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Jun 27. 2024

애달파라, 동강

푸르다. 온통 짙푸르다. 푸르름 일색인 유월의 산하. 예서제서 왕성한 생명력이 거침없이 넘실댄다. 산 청청, 물 청청인 강원도 오지 영월. 기골장대한 태백의 봉우리가 겹겹으로 에워싸인 그 아래, 산자락 따라 흘러내린 골은 아득히 깊다. 끝모르게 이어지는 유장한 옥빛 강. 정선 땅 아우라지 굽이돌아 세를 불린 동강이 산자락 휘감아 돌며 곳곳에 절경을 빚어 놓았다.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에 쉬리며 수달 가족 비오리 떼 평화로이 얼려 사는 동강. 뼝대라 불리는 수직의 석회암 절벽에는 고란초 피듯 은밀한 동굴이 이리저리 숨겨져 있다. 희귀 동식물 등 뭇 생명을 품어 안은 천혜의 자연 보고라는 동강이다. 원시 그대로의 환경 속에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전된 고요한 은둔자 동강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 건 얼마 전의 일.



댐이 건설된다고 했다. 처한 입장에 따라 의견이 분분할 즈음, 시민단체에서 이 문제를 여론화시켰다. 개발과 보존, 생존권과 환경권을 놓고 설왕설래 공방이 뜨거웠다. 치수는 국가경영의 기본이다. 수도권 지역의 용수 공급은 물론 홍수 조절 측면에서의 불가피성을 묵과할 수는 없다.

 

반면 자연은 인간만이 아닌, 거기 깃든 모든 생명체의 공유물이다. 따라서 우리의 편리와 이익 위주로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지도 타당하다. 더구나 훼손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환경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의무 또한 잊어선 안 된다. 과연 어디에 무게비중을 두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그간의 개발 결과를 참작하면 답이 나온다.




그러나 댐 건설 이전에 호기심 어린 관광객의 무절제한 발길에 짓밟혀 이미 동강은 상처투성이였다. 동강 본래의 순결, 그 고요는 깨지고 오염된 물가에 탐욕만 깔렸다. 진정 자연은 자연 그대로 일 때 아름다운 법.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시절로 복귀할 수 없음에 동강은 안타깝다.



몰리는 인파를 실어 나르느라 북새통인 도로. 그래도 차도에 바짝 다가선 산기슭 녹음 그늘 여기저기 선연한 주홍빛 나리꽃 곱다. 뿐인가. 정감 넘치는 이름으로 한 번 더 뒤돌아보게 하는 황새 여울, 만지 나루, 어라연에 나릿재.



경복궁 중창에 필요한 목재를 실어 나르기 위해 뗏목을 띄웠던 한때, 전성기의 호황을 누렸듯이 지금은 래프팅의 신나는 함성이 여울지는 곳. 게다가 산야는 활기찬 건강미로 눈부시다. 그러나 아라리 가락의 처연함 때문일까. 마냥 들뜬 기분일 수만은 없는 곳. 오히려 심연 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 단종 유배지에 가까워질수록 차창 밖 녹음조차 수수롭다.

유월 어느날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 청령포 유배된다. 온누리는 이리도 싱싱한 축제 한마당인데 하필이면 이 좋은 계절에 천 리 먼 길 유배라니. 열일곱 아직은 어린 나이, 일찍이 부모를 여읜 의지가지없는 조카를 내친 숙부를 용서할 수 없음에 다시금 이는 통분. 정녕 그럴 순 없는 일이다. 하늘에 머리 두고 살며 그럴 순 없는 일이다. 역사는 단죄 못해도 하늘만은 결코 무심치 않아 모진 고뇌를 수양에게 안겼음이리.



가도 가도 끝날 줄 모르는 강줄기 따라 내쳐 달음질치던 차가 이윽고 멈춘 곳, 청령포다. 누가 찾아냈을까. 이보다 더 탄식 깊게 만드는 유배지란 있을 수 없을 만큼 참으로 기막히게 생긴 지형지물이다. 뒤편은 단애요 앞을 가로막는 건 시퍼런 강물, 육지에 뜬 섬에 다름 아니다. 막막한 심정으로 이 앞에 섰을 단종, 눈물겨운 그 장면이 떠올라 홀연 코끝이 아려 온다. 이 강물에 피눈물 섞었을 초췌한 단종을 전송하며 산천인들 낙루치 않았으랴. 강물이 도도한 설움인 줄을, 나 여기서 비로소 실감하겠다. 반달 같은 나루 저 건너 우거진 송림마저 애련해 짐짓 모자챙을 내렸다.



그 옛날, 내일을 기약 못할 목숨이라 세상사 체념한 채 나룻배에 올랐을 단종의 동안(童顔)이 어린 강물은 묵직한 암녹빛이다. 그만큼 깊다. 줄 배로 건넌 청령포. 다들 묵연히 솔밭 사잇길 걸어 유배지의 자취를 더듬는다. 옷깃 가다듬어 묵상의 예를 바친 들 먼 후대의 섬김이 무슨 소용이랴. 관음송 두 줄기가 세월의 아득함을 알려 줄 뿐 이끼 낀 비문이 무슨 위안이랴. 당시 머나먼 한양 바라며 애끓는 심사로 절벽 꼭대기 노산대에 올라 서리서리 맺힌 한과 시름을 허공에 뿌렸을 단종에게야. 궁중을 떠난 지 불과 넉 달 만에 ‘짝 잃은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매다’ 자규새 울음 되어 스러져 간 그 단종에게야. 다 부질없는 짓이다. 잠시 스쳐 지나는 객조차 납덩이같은 한숨만 보태고 떠나야 하는 비감 서린 청령포였다.

종교가 가르치는 이치대로라면 벌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것이라야 하건만 이처럼 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단종.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모순투성이 세상이라 해도 너무나 불공정한 결론이 아닌가. 몸으로 생각으로 숱한 죄를 짓고 사는 중생이라지만 고작 열일곱 해를 산 소년이 죄를 지은들 무슨 몹쓸 죄를 지었으랴.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싶은 일을 당하면 흔히 그래서 전생의 업으로 돌리는지 모른다. 내가 지은 업보 탓이다,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움이 오히려 감당하기가 수월한 때문이리라.



한 가닥 배려일까. 서양문화에 있어 삶의 종결은 죽음이다. 더 이상의 여운 없이 막 내리면 그뿐. 그와 달리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채식을 하는 동양권 문화의 특징이라 하였다. 명이 다하면 地 · 水 · 火 · 風으로 흩어지고 마는 육신인 반면, 찬 서리에 잎 져도 봄을 맞아 다시금 부활하는 식물의 속성처럼.



그렇게 단종은 새롭게 영생을 누린단다. 애사(哀史)로 기록된 한 많은 생애. 덧없이 죽음에 이르러 강가에 버려졌던 시신일망정 태백산 산신으로 거듭 태어나 지금은 구름으로 바람으로 유유자적 노닌다는 단종이시다. 대신 그나마로 위안 삼고 마음 추스른 귀향길. 사육신의 넋인가. 철 지난 찔레꽃 휘날리는 낙화가 눈인 양 희다.


 부산여성신문-97

작가의 이전글 저 눈빛을 기억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