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 참나리

by 무량화


푸르름 일색인 칠월 산하 예서제서 왕성한 생명력이 거침없이 넘실거렸다. 산 청청, 물 청청인 강원도 오지 영월. 기골장대한 태백의 봉우리가 겹겹으로 에워싸인 그 아래, 산자락 따라 흘러내린 골물은 아득히 길고 깊었다. 가도 가도 끝날 줄 모르는 강줄기 따라 내쳐 달음질치던 차가 이윽고 멈춘 곳은 청령포.


6월 22일,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온 날이다. 청령포, 누가 찾아냈을까. 그보다 더 탄식 깊게 만드는 유배지란 있을 수 없을 만큼 참으로 기막히게 생긴 지형지물이다. 뒤편은 단애요 앞을 가로막는 건 시퍼런 강물. 육지에 뜬 섬에 다름 아닌 청령포였다. 반달 같은 나루 그 건너로 우거진 송림마저 아득하니 수수로워 보였다.


막막한 심정으로 강물 앞에 섰을 단종, 내일을 기약 못할 목숨이라 세상사 체념한 채 나룻배에 올랐을 단종의 동안(童顔)이 어린 강물은 묵직한 암녹빛이었다. 그만큼 깊어 보였다. 줄배에 의지해 청령포에 들어 노산대를 찾았다. 머나먼 한양 바라며 애끓는 심사로 절벽 꼭대기 노산대에 올라 서리서리 맺힌 한과 시름을 허공에 뿌렸을 단종. 절벽가 녹음 그늘 여기저기 핀 주황빛 나리꽃 고운 빛깔이 오죽 처연스러웠으리.


종교가 가르치는 이치대로라면 벌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것이라야 마땅하건만 이처럼 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단종. 비록,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숱한 죄를 짓고 사는 중생사라지만 고작 열 일곱 해를 산 소년이 죄를 지은들 무슨 그리 몹쓸 죄를 지었으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모순투성이 세상이라 해도 너무나 불공정한 결론이 아닌가 싶었다. 살면서 때때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싶을 만큼 억장 막히는 일 당하면 흔히 그래서 전생의 업으로 돌리는지 모른다. 내가 지은 업보 탓이다, 가슴을 치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움이 오히려 감당하기가 수월한 때문인지도. 아니면 위화도에서 회군하며 피비린내를 일으켜 새로운 사직을 세운 몇 대 윗조상이 저지른 죄과를 엉뚱하게도 먼 후손에게 물었던가.


정직한 인과법에 따라 선인선과(善人善果) 요 악인악과(惡人惡果)가 현세에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나고 적용된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지고 향기로워지련만. 하긴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화를 만나며 선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하였으니.



나어린 조카를 내친 숙부 수양, 하늘에 머리 두고 살며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역사는 단죄 못해도 하늘만은 정녕 무심치 않아 모진 심신의 고뇌를 수양에게 안겼음 이리. 애사(哀史)로 기록된 한 많은 단종의 생애. 덧없이 죽음에 이르러 시신마저 강가에 버려진 것을 몰래 거두어 장사 지낸 지방관 엄흥도의 애태운 심곡인가. 참나리 꽃잎에 점점이 새겨진 흑자색 반점들이 오늘 더더욱 어룽져 보인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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