반부터 26년 동안 수도원을 이끌어 갈 단 한 명의 수사도 배출하지 못했다네요. 현대사회 어느 곳이나 비슷한 현상이듯 성소자 감소로 폐쇄 단계에 처해있었던 거지요.


해서 문 닫을 위기에 처하자 베네딕도연합회를 통해 2001년 왜관수도원에 운영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왜관 분도수도원의 신부님 몇몇 분이 현지답사 차 뉴튼 수도원에 닿은 건 2000년 봄.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었던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에서 온 수사들로 해서 이듬해 안심하고 눈을 감습니다. 2001년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마리너스 수사가 머물던 수도원은 뜻밖에도 왜관 분도수도원에서 위탁운영을 맡게 되며 문을 닫으려던 수도원은 현재 한국인 수사들로 하여 활기차게 부활해가고 있습니다. 오래전 흥남에서의 은공에 대해, 형태를 달리 한 한국인의 아름다운 보은이라 할까요.



수도원을 여러 차례 다녀오고 난 다음 한국에 서는 일부러 짬을 내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도 찾아보았지요. 육이오 당시 아직 유아였으니 직접 전쟁의 고통을 겪진 않았다 해도, 한국인이라면 어찌 그 전쟁의 참상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즘같이 북핵 위기로 전전긍긍하는 상황에 더해 이상한 세력이 멋대로 설치는 판국이라 참으로 교민들 억장이 미어지는데요. 조만간 어떤 결말이 나고야 말 것같이 두려운 정국이라 살얼음장 위를 걷는 기분인데, 막상 현지에서는 핵이나 안보 불감증에 빠져있다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흥남철수 당시 앨몬드 미 육군 10군단 사령관의 부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은 철수 상황에 대하여 이같이 증언하였는데요.

“우리는 흥남 해안으로부터 군 병력과 피난민 모두를, 즉 미국인들과 적국인 북한의 많은 남녀노소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때, 어느 누구도 피난민들의 국적이나 정치 성향을 문제 삼지 않았고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죄 없는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오직 구출해야 할 생명들이었을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 불쌍한 사람들을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요. 맞는 말이지요.


각설하고, 스필버그 그가 유대인이었기에 만들 수 있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납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만한 수준에 이른 한국 영화계입니다. 미국에서는 기적의 배에 관해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오래전에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기적의 배, 용감한 배의 주인공 마리너스 수사의 삶을 스필버그처럼 세상에 널리 알릴 감독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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