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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8. 2024

이상한 노릇

묘한 일이다.

참 이상하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책이란 걸 붙잡고 앉았으면, 그중에도 공부를 하겠다고 책을 펼치면

지름길로 달려오는 얄궂은 손님.  

예나 이제나 공부란 걸 할라치면 웬 잠이 그리 쏟아지는지.

솔솔 그리고 유난히 달콤하게.

 

못 말리는 증세 중의 하나인 그 현상은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똑같이 일어났다.

학생이던 예전에도 그랬는데 나이 든 지금도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찾아온다는 게 일면 희한하다.

소싯적, 시험기간이 발표되고 시험범위가 알려지면 나름 계획을 세워 시간표를 짜는 등 공부를 하고자

폼을 잡았다.

그러나 작정하고 책만 펴들었다 하면 없던 잠마저도 더 늘어나는 데다 달디단 잠이 어이 그리 밀려들던지.

지금도 똑같다.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볼 적엔 전혀 해롱대지 않고 초롱하던 눈이다.

공부랍시고 책장 몇 페이지 넘기는 사이 시물시물 감겨들다가 어느새 슬몃 잠 속으로....

신통할 정도의 그런 효능 만점인 수면제가 어디 또 있을까.

 

근데 공부라니 가로 늦게 뭔 공부?

말이 좋아 공부, 그것도 공부 측에 들기나 할까 모르겠지만 한동안 나름 공부란 걸 하게 됐다.

캘리포니아 입성을 자축하는 의미의 하나로 마련한 이벤트가 시민권 시험에 도전하기!

일단 지난 3월 11일 신청서를 써보냈다.

복수국적(절차는 약간 복잡하지만)이 허용되기도 하는 연치도 한몫 거들었다.

한국적을 갖는 데도 문제없다는데 그렇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신청서를 접수시킨지 겨우 한 달 남짓 후에 지문 날인도 마쳤다.

그 후 7월 1일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

 

이삿짐 정리하고 집 안팎 가꾸는 등의 소소한 일상사부터 새로운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기도 전.

한국에서 언니네 가족이 방문해 한 달여 머물며 서부여행 다니느라 늘 들떠 지내다 보니

시험 준비는 자연 뒷전.

그래도 짬짬이 이민국에서 나눠준 책자를 들여다보며 첨부된 CD를 수시로 틀어두었다.

원어민 발음 유념해가며 귀 기울여 들었다.

유튜브에 들어가 필요한 동영상을 여러 개 찾아 모아두고 반복 청취하면서

혼자 하는 셀프 스터디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트래킹으로 신나고 즐거웠던 유월도 이울어가고 날짜가 코앞으로 바짝 다가들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과연 한 번에 해낼 수 있을까.

괜히 망신살이나 뻗치는 거 아냐.

 

그럭저럭 인터뷰 날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테스트 문제야 무조건 달달 외우면 해결되나 인터뷰 시에 그대로 들통날 회화 실력은 어쩔 것이며

형편없이 뒤지는 받아쓰기는 잠깐만에 보충해서 될 바도 아닌데 이를 어쩐담.

그렇다고 이제 와서 회피할 수도 없는 일, 정면으로 맞서보는 수밖에.

딸내미는 한번 연습 삼아 친다 생각하면 되지 그딴 일로 스트레스받지 말란다.

하지만 일단 시험이란 단어 자체가 왕 스트레스 아닌가. 

한 삼일 작심하고 정신을 다잡아 공부에 몰입해 보기로 했다.

헌데 웬걸, 예상 밖의 복병이 이때 나타났으니 바로 잠이란 웬수였다.

책만 펴들었다 하면 사정없이 눈치없이 주책없이 쏟아지는 잠.

하긴 포탄이 작렬하는 전쟁터, 행군 중인 병사들에게도 잠이란 마각은 피할 재간이 없다 하거늘.

며칠 수마와 싸우느라(고시 공부도 아니면서~ㅎ) 꽤나 수고로웠다.

 

인터뷰 전날 준비물을 단디 챙겨두고 총정리를 해보니 어느 정도 자신감(근거없는)이 들기는 했다.

예약된 시각은 오후 1시, 너무 일찍 나선 바람에 시간이 일러 시청 주변 어슬렁거리며 시내 구경도 했다.

30분 전 시험 장소로 들어가 차례를 기다렸는데 어인 일인지 근 두 시간이 지체되고 나서야 호명.

약 십오분여에 걸친 인터뷰를 치렀다. 

은발의 중후한 노년 시험관은 입실하자마자 곧바로 진실만을 말한다는 서약을 하게 하고는

이어서 속사포같이 쏟아대는 질문들에 숨 가쁘게 답변을...

의외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마음이 편안히 가라앉으며 별로 긴장되지 않았기에

차분하게 임할 수 있었던 점 하늘에 감사!

최소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 창피를 모면하기 위해 은근 애쓴 보람이 있었던가.

인터뷰에 무난히 패스하였다.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그 자리에서 7월 11일 선서 날도 잡혔다.

보잘것없는 이 실력 가지고도 가능했으니 누구든 가능, 맘만 먹으면 해낼 수 있는 도전이겠다.

보통은 신청에서 선서식까지 반년 이상 걸린다는데 내 경우 초고속,

딱 4개월 만에 모든 절차가 성공적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보잘것없는 이 실력 가지고도 가능했으니 누구든 맘만 먹으면 가능,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도전이겠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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