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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7. 2024

죽어도 길은 못 비켜!(戰死易假道難)

8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이 무언의 외침은 동래부사 송상현 공이 왜장에게 내보인 필담 문구다.

동래성을 지키다 순국한 민(民)·관(官)·군(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충렬사당.

무방비 상태로 침략을 당해 혼란에 빠진 동래성을 겹겹 포위한 개미 떼 같은 왜적들.

임진왜란은 대륙을 정복하기 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욕에서 비롯된 조선 침략전쟁이었다.

전란이 나자 백성들을 버려둔 채 의주로 도망간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무능으로 전쟁은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동래성 전투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왜군이 1592년(선조 25년) 4월 15일 동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전즉전이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였다.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 없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벌떼처럼 달겨드는 병력을 맞은 조선국 동래성 사람들.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엄포에 동래부사 송상현 공은 의연히 답한다.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동래성을 지키다 순국한 민(民)·관(官)·군(軍)의 기개가 서릿발 같았던 이 자리.

관군은 물론 성안 백성들도 괭이와 도끼 낫을 들고 백병전(白兵戰)을 벌이며 저항했고 아녀자들은 돌과 기왓장을 날렸다.

오래전 부산 지하철 3호선을 뚫는 공사장소가 바로 인근 수안동, 조선시대 동래성 해자 터였다.

땅을 파나가는 도중 무더기로 나오는 인골에 놀란 인부들의 증언에 따라 정밀발굴조사를 한 결과 임진란의 참혹함이 모골 송연하게 드러났다.    

조총(鳥銃)이 뒤에서 뚫고 나간 두개골 등 숱한 인골 외에 녹슨 칼과 화살촉 갑옷 등이 4백 년도 넘어 그 모습을 나타냈던 것.

왜군은 애 어른은 물론이고 개나 고양이 할 것 없이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도륙했다고 한다.

힘없는 나라 백성은 예나 이제나 처절하게 핍박당하다가 종당엔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부산이 대한민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하며 원래 동래현이었던 이 지역도 부산시 안에 흡수됐다.

1980년대 초 부산으로 이주해 왔을 당시만 해도, 항일의거에 앞장선 동래고등학교 인근 안락동은 한적한 동네였다.

점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안락 로터리는 교통의 요지로 변해갔고 특히 근처의 복천동 고분군 발굴에 따라 안락동은 역사와 정신문화의 거리로 재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유원지는 아니지만 공원처럼 가꿔놓은 안락한 환경인 데다 집에서 가까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놀러 오던 그런 충렬사다.

사방 빼곡히 둘러선 고층 아파트 군과 빌딩들로 거리는 많이 변모했지만 충렬사는 이십 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아 반가웠다.

요즘 같은 혼돈 시국이라 더더욱 충과 의의 깊은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이곳.

부산 안락동에 위치한 충렬사 안락서원(安樂書院)은 의로운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유서 깊은 장소로 부산 시민이라면 다들 안다.

임진왜란 때 부산을 수호하다 장렬히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공과 부산 첨사 정발(鄭發) 장군,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 등 부산 지역의 의로운 순국선열 93위를 모셨다.


여기서 부사와 첨사는 종3품 직위로 부사는 행정관인 문관, 첨사는 지방관인 무관이다.


엄청난 국난에 문관 무관 역할이 별개일까.

절체절명의 난국에 남녀가 따로 있을까.


기왓장으로 왜적에 저항하여 싸웠던 무명의 두 의녀(義女) 그리고 송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 애향(愛香) 두 열녀(烈女) 신위는 의열각에 배향됐다.


충렬사 뒤란 빽빽한 대밭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며 대숲은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주고 싶을까.


청청한 대숲에 이는 바람이 들려주는 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도록 숭고한 희생 치르신 분들의 넋을 부디 잊지 말기를...

조복으로 갈아입고 남문 성루에서 최후를 맞은 송 공은 군신의 義가 부모의 은혜보다 중하다는 시를 남기고 스러진다.


그 후, 1605년 동래부사 윤훤이 동래읍성의 남문 안에다 충렬공을 모시기 위해 송공사(宋公祠)를 세운 것이 충렬사의 시초였다.


인조 2년에 송공사를 충렬사(忠烈祠)라 사액(賜額) 하고 효종 3년에 송 공의 학행과 충절을 높이 기리고자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안락서원은 국난에 맞선 충신과 열사들의 넋을 모셨기에 1864년 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철폐령에도 무탈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춘추로 지내던 제향은 금지됐으며 지키는 이 없는 충렬사 건물이 쇠락해 가자 1976년 충렬사 성역화 사업을 펼쳐 오늘에 이르렀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 대로 347(안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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