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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5. 2024

육이오 전장에서 산화한 무명의 넋들

부산 간 김에 이것저것 볼일을 마치고 나도 해가 긴 유월이라  여전히 한낮, 날씨는 청명했다. 기왕 나선 걸음이니  태종대나 가보자, 담박 행로를 정했다. 지난해 여름 태종대 갔다가 의외의 정경을 만났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으슥한 송림 사이에서 본 바 있는, 한국동란 때 스러져 간 영령들의 추모비였다. 아아, 잊으랴! 바로 비극의 그날인 육이오 73주년을 맞은 오늘이다.



6·25 참전 영도 유격부대 유적지 비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다. 한국전이 치열하던 당시 부산 영도에 본부를 둔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출신 반공 청년 천이백 여 명은 생명 건 유격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한 극동군사령부의 지휘 아래 북한 땅에 공중 침투하거나 해상으로 침투하여 적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군사 정보를 수집했다. 특수임무인 첩보 수집, 후방 교란 등을 주로 수행한 유격부대인 켈로부대. 목숨 바쳐 유격전을 전개하다 산화한 491명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존 대원들이 뜻을 모아 1984년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더운 날씨였으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해풍은 시원했다. 참기름을 바른 듯 잎새마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동백나무 쥐똥나무며 곰솔과 해송이 마가목 흰꽃과 어우러진 숲. 칡덩굴 게덩굴 등덩굴도 무성히 얼크러설크러 졌다. 숲향기 밀밀한 산책로를 따라 자살바위 전망대 모자상을 거쳐 영도등대로 내려갔다. 거칠 거 없이 마구잡이로 달겨드는 거친 바람, 그러나 주전자섬이 마주 보이는 바다에 뜬 여러 척의 입항대기 컨테이너 선박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라 안팎이 여러모로 뒤숭숭한 시국이나 국제적으로 이뤄지는 경제활동은 무풍지대이듯 여전스레 활기찼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싶었고 일면 안도감이 들었다.



순환도로를 따라 태종대 정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가 기우는 듯 해 발걸음 날듯이 빨라졌다. 양팔 휘저으며 부지런히 걸었다. 일반 차량 운행이 통제된 대신 태종대공원을 도는 산뜻한 미니열차가 요소마다 정차하며 곁을 스쳤다. 가로에는 허투루 버린 쓰레기 하나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쓰레기 수거함이 비치돼 있는 등 전체 관리상태는 아주 좋았다. 태종사 들머리 못미처서 자연석에 새긴 유격부대 유적비 입구란 표지석을 만났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이 부대는 1· 4 후퇴 때 월남한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출신 반공청장년을 규합하여 임시포로수용소가 있던 서면에서 결성되었다. 대원선정의 기준은 가족이 없는 경우라야 했고 가족이 있더라도 부양 의무가 없는 남자라야 했다. 이듬해 영도로 자리를 옮겨 태종대에서 훈련받은 유격대원들. 당시의 태종대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구축해 놓은 해안포대와 부대시설이 남아 있는 데다 산림이 울창하여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장소였다. '동해지구 반공의병대' 혹은' 켈로(KLO) 부대' '파라슈트부대'라고도 불렸으며 주한 합동 고문단(JACK) 산하 미국 중앙정보부(CIA) 소속의 비밀첩보부대였다. 휴전협정 체결되자 부대는 해체되었다. 1200명의 대원 중 900여 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오석으로 된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대한의 젊은 영도 유격 부대원들은 보수나 대가 또한 바람 없이 다시 못 올 결의로 떠나던 날 태종대 이 소나무 저 바위 밑에 머리카락 손톱 잘라 묻어 놓고 하늘과 바다로 적 후방에 침투하여 숨은 공 세우다 못다 핀 젊음 적중에서 산화하니, 아아! 그 죽음 헛되지 않아 호국의 넋이 되어 국립묘지 합동 위령비에 모셨도다. 가신 동지들의 요람지 태종대 반공의 정기 어린 이곳을 못 잊어 작은 돌 하나 깎아 영도 유격 부대 유적지의 거룩한 자취를 남기노라.” 군번도 없이 일련번호만 부여받았던 그들은 북괴군에 맞서 초개같이 목숨 바쳐서 대한의 자유를 지켰다. 



적후방에 침투하여 현지 반공투사를 규합하고 적의 정세 탐지 및 적후방 교란 등 유격 작전을 수행하다 산화한 분들을 추모하는 조촐한 장소인 이곳. 무명용사비, 공수 낙하 및 해상 침투도, 유격 거점 배치 상황도, 해상 유격 작전도, 무선 통신 교신도를 살펴보는 동안 시간이 꽤 흘렀던가. 그새 해가 기웃해졌다. 영도 유격 부대 선열 추념비에 어룽지는 빛살 무늬가 그늘로 내렸다. 오석에 이름 새겨진 부대원 모두는 그 어머니에게는 하나같이 귀한 아들이었을 텐데. 얼룩무늬 군복처럼 보이는 나무 그림자가 심사 사뭇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 나라 지키고자 죽음 겁내지 않고 적과 싸우다 이름 없이 져버린 유격 부대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탑 앞에는 화환 꽃송이 싱싱했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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