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내야 할 목숨들이 있었다.
유비무환, 그래서 섬을 빙 둘러 성을 쌓아 올렸다.
육박전 같은 전투를 염두에 두고 등장한 방어시설이 석성이다.
노략질하러 바다 건너 막무가내로 달겨드는 왜구뿐인가, 몽고족 뿐인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장성을 쌓는데 남녀 구분 없이 앞장섰다.
큼다막한 바위 아랫돌 삼고 잔돌로 틈을 메워가며 든든하고 굳건하게 석성 쌓았을 윗대 어른들.
도구는 물론 입성조차 변변찮은 민초들이 맨손으로 깡추위와 염천 무더위 무릅쓰고 그 기나긴 석성을 축조했을 터다.
환해장성을 따라 해안 도로 걷는 내내, 하여 심사 짠하고도 싸해질밖에.
신양해수욕장에서부터 시작되는 동남 해안 환해장성로는 온평포구 거쳐 신산리까지 10킬로쯤 이어지며, 돌아서 보면 성산일출봉이 우련하게 멀어진다.
마을 앞 해안선의 길이가 6㎞ 정도로, 제주도 해안마을 중 해안선이 가장 길다는 온평리.
여기서부터 신산리 역시나 기나긴 해안선 따라 환해장성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데.
내친김에 남원 태흥마을길 따라 휘적휘적 걷는 동안, 무너져 내린 혹은 복원된 석성 바라보는 마음 영 묵지그레했다.
환해장성 안내문 내용이 퍽 상세하다.
"제주도 해안선 300여 리(약 120km)에 쌓인 석성(石城)을 말한다.
1270년(고려 원종 11) 몽고와의 강화를 반대한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가 용장성을 쌓아 대몽항쟁을 전개하였다.
삼별초군이 제주로 들어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고려 조정이 영암 부사 김수와 고여림 장군을 보내어 쌓은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환해장성은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입과 18~19세기 영국 군함 등 이양선이 침범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양호하게 남아 있는 곳 10개소(제주시 화북, 북제주군의 곤흘, 별도, 동복, 남제주군의 온평)가 제주도 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지형이 험한 절벽지 같이 배를 댈 수 없는 곳 빼고는 다 성을 쌓았던 모양이다.
1601년 어사로 제주도를 방문했던 김상헌은 남사록(南槎錄)에 "바닷가 일대에는 돌로 성을 쌓았는데 잇따라 이어지며 끊어지지 아니한다. 섬을 돌아가며 다 그러하다. 이것은 탐라 때부터 쌓은 만리장성이라 한다."라고 썼다.
"왜적이 들어와 도적질 하였음에도 이 섬에서 한 번도 뜻을 얻지 못했던 것은 섬을 돌아가며 석벽이 바닷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험지여서 왜적들의 배가 정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고려 시대 때 축성이 시작되었지만 조선시대에도 계속 보수를 했다.
무너지면 또 쌓고, 무너지면 다시 되쌓아 올리는 일이 대를 이어 장장 6백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셈이다.
환해장성은 군사적인 목적 외에도 해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염분 피해를 줄이는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환해장성 축조에 관한 기록은 〈탐라지〉의 ‘고장성(古長城)’ 조에도 나와있다.
“연해 환축(環築)하여 둘레가 3백여 리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진도에서 반하니 왕은 시랑 고여림 등을 탐라에 파견해 영병 1천으로 이를 대비해 장성을 구축했다”라고 하였다.
고려 후기의 문신 최해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 관군이 패전한 이유에 대해 ‘현지 방어군이 적극 협력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 또한 삼별초를 도왔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술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여몽에 항거하던 삼별초가 강도(江都)에서 남하하여 진도에 이르러 주위가 3만 8,741자, 높이가 5자에 이르는 용장성을 쌓고 오랑(五狼)이라는 해상 왕국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옛 장성은 연해 300리에 축조되었다. 고려 원종 때 반거한 삼별초가 진도에 머물렀다. 왕은 시랑 고 여림에게 병사 1,000명을 주고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자 제주에 들어온 고 여림과 군사들은 삼별초 군사들을 대비하기 위한 장성을 축조했다”라고 쓰여있다.
이처럼 섬사람들은 삼별초군과 고려 말부터 들끓는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환해장성 축조를 이어갔다.
그러나 허어~몽골이 아니라 고려 삼별초군 입도를 막고자 돌성 쌓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
환해장성이 거친 폭풍우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대체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섬주민들의 뛰어난 돌담 축조 기술 덕이었다.
주민들은 환해장성 축성 시 대부분 제주 바닷가에 흔한 현무암으로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돌을 쌓았다.
이때 근처에 무진장 깔린 돌을 사용했기에 파도에 닳아 둥글둥글한 돌들이 장성에 많은 편이다.
성의 구조를 보면 성 아래쪽 너비는 보통 1.5m 정도로 양쪽에는 비교적 큰 돌을 쌓은 다음 그 속에 잡석을 채운 겹담 형식이다.
석성에 남아있듯 성의 안쪽에는 군인이 순찰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회곽도(回廓道)라 한다.
회곽도였던 곳은 해안경비초소에서 근무하는 경찰의 교통로로 이용되었다가 현재는 올레길이 되었다.
해변에 새카만 현무암이 죽 깔려있는 이곳 올레길 3코스에는 해안 절경지가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올레꾼 오가며 쌓아 올린 돌탑엔 저마다의 간곡한 염원 포개져 있기도....
그다음에 찾아간 곳은 동북 방향 해맞이 해안로.
제주섬 어딘들 왜구 집적대지 않은 땅 있을까.
동쪽 하도 굴동 바닷가도 마찬가지라 예외 없이 백성들 지키려 바윗돌로 둘러쌓은 환해장성.
해변에 새카만 현무암이 죽 깔려있는 이곳 올레길 3코스에는 해안 절경지가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올레꾼 오가며 쌓아올린 돌탑엔 저마다의 간곡한 염원 포개져 있고....
굴동 포구 옆, 갈매기 무리가 바윗전에 앉았다가 몇 발짝 내 움직임에 놀라 일제히 날아오른다.
날갯짓 힘차게 창공 드높이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사라지는 갈매기떼...
쉼을 방해해서 미안해, 갈매기들아.
환해장성 흔적 좇아 다시 바닷길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볼게.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120킬로나 이어 쌓은 석성인 환해장성.
현재 하도리 환해장성은 곳곳이 무너진 채로 백여 미터만 남아있었다.
우도를 침범한 왜구들이 본섬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쌓은 방어벽인데 성벽치고는 규모나 높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굴동포구 해안로를 지나 환해장성 흔적 따라 별방진에 이르렀다.
마을을 폭 싸안은 진성이야말로 볼 적마다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
조선 중종 때 목사 장림이 쌓은 성곽으로 부락을 지키는 군사 기지 성격의 시설인 만치 성벽 구조가 매우 견실하였다.
주민들은 환해장성 축성 시 대부분 제주 바닷가에 흔한 현무암으로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돌을 쌓았다.
이때 근처에 무진장 깔린 돌을 사용했기에 파도에 닳아 둥글둥글한 돌들이 장성에 흔하디 흔한 편.
성의 구조를 보면 성 아래쪽 너비는 보통 1.5m 정도로 양쪽에는 비교적 큰 돌을 쌓은 다음 그 속에 잡석을 채운 겹담 형식이다.
위 석성에 남아있듯 성의 안쪽에는 군인이 순찰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회곽도(回廓道)라 한다.
회곽도였던 곳은 해안경비초소에서 근무하는 경찰의 교통로로 이용되었다가 현재는 올레길이 되었다.
성벽 위로 나있는 길을 걷다가 성 안쪽 밭에서 고구마 순을 심는 모자를 만났다.
여든여덟 할망은 굽은 허리를 숙인 채 밭두둑에 고구마 순을 묻는데, 칠십 다 됐다는 아들은 밭둑에 앉아서 담배만 태웠다.
"오늘 저녁에 비가 온다니 고구마 순이 아주 좋아하겠어요."
할망은 귀가 어두운지 묵묵부답, 그저 하던 일만 지성껏 하고 있다.
그러자 아들이, "울 어마이는 고구마 심다가도 물때 되면 물질하러 달려간다"고 엉뚱스런 답을 한다.
"울 어마이는 하도리 상군 해녀라서 아직도 바다에 들면 최고"라며 엄지척도 해 보인다.
"이 밭은 나라 땅인데 임대받아 어마이가 소일거리로 붙이는 거"라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했다.
여전히 할망은 쉴새없이 손만 놀렸다.
"난요, 무릎관절 수술을 받아서 쭈그리고 앉아하는 밭일은 못하고 차나 몬다"고도 하였다.
왜 일손 거들지 않고 빈둥대냐는 힐난이라도 들은 아이처럼 기어드는 소리로 그렇게 변명인지 설명인지를 덧붙였다.
더운데 물이라도 드시라며 내게 삼다수 물병을 들어 올리기에 고맙단 인사 남기고 성곽길 마저 걸었다.
늙수그레한 아들의 무안한 듯한 말투며 표정에서 아직도 순박한 구석이 남아있는 시골 인심의 단면이 느껴져 절로 고개 끄덕여졌다.
아들은 노친네 일손을 거들지 못해 민망스럽고 할망은 다리가 성치 않은 아들이 못내 안쓰러울 따름.
물때 이르기까지 할망은 땅만 쳐다보며 고구마 순 묵묵히 심고 있으리라.
아직도 제주 북서쪽으로 이어진 환해장성이 계속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다시 길 위로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