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딧물이 선생

부산 살 때 일이다.

아파트 단지를 빙 둘러 사철나무 생울타리가 가지런히 서있었다.

비교적 춥지 않은 지역이지만 유난히 겨울이 길었던 어느 해.

단지 내 사철나무 잎들이 허옇게 병들어갔다.

응달진 쪽도 그렇고, 가지가 성근 곳보다는 빡빡한 곳에 증세가 더 심해 나무가 영 수척해 보였다.

잎이 말리고 이상스레 기형이 되는 오갈병이라며 관리실 아저씨는 봄 되어 새잎이 올라오면 괜찮아질 거라 했다.

날씨가 풀려 남도에서부터 화신이 올라오자, 시난고난하던 사철나무도 새순을 움쑥 키우며 정말로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봄이 깊어질수록 윤기로운 잎잎들은 더욱 무성해지면서 사철나무는 몰라보게 건강해졌다.

오갈병에 걸렸던 아랫녘 잎들은 누렇게 변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뉴저지 집 근처 공원에 수형이 멋진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해마다 여름 내내 진분홍꽃을 환하게 피워 나무 전체가 커다란 꽃뭉치 같았다.

여름철은 늘 습하고 무더웠지만 그해는 유독 비가 잦아 일조량조차 부족했다.

멀리서 봐도 나뭇잎이 희끗희끗하니 배롱나무는 핼쑥한 채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통풍이 순조롭지 않아 잎새마다 곰팡이가 번지면서 생기는 백분병이 들어 고전 중이었다.

잎의 앞뒷면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마른버짐 번지듯 희뿌연 반점이 생겨나는 병을 배롱나무는 앓고 있었던 것.

그해엔 텃밭 호박잎도 고춧잎도 백분병 박테리아에 걸려드는 바람에 식탁에 오를 수 없었다.

만일 적당한 햇빛에다 습기가 알맞았다면 그들은  여름 내내 왕성한 에너지로 짙푸르게 생의 찬가를 불렀으련만.

지난해 행복한 농사꾼을 만들어줬던 뒤란 텃밭의 올해 작황은 형편없이 되고 말았다.

밥 달라고 보채는 강아지와 고양이는 다리가 아파 절절매더라도 먹이를 챙겨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띄지도 않거니와 말없이 조용한 식물들은 까무룩 잊힌 존재들로 내쳐졌다.

평생 병치레하지 않던 사람이 느닷없이 발병이 나니 솔직히 내 몸 통증에만 신경 쓰이지 그 밖의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픈 기간 동안 딱 나흘 물을 주지 못했는데 텃밭 채소들은 거지반 바스러질 듯이 말라 시든 상태였다.

불볕 내리쬐는 사막 기후대에 방치되다시피 하자 여린 식물로서는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던 것.

그나마 담 아래 그늘이 드는 쪽으로 자리 잡았던 상추는 목숨줄 겨우 부지하고 있어, 물을 흠뻑 주자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 나갔다.

로스구이를 해놓고 쌈 거리를 뜯으러 텃밭에 나갔다가 상추 잎새에 붙은 수많은 진딧물에 질겁을 했다.

연한 속대일수록 먼지 같은 진딧물이 숫제 확 번져있었다.

작년에는 앞뜰 장미 봉오리에서나 봤을 뿐 텃밭에선 진딧물이라고는 구경도 못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진딧물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 찾아보니 고온건조한 날씨에 식물의 뿌리 생육이 안 좋으면 기승을 부린다고 나와있다.

기후나 환경이 좋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야채마다 타들어가는 심한 갈증으로 시난고난하는 중에 사단이 벌어진 듯했다.

겨우겨우 기사회생되는 과정에서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약한 체력이라 진딧물이 꼬인 게 아닌가 싶었다.

외부의 적은 항상 가장 취약한 장소, 만만하니 허점이 보이는 여리고 연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오게 마련이다.

인체에 병이 생기는 이유도 건강을 잃을만한 여건이 형성된 상태일 때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등이 활개를 치며 증식이 될터다.

생활습관이건, 영양결핍이건, 스트레스건, 과로건, 노쇠로 인해서건, 면역력이 저하되며 적에게 최적의 유리한 기회를 제공했을 때 우리는 질병의 포로가 되고 만다.

작년처럼 채소들이 원기왕성할 때야 진딧물도 얼씬대지 못했다.

가뭄으로 목이 타 비실거리는 틈을 잽싸게 파고들어 진딧물이 터를 잡았듯이.

나무도 그렇고 채소도 그렇고 사람도 마찬가지로 건강을 잃는 것은 내외 조건이 허술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