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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5. 2024

민들레 홀씨되어

ㅡ노매드의 삶, 이민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 이민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휩싸여 건공중에 뜬 나날을 보낸 것이 그럭저럭 이태. 태평양을 넘나들며 새로이 펼쳐질 꿈의 청사진에 함빡 취해 있었던 90년대 후반. 어쨌거나 변화를 갖는다는 것은 신선한 긴장이자 들뜨는 흥분이었다.


1997년, 첫 번째 현지답사여행에서다.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대지가 먼저 나를 사로잡았다. 거기다 물 좋고 공기는 맑았다. 아득히 눈 덮인 로키산맥이 환상적인 자태를 드러내는 그 아래, 빙하가 흘러내린 호수는 투명한 녹빛이었다. 사슴 유유히 노니는 전나무 숲. 푸르른 들판의 소 떼. 비옥한 토질에 풍요로이 뿌리내린 과목들. 자연친화적으로 지은 드문드문한 목조주택. 정체가 없는 한적한 도로. 길가 어디나 지천인 야생화. 영화에 나옴직한 풍경 그대로였다. 첫눈에 반하게 하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다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생활의 실상을 파악하기 전이니 겉모양만으로는 여기야말로 인간이 진정 사는 듯싶게 사는 곳같이 여겨졌다. 축복받은 땅, 내심 군침이 삼켜졌다.



미국 이민을 작정하고는 필요한 서류를 갖춰 번역과 공증을 맡긴 다음 치과 치료에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영어학원을 찾았다. 언어장벽이 가장 견고한 적일 것 같았기에 기초 공략부터 시도했으나 생각만큼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단시간에 신통한 효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조갑증이 날 정도로 답보상태를 맴돌 따름이었다. 결국은 현장에서 부딪히며 익히는 영어만큼 쉽고 빠른 게 없다는 솔깃한 말에 중도에서 책을 덮고 말았다.


그즈음 친지들은 한결같이 이 나이에 무슨 이민이냐고 말렸다. 외국 나가 기반 잡고 잘 살던 사람도 나이 드니 이민살이 청산하고 고향 찾는다는데 가로 늦게 사서 고생할 참이냐며 야단들이었다. 타관에서의 고생도 젊어 말이지 신체 기능이 날로 떨어지는 시기에 객지에서 몸 아프면 어쩔 거냐고 엄포도 놓았다. 심지어 생을 정리해 나갈 단계에 이르러 새로운 시작이라니 가당찮다며 붙잡기도 했다. 모두들 적지 않은 나이(52세)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아들 잘 키워놓고 무슨 망발이냐는 타박에다 어딘들 내 땅만 하겠냐며 애시당초 생각을 바꾸란다. 하필이면 왜 마구 총질해 대는 끔찍한 나라에 가려는지 어이없다 하는 친구도 있었다. 다들 나를 아끼고 배려해 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마운 충고였다.



몇몇 예외도 있었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건강한 의욕, 아직도 새 출발에 대한 가능성을 확신하는 의지가 놀랍다는 견해도 있었다. 앞선 문명권으로의 진입을 축하하기도 했다. 세계화 시대인데 내 나라만 고집할 게 아니라 시야를 확대시켜 보는 것은 바람직스럽다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자식들에게 미래로 열린 지평을 넓혀준다는 의미는 물론 활동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는 격려도 있었다. 아등바등 좁은 땅에서 비비대지 말고 나갈 방법이 있고 여건이 된다면 떠나라며 도전의 용기와 변혁의 결단을 부러이 여기기도 하였다. 더구나 IMF 이후 부산경제는 물론 한국경제가 전반적으로 쇠퇴, 도무지 비전이 안 보인다며 잘 생각했다는 측도 있었다.


누가 뭐라든 이미 단안 내린 이민이었다. 막상 떠나려고 작정하니 가야 할 이유만 드러났다. 개인적으로는 IMF 유탄을 맞아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경제여건이 등을 떠다밀었다. 평소 민감하게 반응치 않던 부분들, 이를테면 공해로 찌든 환경이 새삼 역겨웠다. 정치 사회문제 제반에도 자꾸만 정나미가 떨어졌다. 환멸스럽다 못해 혐오감이 일었다. 외적 요인만이 아니었다. 생의 가을녘에 이르렀건만 무엇 하나 번듯하게 이룬 것 없는 가벼운 손의 허망함. 더 이상 기대해 볼 꿈의 여지가 고갈된 황량감. 확립된 위치도, 당당한 입지도 마련돼 있질 않았다. 변화가 없다면 고스란히 질식해 주저앉을 것 같았다. 정체된 늪에서의 탈출구로 이민을 선택한 것이다.



주저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 낯선 땅에서의 적응 여부도 우려스러웠다. 출발점에 서기엔, 모험을 감행하기엔 아무래도 나이가 의식됐다. 또 있었다. 친정에는 팔순 노모가 계시고 단 하나뿐인 동기와도 외떨어지게 된다. 무엇보다 남편이 장손이라는 위치가 큰 걸림돌이었으나, 그즈음 시어른이 별세한 뒤 불거진 상속과 관련된 문제가 이민 결정을 앞당기게 작용했다.


본격적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려는 데 환율이 급등했다. 계획에 차질이 왔다. 예상 밖의 변수였다. 일단 하던 일을 중단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수밖에. 900원 대에서 1800원 대로 수직 상승한 환율은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이렇게 묶이는구나, 어이없었지만 억지로 무리할 일도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뒷전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멈칫거리는 사이 열기는 차츰 식어갔다. 풍선 바람 빠지듯 처음의 빵빵하던 기분이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의욕이 줄어들면서 자신이 없어졌다. 겁도 났다. 주춤주춤 물러나 앉자 우리를 부른 쪽에서 성화였다. 무조건 오라고 했다. 와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이왕 시작한 일이자 내친걸음. 한 번 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기까지 가세한 한눈팔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민 바람은 가벼이 스쳐 지나는 바람결이 아니라 중심잡기가 힘든 회오리바람 같은 것. 그보다는 일종의 병인지도 모른다. 외골수로만 치닫는 얄궂은 병. 그래서 치유가 쉽지 않은 곤혹스러운 병. 겨우겨우 벗어났는가 싶다가도 증세가 다시 도지곤 했다. 도무지 쉽게 포기가 되질 않았다. 그만큼 아쉬움이 많았던 것이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는 분명히 약속되는 기회의 땅. 그보다도 내가 애초부터 욕심낸 것은 신세계의 풍요가 아니라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환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실의 고단함은 가려진 채였고 내가 본 것은 그저 액자 안의 근사한 풍경이었다. 눈에 삼삼한 미래의 그림들을 완전히 지워버리자니 미련이 남아 자꾸 머뭇거려졌다. 구경 한번 잘했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간 들인 품이 아깝기도 했다.



두 번째 현지답사 때는 마침 한 여름이었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제치고 여전히 미국은 축복받은 낙원으로 비쳤다. 그지없이 청정한 대기, 끝모르게 전개되는 드넓은 평원. 곳곳의 맑은 호수와 원시림을 이룬 무진장의 산림자원. 절경 이룬 해안에는 검푸른 태평양 파도가 속 후련하게 밀려오고 백년설이 녹아내린 강물은 시린 빛으로 기운차게 흐른다. 천연 그대로여서 더욱 경이로운 자연환경이 사람을 단번에 매료시키는 것이다. 세계 최강의 나라, 경제대국 미국이 부러운 게 아니라 오염되지도 훼손되지도 않은 순수한 자연을 가진 미국이 정녕 부러웠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정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캠핑시설이 완비된 공원과 탁 트인 녹지공간인 골프장이 도처에 깔렸다. 무성하게 휘늘어진 산딸기 덤불 너머로 공원이듯 잘 가꿔진 묘지 풍경이 호젓한가 하면 뭇 새소리 여울져 흐르며 속살댄다. 야생 양귀비 무리 져 하늘거리고 소담스레 핀 해당화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오기도 하는 곳. 소음과는 거리가 먼 조용한 마을. 집집마다 잔디 푸른 데다 정원수 새새로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였고 비옥한 토질에 뿌리내린 체리나무 포도나무는 줄기 휘도록 열매가 달렸다.


아름다운 자연과는 달리 추한 이면들도 간과할 수는 없는 일.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인종 문제, 마약 문제, 청소년 문제, 총기 사용 문제 등은 분명 심각한 수준이다. 개인주의의 만연, 급증하는 가정해체, 인명경시와 세기말적 퇴폐풍조 등 고민이 많은 줄 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따름이지 어디나 사람 사는 세상 별다를 게 없는 사바세계. 문제나 갈등 없는 사회가 어디 있으랴.



오히려 힘든 건 낯선 이질 문화와의 융화 그리고 교민과의 조화로운 관계 유지일 것 같았다. 달포쯤 현지에서 지내보니 교포사회의 단면은 거의 한국생활의 축소판을 접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한국 드라마가 이어지는 거실에 김치와 된장이 빠지지 않는 식탁. 사찰이 있고 떡집이 있는가 하면 한국어로 된 정보지는 물론 중앙 조선 한국일보 등 일간지도 받아볼 수 있는 곳. 채송화 나팔꽃이 피는 정원 한켠에 밭을 일궈 마늘 아욱 부추는 물론 더덕이며 머위까지 가꾼다. 어디서나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미각과 정서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한인교회를 구심점 삼아 서로 도와가며 사는 듯하면서도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이를테면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증세가 이역 땅에서도 자주 목격되었다.


내키지 않는 부담 요소는 또 있었다. 어차피 미국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제외하면 모두가 이방인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일군 나라로 다인종의 결집체다. 그럼에도 터줏대감인 양 주인 행세를 하며 유색인을 백안시하려 드는 미묘한 백인들의 우월감이라니. 만민은 평등하다지만 대등한 관계로 만나도 심적으로 알게 모르게 백인 앞에서 위축되고 주눅이 드는 데다 주류사회 외곽에서 어디까지나 조연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는 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교민들은 정평이 난 한국인의 근면성으로 대부분 탄탄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으며 유태인 못지않은 교육열로 자녀교육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위치면에서 동양 사람의 틀을 뛰어넘지 못하는 근원적인 한계성 역시 떨떠름했다. 아무튼 이탈리안이나 터키인은 공항에 내려 미국 땅을 밟는 즉시 미국인으로 동화되어 살아갈 수 있으나 아무리 오래 살아도 동양인은 그저 동양인일 뿐.


아메리칸드림, 꿈은 역시 꿈일 때 아름다운 것.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엄청났다. 이민 간다고 잠자리 날개같이 우아한 한복에 굽 높은 구두 마련해 가도 정작 입고 신을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게 이곳 실정. 미국에선 누구나 골프를 즐기고 야회복 잘잘 끌며 화려하게 파티를 즐길 거라는 생각, 참으로 큰 착각이며 오산이었다. 매일을 일 구덩이 속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는데 레이스 달린 드레스가 가당키나 하랴. 더러 가게에서 정장 차림으로 있으면 손님들이 이브닝 파티가 있느냐고 묻곤 한다. 실제 청바지가 미국인의 상징인 것처럼 작업복 차림으로 부지런히 일해야 살 수 있는 데가 이곳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일할 때는 열심히 일개미 되어 땀 흘려 일하며 톱니바퀴 돌 듯 빈틈없이 꽉 짜인 시간에 매여 살아야 하는 생활. 바쁜 철엔 신문 볼 짬도 없이 하루가 후딱 흘러버리기 일쑤고 밥 챙겨 먹을 틈도 없을 정도이니 어찌 보면 한국에 사는 중년 아낙만큼 편한 백성도 달리 없을 듯하다.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먹통인 말이 제일 고약스러운 스트레스였다. 막히는 언어는 갑갑함을 지나 칠흑 어둠이었다. 기본적인 대화마저 소통이 안되니 바보 천치가 달리 없었다. 웃음으로 얼버무리거나 손짓 발짓 동원으로 땜질하는 건 지나가는 여행객이라면 모를까 실생활 속에서는 어림없는 일. 마침내 나는 백기를 들었다. 얼마를 살아야 '뻐근하다'와 '욱신댄다'의 느낌 차이를 제대로 표현하며 살 수 있겠는가 싶었다. 요원 정도가 아니라 영영 그런 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말이 통하는 곳에서 능란하게 구사되는 우리말로 마음껏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편안할 것 같았다. 쓰고 싶은 이야기 자재로이 풀어가면서 살 수 있는 행복, 나는 그쪽을 택했다. 하지만 내일은 알 수가 없는 것.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으니까.



우여곡절의 일 년이 다시 지난 뒤 기어코 우리는 한국을 뒤로했다. 2001년 이 월의 일이었다. 남편은 현지 정지작업 차 그보다 두어 달 앞서 먼저 미국에  있었다. 흰 눈 소담스레 쌓인 서울을 떠나 아홉 시간 만에 닿은 시애틀. 새벽 공기는 거의 크리스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스멀스멀 무리 지어 흐르던 우윳빛 진한 안개가 시나브로 걷혔다. 탁 트인 대지, 끝 간 데 모르게 광활한 하늘 저편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장엄했다. 절로 두 손 모두게 하는 숭고함. 깨어나는 삼라만상 모두가 경건스럽기조차 했다.


신선한 대기를 흠씬 심호흡해 들였다. 순간 가슴 가득 벅차오르며 솟구치는 감회. 그래, 내가 그의 가슴에 안긴 것이 아니라 나 두 팔 벌려 그대를 내 품에 껴안으리라. 대륙이여, 기다려라, 내가 간다. 나 여기서 반드시 튼실한 뿌리를 내리리라. 그리하여 강건히 뻗은 줄기에 아름다운 꽃 피우리라. 향그러운 열매도 거두리라. 틀림없이 약속하마, 나 그대에게. 자기 다짐 자기 최면을 내심 걸고 또 걸었다. 마음을 똑바르게 세우고 굳힌 생각을 줄기차게 실현해 나가면 뜻이 필경엔 이루어지리니. 긍정적 사고, 자신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다음날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깨었다. 어느새 봄의 전령인 수선화가 청초히 피었고 개나리 망울이 한껏 부푼 뜨락. 위도상으로는 한국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으나 오히려 일찍 오는 봄. 아니면 대륙적 기질을 띠어 저마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녀서인가. 아침인사 보내듯 경쾌히 노래하는 뭇 새들도 거의가 비둘기만 한 크기다. 기름진 대지가 키우는 동식물은 어느 한구석 오종종함이 없이 당차고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온 데마다 치솟은 전나무들도 한결같이 밋칠하니 늠름하다. 마치 녹빛 향유를 내리부은 듯 숲은 짙푸르고 기름지다.



신천지, 땅은 넓디넓고 자원은 넉넉하다. 놀랍도록 잘 보존된 자연이라 공기는 청량하고 물도 더할 나위 없이 달고 순하다. 그렇듯 풍요로운 자연환경에다 절기는 더구나 활기찬 생명이 용솟음치는 새봄. 검은흙을 비집고 고개 내미는 어린순마저 힘이 넘친다. 참으로 은혜가 가득한 아메리카 대륙. 골고루 축복해 주신 이 땅이 몇 년 전 여행길에 들른 나를 강하게 붙잡아 이끌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 그대로 단숨에 혹해 버렸던 것이다. 아무 요량 없이 마치 철부지 아이처럼 그렇게 든 이민병이다. 막연한 동경이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잡아갔고 드디어 민들레 홀씨 되어 가벼이 날아온 미국 땅.


아아, 그러나 공평하신 하늘, 지나친 치우침이 있을 수 있으랴. 수많은 은총이 부어진 선택받은 땅이지만 모든 게 다 두루 좋은 조건만 갖출 수는 없는 법. 예기치 않은 복병 같은 지진을 만났다. 리히터 규모 6.8의 호된 강진이다. 마냥 들떠 오른 감정을 지그시 눌러 다스리라는 자연의 경종이자 말 없는 나무람인가. 하지만 대륙이 안겨준 첫 선물치고는 아무래도 너무 고약스러웠다. 겨우 시차 적응이 될까 말까 한 시점에서 겪은 지진에 혼비백산, 한참을 공포에 질려 얼떨떨한 상태로 지냈다.


그날 아침, 포 소리 비슷한 굉음이 간헐적으로 들리더니 뒤이어 불규칙한 진동이 일며 집 전체가 마구 흔들거렸다. 전등이 쏟아져 내릴 것 같고 커다란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쓰러져 덮칠 것 같은 기세였다. 더럭 겁이 났다.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으나 거실로 통하는 마룻바닥이 파도 넘실대듯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세워둔 괘종시계가 엎어져 부서지고 진열장 안의 유리잔이 한쪽으로 쏠리며 깨어졌다. 예사롭지 않은 위급상황임은 전화 불통에다 전기가 끊어지며 한층 절실하게 다가왔다. 두려움과 황당감 속에서의 몇십 초 후, 대지가 심하게 진저리 치듯 부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흔들림이 멎었다. 한바탕의 거센 용틀임은 지진이었다. 천지의 격랑이 지나가자 얼마간 멀미하듯 속이 다 울렁울렁 메스꺼움이 가시질 않았다.


그 잠시, 험한 제트기류에 든 비행기 같달까. 폭풍의 바다 한가운데에 뜬 작은 배 같달까. 미친듯한 난폭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 같달까.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게 막무가내로 뒤흔들어대던 그 순간. 폼페이 최후의 날이 떠오르고 지구의 종말이 이렇게 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오후 들어 전기가 들어오자 텔레비전의 뉴스는 지진 보도와 피해 속보로 내내 이어졌다. 워싱턴 주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고속도로 봉쇄, 씨텍 공항은 잠정 폐쇄 조치가 내려졌다. 길게 갈라진 도로, 붕괴된 가옥, 균열을 보이는 건물 벽, 박살 난 대형 유리창 등이 자연재해의 가공스러움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난리를 겪은 듯 엉망진창이 된 사무실 풍경이며 슈퍼마켓의 진열대에 쌓아둔 물건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린 모습도 보였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의 표정이 화면에 반복돼 나오는가 하면 놀란 나머지 맨발로 뛰쳐나온 사람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지각 충돌로 인한 지진을 창졸간에 그렇게 겪었다. 고요한 듯하나 쉼 없이 움직이는 지구. 지표 밑에서 두 방향이 다른 판이 서로 맞물렸다가 어느 순간 판 구조가 튕겨져 나오며 발생한다는 지진. 지진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며 피해 정도가 대규모라는데 그 특성이 있다 하였다. 다행히 이번 지진은 강도에 비해 피해 정도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지하 깊숙한 데서 발생하여 지표면에 이르는 동안 그 힘이 많이 약화된 덕이라 했다.


몇 년 전의 일본 고베 지진 참사를 기억하고 있는 데다 얼마 전 인도 강진 소식을 접한 터라 더 두려움이 컸던 걸까. 더욱이 시애틀 부근은 지질학적으로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하는 곳. 인근 지역에는 세 곳의 지진 진앙지를 갖고 있어 지진 재발 위험이 상존할뿐더러 이미 수차 지진도 겪은 터다. 그뿐인가. 금번의 지진은 단지 주의 환기용이자 경고적 지진일 따름으로 언제 또 지진이 발생할지 모른다며 매스컴은 가뜩이나 놀란 사람들 더 주눅 들게 했다.


한국 시간으로 삼일절 새벽 뉴스 시간에 시애틀 지진 소식이 뜬 모양이다. 바리바리 국제전화가 왔다. 안 그래도 이 나이에 무슨 이민이냐며 극구 말리던 친척들 친구들이었다. 하필이면 뜸 들이고 뜸 들이다 마침내 시애틀로 소문도 요란스레 떠난 뒤에 곧이어 닥친 변고이다. 아무 일없이 무사한가를 묻던 친지들은 의외로 밝은 내 음성에 비로소 안도했다. 별일 아닌 듯 태연스레 통화를 나눴지만 기실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 멀리서 뉴스 보도를 접하고 안 그래도 크게 놀라 걱정하던 그들이었기에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했을 뿐이다.


일주일 후에 보내주는 한국 뉴스를 보니 과연 놀랄 만도 했다. 매스컴의 지나친 과장법까지 가세, 엄청난 지진이 시애틀을 강타했다며 표현도 요란스러웠다. 게다가 그날 마침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한 호텔에서 새로이 개발한 시스템 발표를 하던 중에 터진 지진이라서 현장에는 외신기자들이 다수 몰려 있었다. 그들 취재기자들로 하여 위태로이 흔들대던 샹들리에며 책상 밑으로 숨어들던 사람들의 위기감이 박진감 넘치게 전 세계로 즉각 생중계가 되었다.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르는 재난, 죽음 자체가 두렵다기보다 아무 준비 없이 졸지에 지하에 묻혀 비명횡사당하는 일은 결코 원치 않는다. 더구나 새로운 기대감을 갖고 고국을 뒤로한 이민 길이 아닌가. 묘목이 새 흙에 뿌리내려 자리 잡기 전 보다 평화로운 정착지, 내일을 기약하며 안식 누릴 수 있는 땅을 찾아야 했다. 내 생의 여분만을 가꾸기 위함이라면 애당초 이런 모험을 시도할 수조차 없었으리라. 후대의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 무한대로 펼쳐진 지평을 열어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복안이 깔린 일종의 정지작업이기도 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최종의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일단 시애틀을 벗어나기로 했으나 무작정 아무 데나 갈 수는 없는 노릇. 처음엔 어지간히 난감했다. 잠을 설칠 정도의 혼돈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계획했던 일을 전면 재수정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구나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이 처음 계산과는 달리 크게 엇갈려 있었다. 소액 투자로 할만한 사업도 마땅치 않은 데다 적극적으로 우리를 부른 인척의 태도 역시 전과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자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창피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즈음 동부에 사는 외가 쪽 친척의 전화를 받았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우리의 현재 입장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중 외사촌 언니가 흔쾌히 우리를 곤경으로부터 구해주었다. 가방을 꾸려 망설임 없이 동부로 향했다. 진지한 가족회의를 거치고 이모저모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자 과감한 도전이었다. 태평양 연안에서 일곱 시간을 날아간 곳, 대서양 연안의 뉴저지에 그렇게 새 생활의 닻을 내리게 됐다.


뉴저지, 사람 사는 곳 어느 데인들 유다르랴마는 어딘가 모르게 한국과 닮은 자연환경에도 친근감이 들었다. 사철이 분명하고 소나무 참나무 등 산야의 풍경까지 낯설지 않은 땅. 사람들도 대부분 예의 바르고 점잖은 편이었다. 그 풍토가 그 인심을 낳는 것인가. 만나는 한국인들도 살갑고 인정스럽기만 했다. 특히 이곳은 그 어떤 자연재해도 발생하지 않는 곳, 지진은 물론 토네이도나 허리케인과도 관계가 없는 지역이라 한다. 대륙이 내게 준 첫 선물인 지진. 그러나 오히려 천만다행이라 여겨졌다. 만일 터 잡고 뿌리내려 일을 진행시킨 상태라면 삶의 근간을 옮긴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었을 터. 하늘의 보살핌에 돌이켜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높은 곳에 예비된 신의 뜻을 인간의 얕은 지혜로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결과적으로 우리를 보다 나은 땅으로 인도해 준 대륙의 첫 선물인 지진에게 그래서 지금은 고맙다 하고 싶은 심정이다.



때는 바야흐로 무르익은 봄. 삼라만상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삼월이었다. 한국에서처럼 개나리가 덤불 져 피어났으며 초록 잔디 위에 민들레가 금화를 뿌린 듯 환하게 깔려 있었다. 민들레는 아침해와 눈 맞춤을 하며 꽃을 피운 다음 노을이 지면 꽃도 진다. 그 하루의 역사만으로 무수한 씨앗을 준비하고는 마지막 기운을 다해 꽃대궁을 높다라니 밀어 올리는 민들레. 비눗방울같이 가벼운 홀씨들이 저마다 하얀 깃털을 타고 낯선 세상으로 멀리 날아가 자리 잡도록 배려한 신의 섭리다. 황무지든 박토든 어느 땅이나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리는 왕성한 생명력의 민들레는 강인한 기질대로 잔설 속에서도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다. 그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멀리 날아와 새로운 땅에 뿌리내린 이곳 뉴저지.



남미로 첫 이민을 떠났다가 미국으로 온 외사촌 언니네는 세탁공장을 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었다. 언니네 가족의 성심 어린 도움과 배려로 뉴저지에 안착한 우리는 때마침 시행 중인 특별법의 적용에 따라 취업비자를 신청할 수가 있었다. 모든 게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어 갔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동시에 드랍샵이라는 작은 비즈니스를 인수했다. 앞뒤 조건 따질 형편이 아니므로 무조건 겁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비행장에서 이민 보따리를 누가 픽업해 주느냐에 따라 미국살이의 직업이 결정된다는 속설 대로였다.



그렇게 낯선 일에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인 다섯 달째. 청량한 가을 기운이 감도는 九월 아침이었다. 아홉 시가 채 안 된 이른 시각 전화벨이 울렸다. “얼른 텔레비전 뉴스를 보세요.” 외사촌네서 온 전화는 황급히 그 말 한마디만 전했다. 한국에 무슨 변고라도 생겼나? 덜커덕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국 상황을 잘 아는지라 겁부터 났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는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 게다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존재인 북한이 아닌가.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에 가득 찬 것은 시커먼 연기와 화염을 토하는 고층 건물, 미국 경제력의 표상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였다. 무슨 에스에프 만화 장면처럼 건물 상층부에 비행기가 반쯤 꽂혀 있었고 뒤이어 총알처럼 센터를 향해 곧장 날아든 다른 여객기가 폭발하며 건물은 모래성 허물어지듯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미국 심장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정치 중심지로 군사력의 표징인 워싱턴의 펜타곤도 불타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이웃한 펜실바니아 평원에 여객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터졌다.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테러를 당한 미국, 건국 이래 최악의 날로 기록될 9월 11일이었다.



테러를 배후 조종한 수염 기른 아랍인이 화면에 비쳤다. 사건의 진상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 국적기의 항공사가 가지는 상징성을 겨냥하여 아메리칸 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사를 선정하고 국제선에 비해 보안검색이 비교적 덜 까다로운 국내선 중 최장거리 노선인 대륙횡단 비행기를 선택했다. 4만 리터에서 7만 리터의 연료를 내장한 비행기는 악용할 경우 고성능 폭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납치 여객기로 가미가제식 기습공격을 가한 테러 집단에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너나없이 인간임이 부끄러웠으며 숫제 망연자실, 말을 잃었다.


무차별적 대량 인명 살상. 전쟁이 달리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전대미문의 테러로 110층 건물과 함께 3천8백여 명의 생명이 참혹하게 죽어갔다. 그 다음날까지도 뉴욕 시가지는 연기로 부옇게 흐려있었고 두터이 내려앉은 허연 분진과 폐허의 잔해는 핵전쟁을 다룬 <그날 이후>란 영화를 방불케 했다. 아비규환의 현장, 지금은 그라운드 제로라 불리는 곳에는 애도의 인파가 이어졌다. 미국인들은 한 목소리로 응징을 결의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세상은 흉흉한 기류에 휩싸였고 금방이라도 3차 대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팽배했다. 911 사태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문명 충돌이라고도 했고 냉전 붕괴 이후 미국의 오만과 독선이 부른 인과응보라고도 했다. 아무려나 그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폭력, 테러, 전쟁은 용납되어선 안 되는 절대악이다.


미국이 아프간과의 전쟁을 치르는 와중, 백색의 공포라 일컬어지는 탄저균 우편물이 백악관과 국회에 날아들며 다시 긴장을 고조시켰다. 뉴저지 캐피털 시티인 트렌턴 우체국에서도 탄저균 우편물이 발견되자 주변이 약간 술렁이기도 했으나 다들 생업에 종사하며 그런대로 평온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나라 안보다 미국 밖에서 더 야단들이었다. 연일 속보로 전해지는 놀라운 외신을 접하며 친정 언니는 좌불안석이었다. 어째서 넌 사건 터지는 데로만 쫓아다니느냐고 기막혀하면서 거기서 고스란히 죽으려고 하느냐며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야단이었다. 친구들의 성화도 이어졌다. 뉴저지가 도대체 어디 붙어있는가를 묻는 친구들에게 워싱턴과 뉴욕 중간에 위치해 있다고 했던 터. 그 난리통에 무슨 변을 당한 건 아닌가 다들 걱정하며 아무튼 국제전화 회선만 바쁘게 만들었다. 또한 그 바람에 영주권 발급 등 이민국 업무가 지체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진 같은 천재지변까지는 아니어도 저지난해는 엄청난 폭설에 갇힌 적이 있는가 하면 지난해엔 허리케인을 만났다. 무릎 가까이 빠지는 폭설도 어마무지했으며 특히 허리케인은 직접 영향권 안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굉장했다. 잿물 빛 음울한 하늘을 가르며 스펙터클한 장관을 연출하는 번개. 지구 한켠이 무너져 내리듯 지축을 흔들어 대는 천둥소리. 죽창처럼 내리 꽂히는 빗줄기에 세상을 요절낼 듯 마구잡이로 난타하는 바람까지 그 기세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그녀가 온다,라는 뉴스 자막과 함께 텔레비전 화면 가득 팜 츄리가 미친 듯 요동쳐댔다. 성난 파도가 밀리는 해안은 일단의 백마부대가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듯했다. 물에 잠긴 마을이 보이고 해일에 쓸려 집과 다리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장면도 나왔다. 지역에 따라 주민 대피령이 내렸는가 하면 워싱턴 디 시와 몇몇 주에는 비상령이 선포됐다. 대서양 함대가 해군 기지를 떠나 안전한 내해로 피신했다더니 대통령도 백악관을 비웠다고 했다.



부산에 살 적에도 몇 번 태풍을 만났다. 일본 열도를 통과했다 싶으면 어느새 대뜸 부산 앞바다에 거친 숨을 풀어놓던 태풍. 가로수가 뿌리째 뽑히고 간판이 휴지장처럼 날아다니는가 하면 해변가 횟집은 초토화되기 일쑤였다. 그처럼 직접적으로 태풍을 겪어 보았지만 여기에서만큼 자연의 위세에 기가 질리지는 않았었다. 한국에서라면 경험해 볼 수 없는 갖가지 일들을 겪어내는 그 사이로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미국살이를 해온 지 어느새 만 삼 년이 지났다.



그간 평생 한 일보다 몇십 배 더 많은 양의 일을 해냈다. 일, 거의 일과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나날. 그동안 너무 한가로이 편하게 지냈기에 일을 해보고 싶다며 스스로 자원했는데 어디 한번 해봐라 하고 왕창 안겨진 일더미. 일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맛 보여 주는 이민살이인 셈이다. 그렇게 일 구덩이에 빠져 하루 열 시간 넘게 일하노라니 저녁엔 기진맥진 녹초가 되고 만다. 생전 아프지 않던 허리도 결리고 그야말로 전신만신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쯤에서 그만 항복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적도 있었다. 책은커녕 신문도 제대로 볼 짬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다 보면 노동수용소에 들어온 것도 같고 꼼짝없이 갇힌 생활이다 보니 유배지가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조차 일을 마친 연후인 밤에나 가야 하는 여기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가고 있는 자신이 때로는 낯설게 여겨지기도 했다.



처음 이곳 동부로 올 때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주간신문 편집 기자 내정을 받아둔 터였다. 허나 막상 닥치고 보니 필라까지의 출퇴근도 녹록지 않은 데다 명함은 그럴싸하지만 통상 주급으로 매겨지는 보수가 다른 일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작은 비즈니스였다. 처음엔 꽃가게를 열었다. 밸런타인데이와 머더스데이에는 예상외로  크게 재미를 봤다. 그러나 상가가 있는 몰 전체가 부도로 문을 닫았다. 외사촌이 운영하는 세탁소가 괜찮아 보여 플라워샵의 미련을 접고 작은 드랍샵을 열었다. 불황이라고 했지만 호황기를 누려보지 않은 나로선 그 정도의 쏠쏠한 경기도 만족이었다. 정성을 다해 임하다 보니 입소문으로 가게 손님들이 늘어나 수입도 조금씩 상향곡선을 그어갔다. 그런 내 케이스를 두고 다들 럭키하다고 했다.



내가 하는 세탁소 일은 처음 하는 일이지만 평소 살림을 살아본 여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비교적 친근한 일이라 쉽게 적응, 내 가족 옷을 다룬다는 생각으로 이끌어 나가다 보니 옷을 맡기는 사람들도 점진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샤핑 몰마다 총총 박힌 드랍샵인데 그래도 우리 가게를 믿고 단골 삼아 찾아주는 고마움에 답하고자 내 나름껏 최선을 다해 비즈니스를 운영했다. 오피스 가와 인접해 있고 까다롭다는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지만 그리 까탈스러운 손님은 별로 없는 편이라 특별한 어려움 없이 가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 아직도 손님들과의 원활한 언어소통은 어림없고 단지 몇 개 단어의 조립으로 대화 아닌 대화를 이어가며 답답한 대로 그럭저럭 카운터를 지키는 수준인 나. 그나마 이만큼의 귀라도 열려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고 별 실수 없이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음은 실로 크게 감사할 항목이다.



아침이면 겨우 눈 비비고 집을 나서서 오픈 사인을 켜는 순간부터 다시 반복되는 일, 일, 일. 그렇게 단내가 나도록 일이 고된 반면 이 생활에도 잔재미는 있다. 대충 감으로 눈치로 알아듣는 말이지만 그래도 콩트 감 같은 미국인들의 일상과 직접 접하는 재미. 이른 봄이면 버들가지와 수선화로, 크리스마스 시즌엔 츄리와 산타 그리고 포인세티아로, 여름엔 조개껍질과 유리구슬로, 핼러윈 무렵엔 짚인형과 호박으로, 철에 맞는 장식을 하는 등 가게에 변화를 주는 재미 진진했다.



마음 맞는 친지들이 찾아오면 잠시나마 망중한의 한때 티타임을 갖기도 하였다. 그들이 넉넉한 인심과 함께 싸 들고 오는 따스한 부침개며 쑥떡을 맛보는 즐거움도 따랐다. 엄마 따라 드나드는 어린 소녀가 선물이라며 바이올렛 작은 화분을 안고 오는가 하면 시실리 다녀오며 사 왔다는 벽걸이 탬버린을 전해주는 다정한 이국인들과 인정을 나누는 재미. 특히 한 유대인 부부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갔다가 한국 미술전이 열려 사 왔다는 신라 와당 탁본을 받고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스카프가 잘 어울린다고, 반지가 멋지다고, 옷이 근사하다고,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을 항시 준비하는 그들이 있어 행복한 나날이기도 한 이곳 생활. 비록 옹색한 아파트에서 무엇 하나 옳게 자리가 잡히지 않은 채로 곧 철수할 부대처럼 뜨내기 같은 살림을 꾸려가지만 말이다.


일부 예외도 있긴 하나 거지반 초기 이민생활은 거칠고 불안정하기가 야전군 생활이나 진배없는 것 같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최소 오 년쯤의 세월은 흘러야 할 듯싶다. 그래도 승부가 안 나면 퇴각이던 귀환이던 진지하게 고려하리라 했는데…. 하긴 이민살이를 하는 것도 다 역마살이 낀 탓이고 팔자소관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 십여 년 전만 해도 이민은 꿈도 안 꿔봤다. 당시 형제 초청 서류를 넣어두자는 미국 사는 인척의 제안을 받고도 전혀 염두에 두질 않았으니까. 십 년 후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미국에서 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운명인지 아니면 신의 뜻인지 하여간 무언가 아지 못할 힘의 작용이 이민살이에도 적용되는 것만 같다.


이민, 어쩐지 물결치는 대로 떠다니는 부평초가 연상되기도 하고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는 민들레를 떠올리게 한다. 평소 강 건너 남의 일로만 알았던 부평초의 삶, 민들레의 생을 우연찮게 시작하게 된 나. 나름대로 구체적인 사전조사를 했다고 하나 막상 닿고 보니 그것은 막연한 희망사항이었고 환상이 아니었던가. 무언가를 쉽게 이룰 것 같던 처음 생각과는 달리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낯 설고 말 설은 타국. 힘든 여건임에도 노력한 만큼은 틀림없이 보장되는 내일에 대한 꿈을 안고 저마다 속 골병 마다하지 않으며 하는 일에 전력투구를 하는데 결국 나이 들어 만신창이 되어 병치레로 지새는 이웃들. 하긴 사람 사는 일 어딘들 별다르겠는가만은 그래도 이건 아닌데 싶기도 하다.


어느 목사로부터 들은 얘기 한 토막. 사시사철 아름다운 천국에서 평화롭다 못해 심심하게 살던 사람이 하느님을 졸라 사흘간 말미로 지옥 구경을 갔더랬는데 별의별 인종들이 뒤엉켜 사는 그곳이 너무 신기하고도 재밌어서 아예 눌러 살기로 작정하고 하느님의 허락을 받아 다시 지옥에 가 실제로 살아보니 전과는 달리 유황불 이글대는 고통 바다였던 것. 이게 웬일인가 깜짝 놀란 그가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그게 방문자와 이민자의 차이라고 하더란다.



3년이 고비라 했던가.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긴 하지만 문화와 관습과 정서가 다른 데다 얼굴 바탕마저 다른 타국 땅. 때문인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어쩐지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양 살뜰한 정이 붙질 않는다고 한 어느 분의 고백이 수긍되기도 하며 문득문득 회의감이 파고든다. 향수병도 도진다. 수구초심, 연어만 한사코 제 본원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니다. 여우도 죽음에 이르면 제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했다. 아니 그건 생명 있는 모든 것의 본능은 아닐지. 나뭇잎은 가을이 되면 고요히 뿌리짬으로 낙엽 져 내린다. 본향으로의 회귀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교민 다수가 나이 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살겠다고 벼른다. 하지만 돌아간다는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만 그칠 뿐, 사업에 성공하면 일에 얽혀 몸을 뺄 재간이 없고 사업에 실패하면 초라한 꼴로 귀국길에 오를 용기가 없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 자녀들 교육받고 뿌리내려 살면 떠날 수가 없게 된다. 그때쯤이면 나이 들어 완벽하다는 사회보장제도의 수혜자도 될 테고.



분단국인 한국의 미래가 불확실해서든, 정치행태와 사회상에 환멸을 느껴서든, 자녀들에게 더 넓은 지평을 열어주기 위해서든 , 환상을 좇아서든, 도피든, 모험이든 아무튼 뒤늦게 이민살이를 시작한 미국은 물론 살아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땅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권능 아래 무릎 꿇을 수 있는 기회가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내게 영영 오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삼십 수년 독실한 불자로 마음공부를 하며 곁눈팔지 않은 내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게 됐으니, 가로 늦게 이민 바람이 분 이것도 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부르심의 방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젠 비즈니스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성장기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여겨지는 이즈음. 이민 삼 년 차에 이르러 나는 최대의 갈등 국면을 맞았다.


자유분방한 아버지 그늘에서 온갖 고초 감내하며 오로지 자식 위해 평생을 희생과 헌신으로 일관하신 어머니가 몇 달째 노환으로 와병 중인데 어느 날 홀연 세상 뜨면 그 회한 어쩔 것인가. 희미하게 잡고 있는 생명의 끈 속절없이 놓을 날 다가오는데 엄마와 나 이대로 영영 작별할 수는 없는 일. 생각만으로도 이처럼 눈시울 더워지고 목이 메는데…. 보장된 생활은 물론 영주권이고 무엇이고 다 포기하고 떠나려는 날 이성적이지 못하다며 주변에서 모두 다시 생각하라며 말렸다. 내가 곁에 있다 하여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하실 것도 아니고 돌아가신 다음엔 이래도 저래도 후회뿐이더라며 감정의 사치를 부리지 말라고도 한다. 부모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도 불효라 했거늘 이미 바다 건너 먼먼 미국까지 떠나와서 새삼 효녀 노릇하려고 유별 떠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한을 안고 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나아가 지금 아니면 다시는 한국에 돌아갈 명분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다.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는 어쩌면 지금뿐이다.



그러나 안정된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포기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걸리는 게 또 있다. 함께 온 딸아이는 당분간 여기 혼자 남아있어야 한다. 고고학 관련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왔다가 진로를 바꿔 현재 한의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내년 말에라야 학업을 마치게 되기 때문이다. 신경외과를 전공한 오빠와 훗날 한양방을 겸한 병원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과정을 밟아 준비를 할 뿐 이루시는 것은 하느님이심을 이제는 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아들은 지금 부산의 종합병원에 재직 중이다. 그 아들이 헤어지며 눈시울을 붉히는 내게 “아주 살러 가시는 게 아니라 긴 여행을 떠나는 거라 생각하세요” 했듯이 이제 아쉬움 남긴 채로 여행을 접어야 할까.



막상 여기 생활을 정리하려니 아쉬움도 크고 일면 두렵기도 하다. 한국에 돌아가 새로이 자리 잡을 때까지 생활의 불안정이 몰고 올 여러 어려움들. 더구나 돌아가기엔 한국의 제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음도 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나오려고 안달인 그 한국. 그럼에도 다시금 내 안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바람. 가파르다는 ‘삼 년 고개’를 눈 질끈 감고 그냥 넘어설 것인지 이쯤에서 되돌아가 그리운 사람들과 어울려 편안하게 살 것인지, 고갯마루에 서서 나는 지금 방황 중이다.



안개 같은 봄비가 내리던 만 삼 년 전의 어느 날, 암트랙에서 내려 생경함 속에 두리번거린 필라델피아 역사 로비 중앙에서 수호천사의 조각상을 보았다. 그 천사 조각처럼 곤고한 이민생활에 지친 누군가의 어깨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그런 사람이 나 반드시 될 것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나 또한 수호천사가 되어 외사촌의 베풂에 간접적이나마 답하리라 속다짐도 했었는데. 그래, 바람의 방향은 하늘에 맡기기로 하자.



여곡절의 초창기가 지나고 삼 년이 흐른 즈음에 썼던 글이다. 그로부터 십 년도 훌쩍 지나갔다. 그럭저럭 이십 년 후, 별다른 고민없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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