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품에 의지해 남루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공동우물터에서 길게 줄 서서 우물물을 길어왔다.
펌푸가 생긴 건 그로부터 한참뒤로 그나마 환경정비해 살만한 동네로 변한 문화마을 벽화를 보자 자동으로 떠오른 육이오....
1931년생인 박완서선생이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썼다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해방 이후의 혼란기, 좌우익의 대립과 특히 세를 넓혀가던 남로당의 준동 그리고 남북간에 벌어진 전쟁이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을 해서 강의도 며칠 못 듣고 6월 25일을 맞고 말았다.
"인민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듣긴 했지만 전에도 38선에선 충돌이 잦았고 그때마다 국군이 잘 물리쳐왔기 때문에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다만 몇 발자국이라도 38선 이북에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장기전이 되려니 했다." 230 페이지.
"우리가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명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이는 마지막 268 페이지로 북진통일을 눈앞에 두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밀리며 다시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떨어졌을 때 상황이다.
박완서 씨 가족은 피난을 가지 못한 채 텅 빈 서울에 남겨져 '천지에 사람없음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장면에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