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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2. 2024

생의 여로에서

아침 미사를 마친 다음 기도회가 열리는 감실로 들어갔다. 맨 앞자리에 낯선 누군가가 진작부터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드리는 중이었다. 숱 많은 새카만 머리를 하나로 묶어 틀어 올린 뒷모습으로 미루어 아직 젊은 여인 같았다. 지척거리인 바로 눈앞의 좌석이라 자연 시선이 가닿았고 처음엔 예사로 보았는데 가만 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도 안 들리고 어깨 들썩임도 없었지만 그녀는 줄곧 울고 있었던 거였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듯 오른 손등으로 자주 턱밑을 훑어냈다.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면서도 신경이 자꾸만 그녀에게 쏠렸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덩달아 내 가슴까지 아릿하고도 먹먹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열두 시간을 그린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였다.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아들을 바라보며 차마 흐느끼지도 못하고 말없이 눈물만 짓던 마리아 모습이 순간 오버랩되었다. 심곡 얼마나 절절하기에, 고통 얼마나 아프길래 소리 죽이고 저리 울고 있는 것일까. 애간장 타듯 가슴 쥐어뜯어가며 절규하는 울음보다, 땅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통곡보다, 더 애절토록 설운 슬픔이 전해지는 그녀의 눈물.

마지막 의지처 하늘에 빌어도 소용없는, 회개만으로 부족할 정도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부모님 상이라도 당한 걸까, 자녀가 많이 아프기라도 한 걸까. 본인에게 모진 병고라도 덮친 걸까. 가슴 아린 이별이라도 한 걸까.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당한 걸까. 가까운 이가 죄를 범해 수형생활이라도 하는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 걸까. 남편이 심하게 바람을 피운 걸까. 파산을 해 당장 생활이 막막해진 걸까. 빠져나올 수 없는 극한상황까지 밀려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절벽 앞에 선 걸까. 인간적 안간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부딪힌 걸까.

그분 바라보며 뼈에 사무치는 서글픔으로 하염없이 눈물짓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자니 벼라별 생각이 다 맴돌았다. 어떤 불행이, 어떤 절망이, 어떤 고뇌가 저 여인을 덮쳤는지 헤아릴 길 없으나 나까지 자못 비감스러웠다. 연세 적잖이 드신 노인네 눈물도 애처롭겠지만 젊은 여인이 흘리는 눈물은 안쓰럽다 못해 처연했다. 미쳐버릴 듯 힘들고 괴로울 때 속내 활짝 열어젖히고 낱낱이, 눈빛으로 하소연하며 눈물지으면 등 토닥토닥 위로해 주실 분은 십자가에 계시니.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기다리신다. 억장 미어지게 속상하고 억울하고 야속하고 기막힌 심사 다 풀어놓고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면 은총으로 우릴 구원해 주시려.


몇 해 전 시에라 거친 산길을 걷다가 문득, 우리네 삶 또한 거친 길 걷는 거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구불텅하게 뻗은 뿌리 드러낸 세쿼이아 고목의 반쪽은 앙상한 백골 상태였다. 나무 역시 만고풍상 맨몸으로 겪은 표티 역력했다. 생명 갖고 태어나는 모든 것, 삶이란 기나긴 여정을 걸어 나간다는 건 저마다 고해(苦海) 건너는 일. 괴로울 고, 바다 해, 인생은 괴로움이 가득한 바다와 같다는 말이겠다. 그렇듯 앞앞이 풀어놓을 수 없는 쓰라린 속사정 누군들 지니지 않았으랴. 삼십 대 후반에 이미 사추기를 겪으며 쓴 <주렴을 반쯤 열고>에 이런 글을 적었다.

'....예민한 듯 깡마른 채 자그마한 서른여덟의 여자. 그러나 고요 속의 격동, 안식 속의 변화를 꿈꾸는 여자. 루이제 린저의 니나를 사랑하고 서머셋 모옴의 스트릭랜드를 지독히 사모하는 모순투성이. 

아아, 나는 누구인가. 곧잘 자기류에 빠져 우쭐대다가 자가당착에 걸려드는 나는 누구인가. 고통과 슬픔과 절망이 핏빛 응어리로 가슴에 침전됨을 한(恨)이라 이른다. 하긴 정이 깊어야 한도 깊은 법. 내게도 연연한 정한에 뼈아픈 통한이 서렸는가 하면 초승달 같은 시린 원한도 한두 자락 깔렸으며 두고두고 사무치는 회한인들 어이없을까.

사는 일이 문득 힘겹다 여겨질 때가 있다. 목에 찬 슬픔을 쏟아붓고 싶을 때가 있다.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허허함에 왠지 모를 허기를 느낄 때가 있다. 수없이 옭아매는 제약에 발목 잡혀 질식할 듯 숨 막힐 때가 있다. 하여 바람이고 싶고 구름이고 싶으며 얼레 벗어난 연이고 싶으며 새처럼 날고 싶은.

"태산준령 험한 고개 칡넝쿨 엉클어진 가시덤불 헤치고...." 끈끈이 감겨오다 자지러지는 가락. 구슬픈듯하면서도 은근슬쩍 천연스러운 엇모리장단에 낭창거리면서 굽이치는 특유의 가락. 조였다 푸는 숨 가쁜 장단만으로도 구성진, 그러나 한을 토해내듯 한 정선 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 사설처럼 기나긴 인생사 써내리노라면 겉으론 웃고 있어도 한숨지으며 속울음 우는 경우 어디 한두 번일까.'

희로애락 교차되는 굽이굽이 한도 많은 인생길, 홀로 가슴앓이하며 삭혀야 하는 아픔 하 많아 어찌 다 헤아릴 수나 있던가. ​누군들 인생 노정이 언제나 꽃길만이랴. 향기로운 숲 오솔길만 이어지랴. 탄탄대로 잘 닦인 페이브먼트만 걸으랴.


가도 가도 그늘 한점 없이 황막한 사막길, 모난 자갈 투성이길, 인적 없어 괴괴한 외딴길도 있다. 경사 급해 숨찬 길, 거칠게 할퀴어대는 가시밭길, 진저리 나도록 지루한 길, 아슬아슬 오금 저린 벼랑길, 질척대며 빠지는 뻘밭 길도 기다린다. 정신없이 추락하는 내리막길, 지척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길, 갈등 속에 선택해야 하는 양 갈래길 만인가. 모래바람 후려치는 사막길, 해풍 무섭게 몰아대는 방파제 길도 살다 보면 한 번씩 걷게 된다.

한참 전 비숍에서 꽤 오래 산길을 걸었다. 풀숲 사이로 이어진 조붓한 산길, 평평한 황톳길도 있었고 거친 바윗길도 가파른 층계길도 있었다. 야생화 하늘거리는 숲길도 걸었고 소나무 그늘진 길도 걸었으며 이글거리는 땡볕에 정수리 따가운 길 걷기도 했다. 더러는 계류에 걸쳐진 외나무다리도 건너야 했고 조심조심 징검다리도 건너뛰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여정은 뜻깊은 순례길 혹은 천상병 시인이 노래한 소풍길 될 수도 있으나 거의가 고통 바다 건너기다.


그같이 험하고 거친 고해 허우적대며 환난에 휘둘리노라면 고통 끔찍해 되도록 그로부터 멀리 달아나 피하고 싶어 진다. 고통은 누구라도 아프고 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의 질병, 죽음, 궁핍, 좌절, 갈등, 실패, 이별 등의 이유로 우리는 종종 고통의 심연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마음과는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미워하는 사람이나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들과 맞부딪치는 일도 고역이다. 구하고자 하지만 적게 얻거나 전혀 얻지 못하면 그 또한 괴롭다.

달달한 무언가를 보고 듣고 또는 맛이나 촉감과 내음과 느낌에 혹해서, 자기 의지와는 달리 스스로도 통제 안 되는 육신이란 허깨비가 동물적으로 추구하는 갈망 자체도 고통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체개고(一切皆苦), 고통을 강조하는 불교는 그래서 부정적 감정인 염세와 허무의 종교 같으나 기실은 삶을 기만하는 온갖 신기루들을 걷어내고 실상을 바로 보자는 얘기다. "이 세상 모든 고통에는 해결점이 있거나 없다. 있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없다면 신경 쓰지 마라.”  금언은 고통과 관련된 말 중에 각별히 새겨둘 만하다.

하긴, 머리에 꽃 꽂고 다니는 실없는 사람이나 백치가 아닌 다음에야 날마다 희희낙락거리며 즐겁기만 한 인생이 과연 있던가. 왕후장상으로 태어난들 평생 부귀영화 누리면서 일 년 365일 날마다 봄볕 포시라이 내려앉는 행복한 삶만 살겠나. 하늘도 화창한 날 있으면 흐린 날 있고 장대비 후려치다가도 시침 뚝 떼고 해맑게 갠다. 양지가 있으면 응달진 곳도 있으며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기다린다. 산다는 건 견딘다는 것이라 하였다. 풀길 없는 갈등, 끝 모를 수난 견뎌내지 못하고 지쳐 포기하거나 쓰러져 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승리하리니. 모진 시련 또한 결국은 지나가고 말리니.

매화는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야만 꽃과 향이 맑다고 하였다. 연단은 우리를 정결케하여 영광이라는 눈부신 축복을 그 뒤에 예비해 두었음을 나는 믿는다. 어떤 특별한 이유 없이 고통이나 재난이 닥쳐왔을 때 전생의 카르마와 연결 짓거나 인연법에 대입시켜 위무하게도 된다. 이젠 그녀도 눈물 거두고 욥처럼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라고 담담히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더 나이 들면 그런 날 자연히 맞게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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