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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9. 2024

문득 돌아보니

태풍 경보가 내려진 어수선한 저녁. 사나운 비바람에 잔뜩 긴장하고 잠들었는데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의외로 街路는 말끔했고 하늘은 쾌청했다.



 저지난해. 해일까지 동반한 채 기세등등하던 셀마는 밤새 얼마나 난폭했던가. 바다로 향한 外窓을 깨부술 듯 난타하며 휩쓸던 광기. 그 여파로 산동네 허름한 집이 날아가고 간판이 박살 났는가 하면 가로수는 마치 이삭 훑은 나락 꼬투리처럼 잎새 잃고 텅 비어 있었다.



뒤에 남긴 흔적조차 거칠기 짝이 없던 그 두려운 위력을 돌이켜보니 올 주디는 조금은 얌전한 편이라 여겨진다. 그래도 곳곳에 침수 피해가 막대하다고 뉴스는 전한다. 그와 함께 빠른 복구 작업으로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구슬땀 흘린다는 보도도 뒤따랐다. 여름이면 으레 치러야 하는 불청객 태풍. 그래도 이번엔 더 이상의 횡포 없이 물러갔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언제 그랬냐 싶게 맑게 갠 그 아침. 산행 중에 나는 뿌리째 뽑혀 있는 아카시아 굵은 둥치를 만났다. 패랭이꽃 무리가 비바람에 뒤채이다 기진해 누운 것 외에는 다 무사한데 "하필 왜 큰 나무가?" 하던 의아심은 곧 풀렸다. 물론 아카시아 뿌리가 깊지 않게 뻗은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제 본연의 모습 대신 너울대는 칡 이파리 그 무게감에 지질려 그만 쓰러진 아카시아. 주객전도도 유분수지 그 나무는 아카시아가 아니라 숫제 무성할 대로 무성한 칡덤불이었다. 아카시아 온 전신에 칡덩굴이 기어올라 숨 가쁘도록 휘감겨 있었으니 과중한 부담을 지탱할 수가 없었나 보다.



 순간 고 3인 맏이가 떠올랐다. 여름 방학임에도 일찌감치 학교에 가면 자정 가까이 되어야 집에 오는 아이. 치열한 입시 경쟁은 비껴갈 수 없는 생의 한 과정이긴 하지만 대입시를 앞두고 있는 아이의 야윈 어깨와 무거운 가방이 노상 나를 안쓰럽게 한다. 결국 그 누구와도 아닌 오로지 자신과의 투쟁으로 고독한 극기 훈련을 쌓고 있는 아이. 그 아이에게 행여 나는 능력 이상의 과잉 기대로 은연중 중압감을 주진 않았던가. 절제하려 애쓰면서도 지나친 배려와 필요 이상의 관심으로 자칫 부담을 안게 하진 않았던가.



 대학으로 가는 길은 긴 긴 마라톤 코스와도 같다. 단거리 경주처럼 잠시 잠깐에 승부가 결정 나지 않는 만치 부단한 지구력이 필요하다. 늘 최선 다해 끈기 있게 달리고 있는 아이. 한데 어쩌다 조금만 느슨해 보여도 조바심 내며 아이를 닦달한 적은 없었던가. 힘겨운 굽이굽이에 격려의 따순 눈길 대신 앞선 아이와 슬쩍 견주며 맥 빠지게 한 경우는 없었던가. 자존심으로 짐짓 둘러 댄 탐욕의 한끝. 어쩌면 아이로 하여금 겨운 짐 지게 한 건 아닌가. 부모 마음 아무리 조이고 안타깝다 해도 당사자만큼이야 긴장되고 힘들리 있으랴. 본인만큼 절실할 수 있으랴.



 어느덧 아이는 한그루 청청한 나무로 자라났다. 제게 주어진 사계절은 물론 비바람과 폭염 굳건히 견디고 다스릴 수 있게 우뚝 솟은 한그루 푸르른 나무.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의 가능성을 진단하고 그의 능력과 적성과 자질에 합당한 대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혜 모으는 일 그리고 기도뿐임을 안다. 하는 일에 즐거이 평생을 걸고 보람 느끼며 보다 그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도록 조언하고 도와줄 뿐 나는 그 이상의 칡덩굴이어선 아니 되리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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