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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2. 2024

오마르와 홀로코스트

랭커스터 살 적에 가까운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시골 도서관이라 한글책은 없지만 한 번씩 간 이유가 있다, 소설을 읽고 싶으나 영어만 빡빡한 책이야 소화능력이 없으니 그림의 떡.

수준에 맞게 어린이 도서 쪽을 기웃대다가 주로 화집을 빌려오곤 한다. 이번엔 상 하 두 권이다. 상편은 양대 세계대전을 담은 흑백 사진집이고 하편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사진집이다.


의자에 앉을 새도 없이 마루에 걸터앉은 채 정신없이 그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 안네의 일기,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의 영화로 수차 접한 홀로코스트인데도 상당히 몰입하게 만드는 사진들이다.


첫 페이지는 '유대인의 기원'으로 시작되며 중간중간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들어있고 마지막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우기'로 마감된다. 끝 페이지에는 베네딕토 16세가 2006년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사진이 실려있다. 톨릭 교회가 유대인 학살에 침묵한 과거사를 속죄하며 고개를 숙인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배경은 수용소 정문으로 이 문을 통해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 나간 수감자들이 하루 12시간씩 일을 해야만 했다.


 

인류역사상 인간임이 가장 수치스러이 느껴지는 단어 하나가 홀로코스트라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자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되는 비극.


비극은 세계대전이 터진 시점에서부터 잉태된다. 1차 대전 전후 독일에 나치즘이 움트게 된 배경, 2차 대전 발발과 게토, 죽음의 캠프, 아우슈비츠의 참상...세계대전은 유럽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오랜 전화로 몸과 마음은 물론 도시나 농촌 어디든 극도로 피폐해진 유럽 곳곳의 표정들.


끊어진 다리 사이로 멀리 보이는 사원의 첨탑 인근에 자욱하게 이는 포연. 드넓은 해양 한가운데서 적의 어뢰 공격을 받고 서서히 침몰해 가는 전함. 프랑스의 어느 평화로운 전원에 폭격으로 부서진 채 방치된 탱크의 육중한 몸체와 벗겨진 캐터필드. 전쟁터로 나가는 아빠를 전송하며 성조기 든 손을 흔드는 아기에게 애절한 키스를 보내는 미국병사. 매서운 혹한에 시달리며 동상으로 얼어터진 발을 이끌고 퇴각하는 일단의 패잔병들.


한 농가 짚더미 속에는 헐벗은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젊은이, 숨어있는 낙오병 같다. 비행기에서 공중 낙하한 낙하산 부대원이 나뭇가지에 걸린 채로 처참하게 죽어간다.

즉결처형을 당한 듯 더러는 눈을 가리고 기둥에 묶인 채로 죽은 사람, 또는 양손을 뒤로 포박당한 채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구겨박질러진 시체더미들. 단지 적대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포로가 되어 집단 처형장에 매달린 채로 죽음 앞에 던져진 사람들, 그 극단의 공포감에 이미 초주검 상태인 적나라한 표정들이 섬뜩하다. 폭격으로 무너진 동구 어느 거리를 배회하는 굶주린 어린이의 퀭한 눈은 유럽의 풍경이라기보다 6.25 때의 한국 실상 같기만 하여 시선이 한참 못박혔다.


이어지는 게토와  아우슈비츠의 참상이 담긴 사진들. 유대인들을 지정된 일정 구역으로 강제이주시켜 거주하도록 하였다. 게토 내에서의 기아와 열악한 환경으로 질병 특히 장티푸스 때문에 거주자의 반 이상이 죽는다. 아이들과 노인들, 건강을 잃은 환자는 쓸모없다고 제일 첫 번째 제거대상이 된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을 외치던 광기 어린 나치 치하.  독일인의 골격인가를 가리기 위한 얼굴재기, 영화 25시를 떠올리게 하는 프로필을 재는 사진도 있다.


 “너희들에게 출구는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라고 외치는 나치병사의 냉혹한 표정. 가스실에 들어가 처형되기 전에 모아놓은 안경과 구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캠프에 들어오자마자 잘린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독일 군수공장에서는 매트리스와 천 등을 제조해 군에  공급했다. 아우슈비츠 지하 감옥 중에서도 18호실은 특별한 곳으로 배고파 죽도록(餓死) 선고를 받은 죄수를 수감하던 곳. 다른 사람을 대신해 여기서 죽은 폴란드인 막시밀리안 콜베 Maksymilian Kolbe 신부는 스스로 생명포기하며 사랑을 실천한다.


샤워를 한다는 말에 속아서 샤워실처럼 보이는 방으로 걸어 들어가면, 천장에는 물이 나오는 샤워기가 달려있다. 철커덕! 문이 닫힘과 동시에 천장을 통해 사이클론 비(Cyklon B)라는 가스가 투입돼 사람들은 15분 내에 질식사를 당한다. 사체에서 뽑아낸 금이빨은 녹여서 막대모양으로 만들어 위생국에 보내졌고 화장시킨 재는 비료로 사용되었다. 무자비한 강제 노역 및 집단 학살, 끔찍한 생체 의학실험과 종족 말살정책 등등을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가

자행했던 것.


홀로코스트의 어원은 그리스어 'holokauston'(완전히 holos + 불태움 kaustos)로 신에게 번제를 바치는 것을

의미하며 대량 학살을 뜻한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의한 범죄로 파악한다. 이른바 집단광기다.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나, 실은 홀로코스트의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다.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 깊은 것이었고 비단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던 존재했는데 다만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 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뿐이라고. 인간이 인간을 이토록 잔혹하게 학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이것을 ‘증오’에서 찾고 있다.

게르만 족과 유태인 사이의 증오, 그 증오를 이용한 희대의 최면술가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에게 증오라는 올가미로 집단최면을 걸었고 집단으로 미쳐 돌아갔다.


종전 후 나치는 무릎을 꿇었으나 하지만 그 증오에 더해 갈등의 벽은 두텁고 견고하게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기독교와 모슬렘, 힌두교와 마호메트교,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백인종과 흑인종, 남과 북, 동과 서…

증오와 폭력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상호 간의 증오심이 극에 달해 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은 나치즘 하의 독일인들과 전후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유사성에 대해 기술한 바가 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정도로 상대편을 소외시키며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촌에서 이 증오의 벽, 갈등의 골, 대립의 칼날은 언제쯤이나 사라질 것인지?



우연히 같은 시기에 아랍을 대표하는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의 팔레스타인 영화를 보았다. '오마르'는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오가면서 이중첩자가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는 청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시작된다.


팔레스타인 청년 '오마르'의 얼굴에선 망설임이 읽힌다. 뒤이어 보이는 높다란 장벽은 두 민족을 완강하게 편갈라놓는다. 팔레스타인에서 제빵사로 일하는 오마르는 이스라엘 여자친구 나디아를 만나기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위험한 콘크리트 장벽을 수시로 넘나 든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이스라엘 군부대를 습격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고,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잡히게 된다. 무지막지한 고문도 견뎌낸 그가 치열한 두뇌싸움과 회유와 협박에 굴복해 결국 는 '이중첩자'가 되는 조건으로 풀려나게 된다.


오마르는 우정과 사랑을 지키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나 이중첩자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물리적 장벽뿐만 아니라, 심리적 장벽으로 민족 간의 신뢰마저 무너져 가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때 선대들도 저 영화의 주인공과 유사하게 고도의 심리전에 말려들어 더러는 본의 아니게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도 싶었다.  


이 영화를 통해서도 거듭 느껴졌지만 지구상의 모든 전쟁, 분쟁, 갈등 양상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죄악의 뿌리다. 특히 전쟁은, 가장 소중한 인권이 마구 침탈당하며 가공할 살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미친 인간들의 짓거리이다. 이념, 사상, 신앙…그 무엇으로도 호도될 수 없는 전쟁의 패악, 전쟁은 광기일 따름이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 한 전우의 피를 보면 누구라도 이성을 잃고 돌아버린다고 한다.  원인과 결과에 따라 잘잘못을 따져 죄질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단죄하기 이전, 똑같은 상황이 우리 앞에 던져졌을 때 과연 우리는 그러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너나없이 내부에 그들과 같은 광기와 독기가 내재되어 있음을 부끄러이 인정하는 일로부터 홀로코스트와 모든 전쟁사적 고찰은 출발되고 접근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세계 곳곳의 전운.  아니  나라 안에서 조차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좌우 난타전이 안타깝기만 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결국 똑같은 악인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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