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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2. 2024

어떤 우화등선

언니가 지난달에 홍시인의 신간 시집을 받았노라고 했다. 표지 담백한 세 번째 시집으로 문학상을 수상했다고도 하였다. 시집을 건네받던 자리에서 홍시인이 내 소식을 묻더라고 했다. 정년으로 공직을 마무리한 다음, 향리로 돌아와 지역 문화원에서 시 강의 등 자원봉사를 하는 중이라는 홍시인. 소년기에는 또래 아이들보다 왜소한 편이었는데, 나이 드니 알맞게 체중도 늘어난 데다 은발이 중후한 멋을 풍기며 보기 좋게 늙어가고 있더라고 했다.



한 학년 아래인 그는 같은 동네에 살았으나 어릴 적 일은 별로 기억나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게 조용할뿐더러 평소 친구가 거의 없어 늘 외톨이로 지내던 아이. 누구도 그와 가까이하지 않는, 이를테면 왕따를 당하는 아이였다. 말수가 적고 항상 시선을 바닥에 둔 채 걷던 그는, 혼자서 뒷동산 소나무에 기대서서 하모니카를 불곤 했다. 학교 도서실에서 대출받아온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친구들과 노송이 듬성듬성 선 뒷산에 올라 문학소녀 흉내를 낼라치면 늘 걸리적거리던 아이였다. 우리가 재잘거리며 산에 오르면 그 애는 하모니카를 툭툭 털면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 애는 산자락 아래 제법 커다란 함석집에서 살았는데 중학교 서무주사인 아버지는 안경잽이로 통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일본 유학 중에 만났다는 일본여인이었다. 일본이라면 치를 떨던 당시의 정서, 그러니 그 애를 경원시할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는 건, 철없던 애들로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다만 그의 누나인 영자언니는 상급생이기도 하였지만 전교 수석을 도맡았던 수재로 학생회장이라 아무도 얕보는 이가 없었다. 자그마한 체구이나 다부진 그 언니의 카리스마는 빳빳한 교복 칼라만큼 확실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편에서 들 곧잘 삐쭉거리며, 집에서는 에이코라 불리는 아이녹그라서 공부 잘하는 라고 폄하했다. 외견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생겼고 한국말을 썼으나 일본인의 피가 섞였대서 알게 모르게 따돌리며 기피했던 아이. 미국 교민사회는 두말할 것도 없고, 요즘처럼 다문화가정이 흔한 세월이라면 한국에서도 예사로운 일이겠지만 그때는 50년대 말이었다.



기억에서 까맣게 잊혔던 그를 장년 즈음 문학동네 언저리에서 만났다. 그때 새삼 통성명을 하며 악수를 나눴다. 펜대만 놀린 사람다이 손이 부드러웠을 뿐 아니라 인상도 퍽 맑았다. 여전히 식물성에 가까운 품성으로 목소리는 낮았으며 무척 겸손했다. 외려 경상도 억양까지 덧보탠 내 말투가 교양 없이 거칠고 드높았다. 이후 고향 문학지에 실린 기고문을 가끔씩 보았으나 미국에 온 이후론 근황을 알 수가 없었는데, 세 번째 시집 얘기와 수상 소식을 들으니 반가웠다. 유달리 '나와 다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수용보다는 완강히 거부부터 하고 보는 한국인이다. 그러니 호의적인 사람을 만나기는커녕 거의 이방인 보듯 하는 주위 시선에 주눅 든 채 기를 못 펴고 살아야 했던 소년. 걸핏하면 환경 탓, 세상 탓을 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반면, 모멸감뿐인 껄끄러운 조건하에서도 비비 꼬이거나 빗나가지 않고 심성 바르게 성장하여 그가 사회인으로 한몫을 다하고 살았음이 미쁘고도 장하다.   



앞뜰 관상수에 처음 보는 벌레가 두 마리나 붙어 있었다. 크기도 하거니와 선명한 색채 때문에 금방 눈에 띄었다. 아무리 고운 색깔 외피여도 꿈틀거리는 애벌레는 징그러워 누구에게나 비호감이다. 호랑나비 유충이란 걸 모른다면 아마도 얼른 송충이 제거하듯 떼내버릴 터였다. 그처럼, 구슬 같은 알에서 깨어나 초록잎을 먹고 자란 유충이 번데기를 거쳐 우화해 아름다운 호랑나비로 부활하기까지에는 외부로부터의 생존위협에 수차 직면도 하리라. 뭇 역경을 감내해야 하는 호랑나비의 한살이만이 아니다. 생의 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 준비과정도, 어떤 어려움도 없이 처음부터 순조로이 여 보란 듯 척~이루어지는 성취란 없다. 소년기, 편견과 냉대 속 홀로의 시간을 잘 갈무려 문학으로 승화시켜서 오늘에 이른 홍시인이 우화등선한 호랑나비에 겹쳐짐은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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