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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8시간전

폭염도 감사! 감물 들이는 날

한라산 자태 또렷이 드러난 아침, 날씨 더없이 청명했다.


여름! 빛으로 물들이다, 행사장인 농업기술센터에 도착했다.

예약된 열 시 반 타임, 30분간 감물 들이는 방법 등 기본교육이 진행됐다.

햇빛과 바람과 물과 감이 섬유와 만나 연한 베이지에서 황토색에 이르는 자연색을 연출해 는 감물.

감물을 내는데 필요한 풋감을 따는 시기는 7월 하순에서 8월 초, 바로 이즈음이다.

무조건 감물 들이는 날은 햇빛이 강한 날일수록 발색이 잘 된다니 제대로 때맞춰 잘 왔지 뭔가.

조건은 최적, 그러나 흙과 불이 만나 도자기가 만들어지지만 다 백 프로 성공작만 나오는 건 아니다.

폭염경보 연일 발령되는 혹서의 따가운 햇살이나 아름다운 천 빛깔이 만들어지는 그 자체는 자연의 신비에 속하는 영역일 터.

감물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각자 취향에 따라 감물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모시나 삼베 색부터 베이지색, 옅고 짙은 황토색, 갈색까지 선택폭이 넓.

환경친화형 염재인 감물은 매염제가 필요하지 않으며 감물염색은 섬유를 한층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풋감의 주성분인 타닌이 섬유와 만나면 통기성이 증가되는 때문이란다.

또한 섬유의 열전도율이 낮고 자외선 차단 효과가 높으며 땀이 나도 몸에 달라붙지 않는 장점이 있다고.

뿐만 아니라 방충성이 뛰어나 여간해선 천에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이 시대 들어 여름철 패션 아이템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갈옷이다.

이같이 선대들의 지혜가 담긴 갈옷의 가치 계승과 향토자원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소비를 확산시키기 위한 감물염색 행사다.

농가 소득 향상에 기여하고자 2000년부터 시작됐다니 연륜이 제법 쌓였다.

환경 척박한 제주라는 풍토에 맞는 자원을 활용한 천연 염색 현장교육 중에 농업기술센터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시원한 강당에 앉아 제주농업기술원 서귀포농업기술센터를 검색해 나가다 꼭짓점에서 만난 단어, 농촌지도소와 4-H 클럽.

통일벼 보급에 앞장섰던 농촌지도소는 본래 50년대부터 군 단위 농촌에 세워졌던 농사지도소를 전신으로 한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당진 읍내 유일한 요정이던 신선각 옆에 새하얀 농촌지도소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거기서 해마다 가을이면 4-H 클럽 회원들이 우수 농작물 경연 대회를 열었고 시골에서는 운동회만큼이나 큰 구경거리였다.

초대형 호박, 기형적인 쌍둥 고구마, 한아름이나 되는 포기배추, 잘 익은 수세미나 박도 엄청나게 컸다.

부녀자들의 각종 수예품이며 학생들이 출품한 목공작품도 전시됐다.

4-H는 지성(head)·덕성(heart)·근로(hand)·건강(health)의 뜻을 지닌 영어 네 단어의 이니셜이다.

농촌 청소년들을 회원으로 두고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목표 삼아 1914년 미국 전역에 조직되었던 게 .  

우리나라에는 농촌청년구락부라는 명칭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6·25 전쟁 직후다.

이 운동은 영농기계화와 과학화를 중심으로 발전해, 전후 피폐해진 농촌 부흥에 기여할 인재와 사회 지도자 다수를 배출해 냈다.

특히 농촌청소년들을 지역 발전을 이끄는 견인차로 키워 새마을운동의 주요 자원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상이 급격히 산업사회화되면서 농촌 청소년 인구가 감소되며 역할이 자동 축소됐다.

당시 공직인 줄도 모를 정도로 허약체였던 농촌지도소가 어느새 이렇게 큰 부서로 장족의 발전을 하다니.

방대한 터에 대강당, 농업인 교육관, 감귤 홍보관, 감귤품종전시실, 녹차원, 아열대하우스, 농산물 가공교육장 등을 거느리고 과학과 산업과 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농업기술센터다.

역시나 감귤이라는 특화작물과 녹차 산지의 명성과 함께 서민들의 전통 일복이었던 갈옷으로 이름난 제주다웠다.

작년 여름에도 시청 서포터스로서 취재 목적으로 감물 들이기 현장활동을 했었다.

그때 흰 티셔츠에 쪽물을, 인견 홑이불에는 감물을 들여봤다.

깔깔한 여름용 홑이불이 맘에 쏙 들었다.

서귀포살이야말로 그간 꿈은 꿔왔으나 해볼 수 없었던,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

심플함을 지향하며 단순 간결하게 지내는지라 살림살이는 되도록 간소하게,를 모토 삼았다.

소유욕도 부려봤고 큰살림도 해봤으니 이제는 불필요한 물건들에 치이지 않게 가진 것에 자족하며 덜 사들이기.

특별히 세상에 보탬되는 일은 못했을망정 쓰레기 거리만 양산하다 간다는 게 염치없이 여겨지기도 하니 철이 좀 든 건가.

크게 불편할 거도 없는 것들을 견물생심이라고 자꾸 사들여 쟁여놓고 쌓아놓고 늘어놓고 사는 일이 이젠 그닥 땡기지 않는다.

공간이 많아지니 생각도 마음도 여유로워지며 오히려 삶이 더 옹골차게 느껴진다.

되도록 살림을 늘리지 않으려 하는데도 삽상하니 까슬까슬한 여름용 홑이불의 유혹에는 지고 말았다.

작년에 마련한 거와 번갈아 사용하면 괜찮겠네, 란 변명을 꼬리표처럼 달아놓고서.

암튼 단톡방 공지를 보고는 득달같이 신청을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현장으로 달려왔다.

교육 수료 후 감물 한 병과 인견 홑이불감을 받아 들고 강당을 나와 실습장으로 고고!

도중에 잔디밭 광장에서 펼쳐지는 천연 염색 페스티벌 경쾌한 음악소리에 눈과 귀가 절로 이끌려갔다.

시니어 모델들이 세련된 디자인의 시원한 갈옷을 걸치고 패션쇼를 하고 있었다.

런웨이 무대를 도도한 표정으로 자신감 넘치게 워킹하는 시니어들의 당당함이 보기 좋았다.


오늘의 그랑프리, 포토제닉상 수상자 무대에 홀려 들었다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넉 점 반'이란 윤석중 선생의 동시 속 아이는 귀엽기나 하지, 한 눈 실컷 팔다가 부랴 사랴 감물염색장으로 달려갔다.

딴전 부리다 늦게 와 허겁지겁 작업하려니 교육내용 다 까먹고 실수 연발, 천을 물에 담가버렸다.

탈수기에 넣어 물기를 짜낸 다음 플라스틱 대야에 천과 감물을 붓고 손으로 조물조물 치대다가 팔힘보다 낫겠다 싶어 발로 밟았다.

감물이 골고루 천에 흡수되도록 두서너 번 뒤적여가며 밟아주자 감물이 고루 배어들었다.

이불깃을 펄럭여가며 활활 털어 주름 없이 펴서 잔디밭에 널어놓는데 정수리에서 연기 날 듯 볕살 하도 따가워 얼른 실내로 직행.

이 폭양에 작업모 의지해 빌딩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도 있는데 감물 들인다고 노닥거리면서 웬 엄살 이리 심한고.ㅉㅉ


에어컨 기운에 머리를 식힌 후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 먹었다.

메뉴는 딱 두 가지 콩국수와 비빔밥, 마을 부녀회에서 집된장이며 빙떡과 호박빵을 판매하기에 빵만 샀다.

도민과 함께하는 감물염색 체험만이 아니라 천연 염색 제품 홍보 및 전시 판매부스도 운영 중이라 한바퀴 돌아봤다.

힐링센터에서는 치유 부채도 만들고 광장에서는 어울림 작은 음악회가 열렸으며 

 버스킹 공연도 하고 있었다.   

부대행사 프로그램 이처럼 다채롭게 마련돼 있었으나 냉방 포기하고 땡볕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 모른 체하고 요지부동.

제주감귤박람회도 동시에 열렸으나 감귤 따기는 고사하고 청귤 차 시식이며 디저트고 칵테일이고 다 내키지 않아 꼼짝하지 않았다.

정오 지난 햇살 워낙 강렬해 그새 홑이불은 풀 먹인 듯 빳빳하게 말라있어 후다닥 걷어들고 귀가하는 게 상책이었.

집에 와 샤워하고 빵을 베어 물으니 앙꼬 전혀 없는 밍밍한 찐빵이라 그냥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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