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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2. 2024

법화사 호숫가에 물화(物華)가 그윽하니

요새 갈만한 곳으로 소개된, 배롱나무꽃 흐드러진 법화사 글을 접했다.

'법화사 호숫가에 물화(物華)가 그윽하니/대나무 소나무 휘둘러있어 혼자 스스로 유유하다'

고려 때 고승 혜일 선사가 쓴 시구를 본 순간 서둘러 하원동에 있는 법화사로 향했다.

구품 연지에 피어있는 연꽃과 연지를 둘러싼 수목들로 장관 이룬 사찰 모습 상상하니 동계가 일었다.

한문 세대에 속하는지라 그 분위기가 소상하게 그려졌으므로.

물화(物華)는 만물 물物에 빛날 화華, 곧 어떤 물상이 발하는 아름다운 빛이다.

누구라도 좋은 경치(물화:物華)를 대하면 시심까지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특별한 감흥이 발동한다.

백일홍꽃에 연꽃까지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으나 시기가 지나 어떨지 몰라서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요샌 조경수로 각광받아 흔해진 배롱나무다.

백일 동안이나 꽃 붉게 핀다고 백일홍, 이름이 두 개다.

반세기도 훨씬 더 전인 유년 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놀러 간 외가에서다.

허리 굽은 배롱나무 진분홍 고운 꽃에서 향마저 혼몽스레 번지는 여름날.  

붉은 댕기를 들였던 것 같은 외사촌 언니 따라 배롱나무 그늘 드리운 우물에 갔다.

외사촌 언니는 저녁 지을 보리쌀을 자배기에 쓱쓱 치대고 있다.

시린 물 찰방찰방 넘쳐흐르는 돌샘, 층층 고인 청석에 낀 연둣빛 이끼가 바가지 질 할 적마다 순하게 한들거렸다.

물꼬 따라 뽀얗게 떠내려가는 뜨물 속에서 송사리 떼는 이리저리 자발없이 나댔다.

그걸 잡겠노라 포플린 원피스 뒷자락 젖는 줄도 모르던 어린 나.

머리 위로 하르르 하르르 백일홍 꽃잎이 떨어졌다.

물길 흐르는 대로 꽃잎은 하늘대며 멀리로 흘러갔다.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 터 (法華寺址) 지방기념물 제13호다.

고려 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난한 제주 역사의 질곡 속에서 소실, 중창을 거듭해 왔다.

현재 있는 법화사는 완전히 불타버린 잿더미 위에 1988년 새로 건립한 사찰이다.

이원진이 쓴 탐라지(1653) 기록은 이러하다.

"절터와 나한전 자리의 주춧돌과 섬돌을 보면 모두 크고 정밀하게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전성 시기에는 규모가 굉장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단지 초가 암자 몇 간만이 있다.

그 서쪽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는데 절 앞 논에 물을 댄다, "라고 쓰여있다.  

물맛 좋은 용천수 덕에 지금도 호수 늘 물 가득 찰랑대는 고즈넉한 절이다.

물화(物華) 뜻 그대로 백련 자욱한 연못가 빙 둘러 배롱꽃 하느작거리고 잘 생긴 나무들이 경내에 수두룩하다.

철 한참 지나 지금은 백련화 단 한 송이 우릴 맞아주었지만 배롱나무 꽃 한창인 데다
폭염에 단 풀 향기 은은히 번지는 깔끔한 정자에 오르니 사방에서 청풍 불어온다.

풍경소리도 바람결 어딘가에 스며들었음직한 오후, 무아정적의 한 순간 선정(禪定)의 경계도 얼핏 스친 듯.​

이 여름 한번은 찾아볼만한 법화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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