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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6. 2024

복천동 고분에서 가야문화의 정수를

부산 동래 전철역에서 하차 4번 출구로 나왔다.


폰으로 지도를 확인하고도 여러 사람에게 물어물어 드디어 복천 박물관에 이르렀다.

마침 <변한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부산 김해 인근에 근거지를 둔 삼한 중 변한국은 전에 살던 망미동에도 변진 독로국 자취가 토기 조각으로 남아있었기에 연회색 와질토기와 골각기들을 유정스레 둘러보았다.

맛 좋기로 소문난 옥샘(玉井)이 있던 곳, 복이 넘치는 샘물이 있어서 복천동이라는데 실제  동네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부락이다.

임자 없는 산간이나 심지어 산기슭 공동묘지 자리인들 마다할 형편 아니었던 피난민들은 한 칸짜리 하꼬방에서 올망졸망 그렇게 모둠살이를 했다.

여기에 복천박물관이 들어서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도시팽창으로 1969년 이곳 구릉지대에 새 주택단지를 만들고자 택지 공사를 벌이던 중 우연히 가야 시대 유물이 우르르 출토되며 여러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고대사의 공백기로 여겨진 가야사를 규명하는데 주요 실마리를 제공해 준 복천동 고분군의 실체가 우리 앞에 전모를 드러냈던 것.  

1981년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복천동 고분군은 사적 제273호로 지정 보존하게 됐는데, 무엇보다 일본 고고학계가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뒤집을 수 있는 다수의 자료가 여기서 확보되었다.

따라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기에 이른 것은 한참 뒤인 2010년의 일.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품을 면밀하게 탄소연대측정법에 의거해 검증한 과학적 결론임에도 앞선 기술을 갖춘 철 교역국으로서의 위상을 내세우며 임나설을 꾸준히 우겨왔던 일본이다.


여러 정황상 그만큼 임나일본부 이론이 중요한 때문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은 8세기 때 나온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쪽을 일본부가 실제 통치했다는 일본 측 주장이었다.


당시까지는 뚜렷한  반박자료가 없다 보니 거의 고고학계의 주류 학설로 굳어있었다.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국가로 성장한 정치체제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아 일본의 영향 아래 철기를 사용한 후진 지역이라는 결론하에 임나설을 조선 식민지화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던 일제다.

해서 갑옷, 특히 판갑 등 철제품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밖에 없었다면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들이밀었다.


그.런. 복천동에서 4세기대의 판갑이 나오므로 일본의 억지 주장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전쟁터 병사들의 보호장구인 갑옷은 상반신만 가릴 수 있게 쇠판을 두드려 만든 판갑을 보병들이 착용한데 반해 기마병들은 찰갑(札甲)이라 하여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작은 철판을 끈으로 이어 만든 쇠비늘 갑옷을 착용했다.

이 찰갑이 여덟 점, 투구(27점), 목 가리개인 경갑(8점) 등을 합하면 65점이 쏟아져 나오므로 복천박물관은 가히 갑주 박물관이라 일컬어질 만했다.

90년대까지 동아대와 부산대 및 부산박물관 주관하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금동관, 철제 갑옷, 투구류, 화살통, 토기 등을 대량 수습했다.

그때 박물관 회원으로 발굴조사단을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보고 들었던 여러 에피소드들.

고대사 해명에 필요한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될 적마다 뛸 듯이 기뻐하던 순수한 열정의 고고학과 학생들의 풋풋한 젊음도 생각이 난다.

철제 갑옷과 철제 마구를 발굴하며 환호하던 조사원의 표정이며 나라가 힘 잃으면 역사마저 빼앗긴다던 학예사의 흥분된 얼굴이 상기도 선연하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무려 만 이천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면서 그로써 6백 년을 이어져왔으나 고대 역사에서 홀대받았던 가야의 뛰어난 철기문화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된 점이야말로 복천동 고분군이 남긴 공로다.

그로써 철의 왕국으로 자리매김된 가야.


고대사회에서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제철, 정련 기술을 갖췄음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이 있음을 의미하며 그로써 강력한 왕권을 갖춘 가야국임은 그렇게 인정되었다.  

신비의 왕국 가야 문화의 보고(寶庫)인 복천박물관 내 장신구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6세기 이전 부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이 다량 매장돼 있던 복천동 고분군.

택지 개발을 하다가 발견된 복천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금관, 귀걸이 등 순금제품과 곡옥(曲玉), 유리제 목걸이들이다.

가야의 지배 계층은 독자적 형태의 금동제 관(冠)과 귀걸이를 비롯하여 유리구슬을 이어 끝에다 곡옥이나 금붙이를 매달아 장신구로 사용, 그들의 권위를 나타냈다.

당시는 남녀 구별 없이 지체가 높다면 장신구를 착용했다고 한다.

금관, 하면 출(出) 자형 신라 금관을 떠올리나 원 바탕은 가야에서 비롯됐다.

가야의 관으로 대표적인 것은 부산 복천동 10호분 출토 금동관을 비롯하여 고령 지산동 30호분·32호분 출토 금동관이다.

화염문이나 산형 (山)​의 대형 장식을 하나 세우고 보주형 장식과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대칭으로 세운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

이는 대가야 전성기에 제작된 것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

가야 고분에서 자주 출토되는 귀걸이는 귓불을 뚫어 착용하는 세환식이 대부분이다.

세환의 고리 아래 중간은 사슬 모양의 연결 고리를 사용하여 잎새형, 원추형, 산치자 열매형 금판이나 영락을 작은 못으로 고정시켜 끝장식을 달았다.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이 담긴 금관과 정교한 귀걸이는 천오백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현대에도 돋보이는 디자인이다.

고대 가야인의 우수한 미적 감각과 섬세한 세공 기술은 오늘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유물이 양적으로 미미한 것은, 값어치가 높은 금이라 도굴과 밀반출 따위로 다수가 유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나이제나 인간세상 위치 현격히 서로 달라 높고 낮은 삶의 질.

화려한 관을 쓰는 자, 갑은 하나이나 금판 얇게 두드려 세공하는 을에 해당하는 장인은 무수했다.

원시사회부터 오늘날 자유민주사회나 만민평등을 내세운 공산국가라고 다를 리 없으렷다.

해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노래도 나왔겠지.

허나 그게 맘과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주어진 천명을 거스를 수 없는 일임은 이 나이에 이르니 알듯도.....

복천동 고분은 난립해 들앉은 허술한 판잣집 덕에 오히려 훼손이나 도굴을 막을 수 있었으니 세상사는 요지경이요 새옹지마이자 전화위복인 것을.


박물관 벤치에 앉아 묵지그레한 다리를 잠시 쉬어주며 흘러가는 구름 바라본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겨울 볕 다사롭던 어느 오후 끝으로 찾았던 복천동 고분.


다시 와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을 정도라 격세지감에 만감이 교차되었다.  

복천동 22호 분 출토품인 청동제 칠두령, 일곱 개의 방울이 달린 가지 방울.  칠두령(七頭鈴)은 가야의 최고 수장급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바, 이 방울을 손에 들고 흔들면서 의식을 주재했으니 권력 지배자가 종교의식까지 주관했음을 알 수 있다.

복천동 고분에서 발굴된 마두 보호구인 철제 투구와 오리모양 도기로, 부장품에 새 모양 그릇이 많음은 새를 곧 이승과 저승을 잇는 중개역으로 파악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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