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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3. 2024

청령포 참나리

 
푸르름 일색인 칠월 산하 예서제서 왕성한 생명력이 거침없이 넘실거렸다. 산 청청, 물 청청인 강원도 오지 영월. 기골장대한 태백의 봉우리가 겹겹으로 에워싸인 그 아래, 산자락 따라 흘러내린 골물은 아득히 길고 깊었다. 가도 가도 끝날 줄 모르는 강줄기 따라 내쳐 달음질치던 차가 이윽고 멈춘 곳은 청령포.

 
6월 22일,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온 날이다. 청령포, 누가 찾아냈을까. 그보다 더 탄식 깊게 만드는 유배지란 있을 수 없을 만큼 참으로 기막히게 생긴 지형지물이다. 뒤편은 단애요 앞을 가로막는 건 시퍼런 강물. 육지에 뜬 섬에 다름 아닌 청령포였다. 반달 같은 나루 그 건너로 우거진 송림마저 아득하니 수수로워 보였다.

 
막막한 심정으로  강물 앞에 섰을 단종, 내일을 기약 못할 목숨이라 세상사 체념한 채 나룻배에 올랐을 단종의 동안(童顔)이 어린 강물은 묵직한 암녹빛이었다. 그만큼 깊어 보였다. 줄배에 의지해 청령포에 들어 노산대를 찾았다. 머나먼 한양 바라며 애끓는 심사로 절벽 꼭대기 노산대에 올라 서리서리 맺힌 한과 시름을 허공에 뿌렸을 단종. 절벽가 녹음 그늘 여기저기 핀 주황빛 나리꽃  고운 빛깔이 오죽 처연스러웠으리.  

 
종교가 가르치는 이치대로라면 벌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것이라야 마땅하건만 이처럼 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단종. 비록,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숱한 죄를 짓고 사는 중생사라지만 고작 열 일곱 해를 산 소년이 죄를 지은들 무슨 그리 몹쓸 죄를 지었으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모순투성이 세상이라 해도 너무나 불공정한 결론이 아닌가 싶었다. 살면서 때때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싶을 만큼 억장 막히는 일 당하면 흔히 그래서 전생의 업으로 돌리는지 모른다. 내가 지은 업보 탓이다, 가슴을 치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움이 오히려 감당하기가 수월한 때문인지도. 아니면 위화도에서 회군하며 피비린내를 일으켜 새로운 사직을 세운 몇 대 윗조상이 저지른 죄과를 엉뚱하게도 먼 후손에게 물었던가.

 
정직한 인과법에 따라 선인선과(善人善果) 요 악인악과(惡人惡果)가 현세에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나고 적용된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지고 향기로워지련만. 하긴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화를 만나며 선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하였으니.



나어린 조카를 내친 숙부 수양, 하늘에 머리 두고 살며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역사는 단죄 못해도 하늘만은 정녕 무심치 않아 모진 심신의 고뇌를 수양에게 안겼음 이리. 애사(哀史)로 기록된 한 많은 단종의 생애. 덧없이 죽음에 이르러 시신마저 강가에 버려진 것을 몰래 거두어 장사 지낸 지방관 엄흥도의 애태운 심곡인가. 참나리 꽃잎에 점점이 새겨진 흑자색 반점들이 오늘 더더욱 어룽져 보인다.  1989




         참나리로 찾아온 단종과 엄홍도


요즘 들어 어딜 가나 참나리꽃이 한창이다.


동네 공원에도 이웃집 화단에도 하다못해 길섶 풀숲에조차 선연한 주황빛 참나리가 제철을 맞아 무리 지어 피어있다.


송이송이 환하게 웃으며 늘씬한 꽃대위에서 나붓거리는 참나리꽃.


나리꽃을 보자 불현듯 떠오르는 그곳, 청령포


청령포를 근 삼십 년 만에 다시 찾았다.

 당시는 양 켠에 매 은 줄을 사공이 잡아끄는 힘으로 나룻배가 움직였는데 이젠 전기모터 달린 배로 금방 강을 건넜다.


숙부 손에 생사여탈권 쥐어진  여기 이르렀을 열여섯 소년 노산군.


가슴 아린 그 장면이 떠올라 코끝 아릿해진다.


이 강물에 피눈물 섞었을 초췌한 단종을 전송하며 산천인들 낙루치 않았으랴.


무심한 듯 흐르는 나루 건너 우거진 송림.


청청한 푸른빛마저 애련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묵연히 솔밭 사잇길 걸어가며 오래전 기억 속 흔적을 더듬어봤다.

청령포 솔숲에 묻힌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禁標碑)


주변 풍물이 전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


한옥으로 만든 유배처가 들어섰고 애끓는 심사를 글로 읊은 시조 몇 수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단지, 엎드려 단종을 맞았다는 허리 굽은 소나무와 관음송만 여일 할 뿐이다.


육육봉 꼭대기 노산대 오르는 산길도 데크와 계단으로 잘 다듬어졌다.


하지만 전에는 언덕길 잔뜩 구부린 채 걸어가던 노인들 이젠 층층 난간 꼭대기 무릎관절 삐걱대 올라가긴 글렀다.


하염없이 한양 바라보며 서리서리 쌓인 시름 허공에 뿌렸을 노산대.


헌데 거기 올라 강 건넛마을을 바라보니 두서없이 들어선 주황빛 지붕들 몹시 거슬린다.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청령포라면 전망 정도 배려는 응당해줘야 하련만 식견과 안목이 거기까진 못 미치는 듯.


일선 행정부처의 단견이 안타깝기만.



심사 무겁고 추연한 채 청령포를 뒤로하고 그다음에 찾아간 곳은 장릉(莊陵).


1970년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장릉이다.


다른 왕릉과 달리 산언덕에 높직하게 자리한 장릉에 이르러서야 그나마 마음 좀 눅어졌다.

경내 들어서는 너른 길 양켠 해묵은 느티나무에 청사초롱 매달은 뜻은, 먼 후대 찾아오실 임 반기고자 하는 마음이런가.


단종 기리는 비각과 영월 부사였던 박충원을 기리는 낙촌 비각, 그리고 단종을 거둬 모신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旌閭閣 앞에서는 절로 옷깃 가다듬어졌다.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는 홍살문 지나 능에서 제례 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정자각을 스쳤다.


잔디 잘 다듬어진 전망 좋은 위치에 의연히 자리한 장릉 앞에는 석수가 지키며 상석 반듯하고 장명등과 문인석(무인석은 없음)이 배치돼 있었다.


솔숲이 병풍처럼 감싼 봉분 뒤로는 벽돌에 기와를 인 곡장이 아늑하게 둘려있다.


조선왕가 어좌(御座) 뒤로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배치된 역사관은 돌아 나오며 들렀다.


재위 3년 2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인 실록과 사육신의 한 분인 매죽헌 성삼문의 시문집에 한참 시선 머물렀다.



 
열일곱 살 노산군은 영월 동헌에서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다.


시신은 강물에 버려진다.


단종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괜찮다며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몰래 시신을 거둔다.


노모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관과 수의로 단종을 고이 모셔 선산인 현 위치에 묻는다.


 그 후 세월 흘러 흘러 중종 때다.


영월 군수로 부임한 문경공 박충원의 꿈에 노산군이 현몽하므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노산묘를 찾게 된다.


이백 년 세월 뒤에야 중종이 봉분을 갖추었고 선조가 상석과 망주석 장명등을 세웠다.


 숙종은 단종 신위를 종묘에 올리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각은 영조 때 세워지고 순조는 공조판서로 추증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게 된다.

누군가는 평생 흉한 병으로 고초 겪다 죽어서는 왕위 찬탈자로 영영 세세 오명 남겼다.


반면 애사(哀史)로 기록된 슬픈 생애를 살다가 덧없이 죽음에 이른 단종이지만 태백산 산신으로 부활해 영생을 누린단다.


 불의를 참아내지 못하는 한국인의 정서상 기어이 그렇게라도 태백산 산신령 신화를 만들어 단종을 위로하였다.


이승에 허락된 한생 정말이지 잘 살아낼 일이다.  2020


위치: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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