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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6. 2024

동래에서 벌어진 킬링필드

특이한 지하 전시관 한곳을 다녀왔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은 지하철 4호선 수안역 역사 안에 있다.

성문을 본뜬 입구와 여러 전시물 등, 역사 내부 분위기부터 이색진 곳이다.


후대들에게 잔혹한 전쟁에 대한 경각심과 유비무환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만들어 놓은 역사관일 터다.

문이 닫힌 박물관 관람 대신 승강장 내부 벽화와 대합실 벽면에 원형을 옮긴 해자 단면 등을 사진에 담아왔다.

그나마도 되쏘이는 대합실 밝은 조명의 반사로 사진발 허접스럽긴 하지만.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과 명륜동에 걸쳐 있는 수안역 위치는 과거 동래읍성 바로 정문 앞에 해당된다.

수안동을 지나는 지하철 공사 중에 조선 전기 때의 동래읍성 해자가 발견된 것은 지난  2005년의 일.

해자(垓字)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건,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 주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방어시설이다.

곧, 성 외곽에 땅을 깊이 파 강을 만들어 물길 흐르게 하여 적의 침입을 저지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비물이다.

동래읍성 해자에 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남아 있던 것인데 우연한 기회에 실제상태를 확인하게 된 격이다.

특기할 점은 해자가 발견된 이 장소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많은 무기와 유골들이 출토됨으로 해서다.


왜는 동래에 화친 사절을 보내놓고 뒤로는 조선의 정세를 염탐한 후 부산포로 침공해  들어왔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적이 조선을 침입해 와서 이 땅에서 벌린 아비규환의 참상은 피의 광란에 다름 아니었다..


성문 앞까지 밀고 들어온 왜장 요구는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며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틔우라 명했다.   


명분이 그렇다 뿐 조선정벌이 목표였던 왜를 향해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라고 하며 동래부사는 분연히 맞섰다.


나라의 관문을 지키던 동래성의 부사 송상현공을 비롯해 군관민은 창칼로써 왜의 조총에 대항했다.


그러나 중과부적, 부녀자들조차 기왓장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성은 함락됐다.


첫 전투가 벌어졌던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이 떨어지며 곧장 한양이 무너지게 되자 비겁한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친다.

4백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물이 메워져 땅속이 된 해자 바닥에서는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조선인의 뼈와 무기류 다수가 발굴됐다.


해자라는 방어시설이, 외려 적에 죽임 당한 조선인의 떼무덤으로 변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심지어 다섯 살짜리 아이의 뼈가 출토되고 머리와 분리된 몸체며 총구멍 난 두개골이 드러나기도 했다.


칼, 목궁, 화살촉, 비늘갑옷 심지어 도리깨, 낫까지 발굴됐다.


당시 양산군수의 아들이 송상현 부사와 함께 순절한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읍성에 당도했다.


도착해 보니 성 가득히 시체가 쌓여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의 격전지였던 동래성.


 

 

16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남간 동래맹하유감(東來孟夏有感) 글은 당시의 참담지경을 이렇게 써 내렸다.


“송상현 부사를 쫓아 성 가운데로 모여 들어온 백성들이 동시에 피바다를 이루었으니 쌓인 시체 밑에 몸을 던져 백 명 천 명에 한두 명이 살아남았다. 온 가족이 죽어서 곡을 해줄 사람조차 남기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라고 기록했다.


그처럼 왜적들은 남녀노소를 막론, 개 고양이까지 성 안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참혹한 비극의 현장, 그 유물과 유골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발굴될 수 있었던 것은 해자라는 환경이 습지였기에 가능했다.


역사의 진실을 고발하고자 수백 년간 땅속에 묻혀 햇빛 볼 날을 기다렸던 한 맺힌 유골들.

부산 앞바다를 빼곡 메운 왜군과 처음으로 대적해야 했던 부산진성 접전을 그린 순절도가 있다.


동래구 순절도 역시 성을 겹겹이 둘러싼 왜적과 용감히 맞섰으나 신무기 조총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동래인들.


송상현공은 순절하기 전 "동래성은 마치 달무리에 둘러싸인 듯 외롭다"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왜병들은 끝까지 대적하는 동래 성민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해 마구잡이로 해자에 던져버렸다.


그처럼 왜적들은 조선인 군관이라면  모조리 죽이고 무고한 양민조차 살육하는 비행을 저질렀던 것.


임진왜란 초기 동래읍성 전투의 처절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발굴단도 끔찍한 참극 현장을 대하다들 숙연해졌다고.


해자 발굴터에서는 일본제 무기인 창 하나만 출토된 걸로 미루어 봐도 왜군에 의한 일방적인 도륙장이던 동래성이었다.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으니 뭘 어째보겠는가.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지녀야 할 각오와 다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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