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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9. 2024

사순시기, 갈매못으로

갈매못 순교성지

사순시기를 맞아 성지순례에 나선 아침.

봄 내내 안개 끼듯 시야 흐리게 하는 황사인지 희뿌연 미세먼지로 바깥외출 자제를 당부한다는 뉴스만 들리던 때였다. 서해안고속도로변 숲에는 연둣빛 눈엽이 고왔고 산목련 하얗게 피어 있었다. 모처럼 푸른색 창공에 흰 구름 떠있는 쾌청한 날씨. 하늘까지 우리의 영적 나들이를 응원해 주는 듯하였다.


충청도는 느릿한 말투도 그렇지만 매사 도무지 급할 것이 없다는 듯 펑퍼짐하다. 산세마저 유순하니 느긋하게 누워서, 그 새새로 고만고만한 전답과 마을 정겨이 껴안고 한데 어우러져 조화 이뤘다. 서울 기점, 휴게실에서 한 번만 쉬면 닿을 수 있는 두세 시간 거리쯤에 위치한 갈매못 순교성지. 성지 푯말이 선 서해안 어촌인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작은 마을은 앞섶 가득 푸른 천수만과 여러 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영보리, 성지를 품게 될 줄 예견이라도 한 듯 영원한 보물이 있는 곳이라니 지명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동네 뒷산 자태가 마치 목마른 말이 연못에서 물을 먹는 것 같은 형세를 지녔다해서 갈마연, 곧 갈매못이다. 이 역시 세상사에 지친 가여운 영혼들이 찾아오면 생명의 말씀으로 목덜미 적셔 주고 등 다독거려 주고자 미리 예비해 둔 이름이 아닌가도 싶었다.  


너르게 펼쳐진 바다를 뒤로 하고 성지 입구에 들어서니 전체적으로 조촐한 분위기, 순교성지답게 떠들썩하지 않은 차분함이 외려 경외감을 더했다. 주차장 겸 너른 마당 입구에서 자연석에 음각된 순교복자비와 오석에 새긴 순교성인비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앞쪽 정원에는 바다를 등진 예수성심상이 두 팔 들어맞아주셨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 단정하게 둘러섰다.


바다를 향해 선 순교 기념관은 건물이기보다 대형 조각품 느낌이 들면서 외형은 마치 교황님 전례용 모자를 연상시켰다. 까만 오석의 큼직한 제단이 전면에 놓여있고 제단 앞 벽체 중앙에는 '형장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란 글귀가 적혀있었다. 양 옆 벽면으로 다섯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를 기리는 반 부조 조각이 시선을 끌었다.


유품 전시관 겸 성전인 그 안으로 들어서자 가시관이 씌워진 십자가가 보였다. 순간 경건함에 절로 두 손 모아지며 고개 숙여졌다. 승리의 성모성당은 언덕 위 소나무 숲에 아늑히 들앉아 있었다. 여러 섬을 거느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비스듬 언덕을 올라가자 길 따라 오른편에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 조각품. 한없이 여윈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를 보자 문득 쟈코메티의 앙상한 조각품이 떠올랐다.


특히나 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에서 못자국으로 구멍 난 두 손을 허공 높이 치켜든 조각을 보자 아릿함이 저며 들었다. 12처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앞에서는 차마 숙인 고개 들 수도 없이 목울대만 뜨거워졌다. 감각이 있는 생명체 누구인들 피 흐르는 상처가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며 죽음 두렵지 않을 것인가.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며 목숨까지 내어주신 지극한 사랑을 받은 우리다. 해서 사순시기 동안 금요일마다 올리는 십자가의 길 기도 중, 자기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 흐르는 특별한 경험을 대부분의 교우들은 해보았으리라.  


성전 초입에 이르자 다섯 분 성인의 상반신 청동조각이 묵묵히 맞아주었고 성전 안에 드니 스테인드 글라스 너무 찬란히 밝고도 아름다워 오히려 비감스러웠다. 정적 깊은 그곳에서 오래 기도드리고 싶었으나 돌아갈 길 생각하고 성전을 물러나왔다. 언덕길 내려오는데 양 켠에 선 동백은 봉오리 꼭 다문채 무거운 잎새 거느리고 그의 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백이 내게 모쪼록 침묵하는 법과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는 듯이.... 나아가 옆사람이 진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주라는 듯이......


영보 마을이 포함된 오천면에는 오래 전인 조선 중종 5년(1510년)에 축조한 고소성(姑蘇城)이 있었다.  20여 개의 유인도와 48개의 무인도가 여기 속해있었으므로 해안도서 국방경비를 담당하는 수군통제사가 상주하던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면 소재지다. 이에 더해 1846년 프랑스 세실 해군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영해를 침범, 서해안 외연도에 정박한 사건이 발생했다. 기해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범 주교,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 등 세명의 선교사를 처형한 책임을 임금에게 묻고자 함이었다.


갈매못 순교지는 그로부터 이십 년 후, 병인박해 때인 1866년 3월 30일 주님수난 성금요일에 파리외방 전교회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위앵 민 마르티노 신부, 오 메크로 오 베드로 신부가 참수당한 곳이다. 동시에 목숨을 잃은 교우로는 성서 번역과 교회사를 모으는데 공헌한 황석두 루카 회장,  배론 신학당을 열게 한 장 주기 요셉 회장, 그리고 숱한 무명 순교자의 선혈로 물든 처형장이었던 갈매못이다.


세 분의 외국 선교사를 비롯, 다섯 순교자가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보령에 있는 충청수영으로 이송돼 수영항 근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장소였던 갈매못.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침략을 시도한 바 있는 서해 외연도를 마주 보며, 외세 오랑캐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이곳을 처형장으로 택했다 한다. 프랑스군이 진출한 양화진 절두산에서 병인년 시월,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를 목 벤 것과 같은 이유로 이곳 역시 서양인 처형장소로 선정했을 것이다. 또한 고종과 명성왕후와의 국혼을 앞둔 시기라 도성에서 피를 보는 것을 꺼린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갈매못 순교 현장은 공주 부여 괴산 등지 사제였던 세 분의 노력에 의해 1925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참수 자리인 모랫벌, 참수된 목이 걸린 장깃대가 섰던 자리, 임시 매장터 장소를 세상에 드러내기 앞서 철저한 고증과 현지인 증언에 따른 확인 절차를 거친 다음의 일이었다. 부여본당 사제인 정레오신부님이 일화 20원을 주고 그 터를 매입해 천주교 재단법인에 땅을 기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천주교 성지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가에 위치한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188호 지정 문화재로 역사 문화 종교를 아우르는 통합 교육 현장으로 자리 잡게 됐다. 갈매못 성지, 모든 순교성지가 그러하긴 하지만 유달리 가슴 아릿했던 건 그 조촐함과 적요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말 설고 낯선 타관땅에서 육신 찢기는 처절한 고통당하면서도 하늘 영광 노래했다는 순교자들. 스스로 자초한 시련조차 죽을 듯 아파서 견뎌내지 못하고 비명 지르며 악을 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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