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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4. 2024

안개비 젖어드는 사려니 숲

아침나절 굵은 빗발 제법 세찼다.  

정오 무렵이 되자 서귀포 시내는 비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한라산 올려다보니 안개비 자욱이 가려져 있었다.

이런 날씨야말로 사려니 숲에 가기 딱 좋은 날.

세차게 내리는 비속이라면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산중 숲에는 안개비 운무처럼 어렸을 테니까.

231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흔들거리다가 남조로 사려니숲길 앞에서 하차했다.

지난가을에는 붉은오름 휴양림으로 들어가서 이쪽으로 나왔는데, 오늘은 우중이라 아주 짧은 코스만 걷기로 했다.

인간 심리는 엇비슷한 듯 비 오는 날씨임에도 의외로 많은 이들이 찾아와 사려니 숲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빗줄기로 맑게 세례 받은 숲의 청량감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어서 이리라.

빼곡하게 우거진 삼나무 향 그윽해, 단기 여행자들도 두 시간 정도의 트래킹 코스로 즐겨 는 숲이다.

나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산하는 피톤치드나 테르펜 같은 방향 성분은 살균·살충효과가 있어 산림테라피도 된다.

삼나무뿐만 아니라 신록 푸르른 서어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 졸참나무, 단풍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고 있는 사려니숲.

사려니 숲길은 200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 보전지역(Biosphere Reserve)이기도 하다.

치유와 명상의 공간 사려니 숲 의미는‘신성한 ’을 이르며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도록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라는 뜻도 있다고.

처음부터 이름 자체의 어감이 좋아 왠지 사색, 고요, 배려, 조신하게,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해 마음 끌렸던 이곳.

숲길 양 가에 수북하게 심어진 산수국 마악 물빛 꽃잎 피어나고 있었다.

빗물 흠씬 젖어 검실한 삼나무 기둥은 평소보다 한층 기상 올연하면서도 성정 강직해 보였다.

실제로 사려니 숲에 들면 일렬로 쭉 뻗은 삼나무들로, 삿된 기운 절로 정렬하게 가라앉으며 은연중 심신이 맑혀진다.  

굳이 가부좌 틀지 않아도 안개 더불어 숲길 걷는 동안 자연스레 이어지는 명상과 사색이 도반 되어 따랐다.  

청신한 숲 향기에 해맑은 새소리 그리고 부드러이 젖어드는 안개비의 감촉 느끼며 사각사각 화산송이 길 걷는 이 순간.

그간 뜻밖의 은혜로운 시간 이렇듯 무량이 누렸으니 정녕 여한 없는 충만한 생을 살았구나 싶어져 고개 숙여졌다.  

쌓은 공덕에 비해 받은 축복의 무게 무거우므로 무게감 줄이고 떠나가도록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한 나누고 돕고....

삼나무 숲을 거쳐 미로 숲길 빠져나오자 하늘이 트이며 신록 숲 가지런하게 이어졌다.

긴 오솔길 따라서 천천히 걸으며 숲 내음 흠향했으니 물찻오름 입구쯤에서 이만 돌아서기로 했다.

그즈음부터 빗발 성성해졌기 때문이다.

숲 보호를 위해 자연휴식년제로 물찻오름은 올 연말까지 탐방을 제한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인근에 솟은 물영아리오름은 이미 다녀왔고 물찻오름도 해 바뀌면 오를 수 있겠다.


그때도 우중산책을 해볼까나. 2023


*올해도 탐방 제한, 대신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한시적으로 개방되는 물찻오름 탐방 프로그램에 대기 예약자로 등록.... 모쪼록 기회가 주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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