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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7. 2024

정발 장군 동상 우러르며  

부산진순절도

오랜만에 정발장군 동상을 제대로 만나보려 초량에 갔다.

장군은 창졸간에 만난 임란에 맞서 분전하다 첫 번째로 순절한 부산 첨사다.

선조 25년 봄 4월 13일 소서행장이 이끈 조총부대를 상대로 부산진 전투에서 백병전을 펼치다 중과부적, 전사한다.

그때 나이 향년 39세로 "구차하게 도망하여 목숨을 건지느니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라며 총과 결연히 맞선 장군.

한참 훗날, 왜에 통신사로 갔던 황신이 왜장으로부터 그의 기개 용맹스러운 무용담을 전해 듣고 조정에 고해 충장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부산진성 남문 자리에 정공단이 조성됐으며 안락서원에 배향되었다.

동상이 서있는 자리는 부산진성 서쪽인 초량으로 일본 대사관과 지근거리다.




대사관 담장은 아주 높았고 내부시설은 밖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사선 오염수 방류 문제로 주일 대사관 폐쇄시키라는 규탄 현수막 어지럽고 경찰들이 관저 건물 앞뒤로 지키고 있었다.

동상 앞 작은 공원에는 항일거리라는 굵은 표지 글이 붙어 있고 바로 옆은 일본대사관, 지독한 패러독스다.

그런가 하면 공원을 돌아 동쪽에 붙은 도로안내판에는 한일 교류의 길이라 쓰여있으니 도무지 혼란스럽다.

대사관 앞 대로상에는 소녀상이 앉아있으며 불끈 팔 뻗쳐 항거하는 탄광 노동자 상도 처절한 표정이다.

발 파묻힌 석탄더미 한 귀퉁이에 어머니 보고 싶어요, 라 쓰인 글귀가 절절함으로 다가오기 전 선전도구로 전락한 극본 문장 같다.

요즘 정치권에서 흔히 써먹는 신파조 감성팔이 문구로 들려옴은 나만일까.  

선동적인 붉은 문구, 그러나 죽창가 부를 일이 아니라 진정 일본을 이기고 싶다면 반일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극일이 먼저다.

허수아비 같은 대한 제국이 서게 된 배경은 제국주의 일본의 야망이 물론 크게 작용했다.


그렇더라도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조선 왕조는 극히 무능했고 무력했으며 백성보다 왕실 생각만 했기에 그리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마지막 황태자가 일본국 중장에 오르고 왕실 사람들은 일본 황족의 예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할 때 그들이 버린 민초들의 삶은?

이 땅의 힘없는 백성들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죽지 못해 겨우 살아냈다.

정발 장군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다 첫 번째로 순절하고 송상현공과 숱한 민초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걸 저승에서 지켜보며 선조 소회어떠했을까.

아들 광해를 견제하고 충무공을 두려워 제거하려 한 어리석기 짝이 없던 군주였던 그.

모진 왜란을 겪고도 전대의 뒤를 이어 고종 순종은 그 전철을 답습해 결국 나라를 통째로 넘기고 말았다.

오욕의 일제강점기 같은 민족적 시련을 지금이라고 당하지 말란 법 없을 건가.

일본만 아니라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인접한 이 땅은 지정학적으로 피치 못할 숙명을 안고 있는 나라다.  

일본 못지않게 중국은 대한민국 알기를  변방의 일개 성 정도로 취급하기 예사다.


중국이 공을 들이고 있는 동북공정은 이미 1992년부터 추진되어 왔다.


그들은 역사왜곡 문화왜곡을 넘어 한복왜곡 김치왜곡으로 이어지는데도 정부는 눈만 멀뚱멀뚱, 정치인들 머리에 전두엽이 있기나 한지?

일본 얘기를 하다가 대륙으로 건너가 버렸는데 다시 얘기를 돌려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의 악연 썰이다.


초량 일대는 오래전부터 왜관이 있던 자리다.

따라서 근처 골목에는 왜식 주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고관으로도 불리는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초량 인근의 역사는 거슬러 조선 전기로 올라가게 된다.

대체 고관은 뭐며 왜관은 또 뭔고?

일단 왜관은 대마 도주의 임명을 받은 일본 사절이며 관리와 왜의 상인들이 조선땅에서 상주하도록 허가받은 공간이다.

조선인들의 생활과 거리를 두도록 울타리를 쳐서 거주지를 제한시켰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노략질 일삼는 왜구를 수차 토벌했듯 왜인들이 자꾸 바다 건너와 집적거리자 조선 초 세종 때 삼포를 개항했다.

삼포는 동래 부산포, 울산의 염포와 진해의 내이포다.

거푸 발생한 왜란으로 폐쇄됐던 왜관이 재개된 것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내왕하던 1607년.  

왜관은 수정동 인근의 두모포와 부산진의 부산포 지금의 영도인 절영도 세 곳에 설치돼 있었다.

절영도에 있던 왜관을 현종 13년 초량으로 옮기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왜와의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왜관에 들어오는 일본 사절과 상인이 대폭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동래부사는 외교사절을 접대하고 왜관의 정황을 조정에 보고하며 대일 무역을 총감독하는 등 왜관과 관련된 행정 책임자였다.

산하에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별도로 파견된 관리가 있었으며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과 주변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다.

고종 시기 개항 이후 일본 거류민들은 조선에 존속한 왜관을 자신들의 고토(古土)로 기억하는 전승 작업을 시도, 고관이라 불렀다.

우리 측 설명은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왜관이 옮겨졌기에 전에 있던 왜관이란 뜻의 고관이라는데 글쎄?

한때 부산의 원도심으로 중심축이었던 이곳에는 현재 동구청과 부산일보가 들어섰고 수정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도심 빌딩숲 앞에 오늘도 여전히 푸른 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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