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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07. 2024

태풍 영향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홀연 나타나는 섬

서귀포가 오늘 밤부터 태풍 영향권 안에 든다네요. 일찍 들어가세요.

저물녘까지 돌아다니고 있는 기척을 눈치챈 큰애가 내게 전화로 그랬다.

퇴근하며 곧잘 안부를 챙기는 큰애다.

구름장이 아무래도 수상쩍긴 하다이. 곧 버스를 탈끼다.

야심한 시각, 스카이라운지라 명명한 12층 거처 내 의자에 앉아 먼바다를 내다보았다.

빠른 속력으로 태풍이 올라오고 있음에도 수평선에 고른 간격으로 점점이 뜬 어선 불빛에 숙연해진다.

태풍쯤 개의치 않고 생활 일선에 나서야 하는 저마다 수고로운 삶의 현장이 읽혀서이다.




창문 덜컹거렸지만 꽤 많이 걸어 다녀 피곤한 터라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장대비가 속수무책으로 마냥 퍼붓고 있었다.

창틀을 타고 낙숫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버릇처럼 바닷가를 내려다봤다.

서귀포 원도심 높직한 건물들 너머로 보이던 서귀포 앞바다도 섶섬과 문섬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창 가득 희뿌연 빗줄기만이 괴성 지르는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빗기며 시야 어지럽혔다.

강풍이 윙윙 아우성치면서 창문에 얼굴 마구 짓이겨대고 있었다.

제주도 남쪽 바깥 먼바다엔 바람 강하게 불고 파도가 매우 높아질 테니 대비 단디 하라고 했던 대로다.

호우경보가 발효 중이므로 외출 자제하고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는 행안부 발 속보가  전송됐다.

그래 그런지 거리엔 행인 뜸하고 대중교통 차편 운행마저 평소와 달리 느슨해진 거 같았다.



아무리 광포한 태풍 기세일지라도 잠깐씩 숨 고르는 시간은 있었다.

그때를 틈타 재빨리 바다는 무채색일망정 수평선도 되살아나고 섬들 역시 깨어났다.

여세를 몰아 파도는 흰 물굽이 밀면서 거듭거듭 해안 향해 달겨들었다.

멀리서도 태풍급 파도의 위력이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고 백록담 안위를 확인해 보고자 했으나 중산간부터 비구름에 가려 한라의 자취는 묘묘했다.

오늘 저녁 하영올레  달빛 걷기 행사도 무산됐을 테니 비 덕분에 푹 쉬기나 하자.

월드컵 경기장 특설무대에서 진행되는 서귀포 사계예술제도 미뤄지게 될 테고 노인성 별보기 행사 역시 당연히 자동 취소.

바쁜 주말이 될 뻔했는데 태풍 바람에 마음 느슨히 풀어놔도 되겠다.

모처럼의 이런 날은 작정하고 제대로 된 글을 써보고 싶어 진다.

오전부터 잔뜩 벼른 채 컴퓨터 앞에서 폼만 잡다 말았다.

시물거리던 눈꺼풀은 오후 들어 습관으로 자리 잡힌 낮잠에 혼곤히 빠져들게 했다.

홀연 눈을 떠보니 어슴푸레한 창밖 풍경, 비 오는 새벽이야? 태풍 치는 밤중이야? 잠시 헷갈렸다.

비몽사몽 중에 아주 오래전에 쓴 글이 생각나 일부러 찾아서 읽어봤다.

아, 옛날이여~!!!

...... 중략

비로 하여 되살아 나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닌 모양이다.

잊었던 이야기들도 가닥가닥 되살아 다가선다.

잠자던 그에 대한 열망, 뜨겁게 깨어나 앉는다.

속 깊숙이 간직해 둔 은밀한 기억마저 애수의 빛깔로 발아해 버리는 날.  

파삭하니 메마르던 심상에 번져지는 물기. 상(想)이 잡힐 듯도 하다. 글이 써질 것 같다.

허황되이 부유하던 마음결 다듬어 수틀에 가만 얹는다.

흐트러진 색실 올 고르며 한 땀씩 뜬 비단 자수 모습 갖춰 나오려나.

비록 고운 수 아니 되면 어떠랴. 어설픈 솜씨일지라도 그 작업은 생명의 무늬 놓음임에야.



평소 햇빛 부시도록 화창한 날은 맹송하니 글이 되질 않는다.

상상도 금방 싱거워지고 목전에서 곧 드러나는 한계, 그 막막한 단애(斷崖).

억지로 붙안고 씨름해서 될 일도 아니다. 그냥 잊은 듯 덮어두고 얼마쯤 내버려 놓는다.

하다 보면 그간 제법 풀잎 나붓거리고, 들꽃일망정 소롯이 피어 향 서리던 뜰이 푸석푸석 먼지나 날리는 불모지로 변한다.

생활의 타성에 천천히 각질화되어가는 자신. 마치 지구의 기온 상승과 극심한 한발로 초원이 점차 사막화되듯이.



기가 차도록 막막하다. 한 줄의 글마저 잡히지 않는다. 조바심 내면 낼수록 더욱 멀어지는 그.

문득 지척에서 느껴지다가도 손 내밀어 이끌려하면 아득히 사라지는 그. 야속하리만치 서늘히 뒤돌아서는 그.

아니, 옴도 없고 감도 없는 그는 한갓 신기루였던가. 아예 잊자고 단념해 본다.

까맣게 묻어두고 맘 편히 허리에 군살 오르는 소리나 들으며 뒷짐 지고 살리라 작정을 한다.

누가 강요한 일도, 그렇다고 짐 지워진 숙제도 아니다. 까짓것 없어도 그만이라 억지 오기를 부려본다.

나만이 제게 헌신하며 순정 바치길 바라다니. 천만에 나는 사양하겠어.

짐짓 토라져 모른척하면, 아예 기척 없이 아득히 사라질 것만 같은 그.

그러나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한층 더 간절해지는 그.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애물이었다.



혼자만의 고요한 시각, 나지막이 부르면 어느덧 곁에 다가와 살 부비는 그였다.

절실한 목마름으로 아니면 선혈만큼 한 뜨거움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안겨드는 그였다.

그는 나의 애타게 그리운 기다림의 대상으로 저만치 서있는 빛이자 그림자였다.

그보다는 안타까운, 가슴 저리도록 안타까운 연인이었다.

생각하면 그만큼 가슴 울렁이게 하는 것이 달리 있으랴. 아픈 듯 기쁜 듯 마구 느껍게 하는 것이 또 있으랴.

그는 꽃이다. 그는 햇살이다. 그는 별이고 구름이고 나아가 그는 외경스러운 신(神) 이러니.

그를 향하여 늘상 순연히 타오르는 불꽃.

부디 혼신의 열정으로 목숨 잦아들어 형체 바숴져도 좋으리니 맘껏 타오르거라.

무섭게 격렬한 불길 속에 한 알 사리 남길 수 있다면 타고 또 탄들 어떠리.  



기다릴밖에 없었다. 태무심한 척하면서도 외골수로 줄기차게 그를 기다려왔다.

샘물이 고이길 기다린 것이다.

맑은 물 가득 찰랑이는 샘터에서 잎새 접어 그 물 떠마시며 갈증 다스리리라 기대하면서.

비가 나의 뜰에도 이적(異蹟)을 보이려는가.

풀릴 듯 잡힐 듯한 상. 빗속에 자연이 깨어남처럼 눈뜨는 의식.

넋대 움켜쥔 양 생각 앞질러 춤추듯 한 붓 한번 잡아보고 싶구나.

접신하듯 상이여, 술술 풀어져 거침없이 흘러나오렴.

그를 맞고자, 아니 그와 한 몸 된 순간의 허무를 위하여 한잔 차부터 준비해야겠다.


1989-그를 꿈꾸며 중에서-

  

安分知足이란 오래전 글도 꺼내본다.


....

글쓰기는 자기 정리다. 자기 정화다.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는 작업이고 흐려진 심안을 맑히는 작업이다. 또한 글은 한편의 참회기도이자 성찰일기이다. 때로는 추억을 반추하는 시간도 되고 감정의 분출구 역할도 한다. 그렇듯 글은 내게 있어 언제나 '열린 창'인 셈이다. 전에도 썼지만 나의 글이 감히 난이길 바라지 않았다. 학이 길 원하지도 않는다. 수수한 이웃, 무간한 친구로 족하며 나아가 무엇에도 구애됨 없는 마냥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으로 충분하다. 나의 글은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닌 분청이길 바란다. 태 고운 청자나 백자보다는 쓰윽 휘두른 귀얄 무늬 하나로도 멋스런 풍류 간직한 분청이 되어 매화 저절로 꽃 피어나는 그런 경지를 터득하고 싶을 뿐.



나는 인품이나 생활상이나 두루 지극히 비수필적이다. 몰취미하고 무엇 하나도 잘하는 게 없다. 겸사가 아니라 도무지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다. 살림을 규모 있게 운용해 재산 늘려놓은 바 없고 살가운 아내와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닐뿐더러 효행이 남달리 두텁지도 못하다. 주부로서 응당 잘해야 할 음식 솜씨도 보통 이하다. 게다가 히스테리칼한 성격에 자존감만 별나 고집이 세다. 그렇다고 명문가 출신도 못 되며 공부를 특출나게 잘한 것도 아니고 운동은 아예 평균치에조차 못 미친다. 노래든 흥이든 시원찮아 노는데 어울리지도 못할 정도의 수준이고 말 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며 재치나 센스가 뛰어난 건 더더구나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노력이나 했던가.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갈고닦아 성취시킨 바가 있던가. 아니다. 붓글씨는 길 영(永) 자 쓰는 도중 진력 내 버렸고 꽃꽂이는 일 년을 채 못 채우고 외면해 버렸다. 수석에 몰두하고 난을 기르고 다도에 심취하고 사군자 치는 고아한 아취는 내 몫이 아니었다. 참 딱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대책 없는 한심한 사람도 같다. 그 상태로 어쩌자고 글에 매달렸었는지 어이없기도 하다. 겸사가 아니라 도무지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한가지도 없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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