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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8. 2024

추자도, 눈물의 십자가 성지

정난주 마리아와 황경한

낚싯줄 통해 전해지는 미세한 신호.

그처럼 미묘한 떨림 그러나 강한 끌림이었다.

시절인연이 비로소 이르렀는가.

이번 가을엔 필히 추자도에 가봐야겠구나.

시월 날씨부터 점검한 다음 연안여객터미널로 접속해 출발 날짜를 잡았다.

섬에서 하루 숙박하기로 했기에 미리 숙소 예약도 해뒀다.

추석 연휴가 끝날 무렵이었다.



아침 아홉 시 반 배편인 퀸 스타호를 타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터미널로 향했다.

개천절이라 가로에 게양된 태극기가 유난히 펄럭였다.

중문에 이르니 빗줄기 흩뿌렸다.

한라산을 넘는데 비안개가 온데 부옇게 어렸다.

워낙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라 단디 확인하고 정한 일정일지라도 도리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성지순례에 안성맞춤인 일기인 거라고 긍정적 사고로 전환을 했다.

제주 시내에 다다를 즈음 차내 방송에서 연근해 기상예보가 전해졌다.

내일 추자도 인근에 풍랑주의보 발효, 파고 2미터에서 4미터라니 옴마야!

 

그때부터 분다워진 머리, 일단 터미널 창구에 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금일 출발해 명일 귀가하기로 모바일 예매를 했는데 내일 풍랑주의보가 내렸으니 오늘 오후 귀항 편으로 교체 가능하면 가겠노라고 했다.

마침 빈 좌석이 있다며 표를 바꿔줬다.

잿빛 흐린 하늘, 그보다 더 짙은 회색 바다.

다행히 파도는 없었다.

정시에 배는 출항했다.

출발하자마자 파도가 창을 때렸다.

그래도 선체 흔들림은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웬걸! 십여 분 정도 지날 무렵 여기저기서 뱃멀미가 시작됐다.

승객들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구토가 나와 어른들은 비닐봉지 달라고 팔을 내젓고 아기는 속이 들끓어 보채고, 한마디로 야단법석이 났다.

삼십 분 쯤에는 반수 정도가 뱃멀미로 곤욕을 치르는 거 같았다.

심하게 파도가 치는 것도 아닌데 배의 흔들림이 적어도 좌우 롤링 자체에 메스꺼움을 느끼는 듯.

창밖으로 차차 섬이 드러났다.

금세 상추자항이었다.


추자도 중 상추자도 영흥리, 아홉 시 반 제주에서 출발한 퀸스타호는 추자항 선착장에  열 시 조금 지나 도착했다.


성근 빗발이 해풍에 휘날렸다.


춤추자! 추자도! 현주민 말에 의하면 바다에만 나가면 돈을 긁어온다는 돈섬이라는 추자도라 주민들이 날마다 신나게 춤을 춘다는 섬!


그러기엔 우중충하기만  날씨가 받쳐주질 않았다.


추자도는 망망대해에 뜬 두 개의 섬과 자잘한  도를 포함, 추자군도로 불린.


상추자항에 내렸지만 목적했던 곳은 하추자도에 위치한 예초리.


가을비 추적거렸으나 섬을 일주하는 버스가 대기 중이라 얼른 승차했다.


요금 천 원을 현금카드로 결제했는데 제주도민 버스 티켓도 사용 가능하더라는


차창 밖으로 가을비 하염없이 내렸다.

30분 못 미쳐서 모진이 해변에 닿아 하차를 했다.


바닷가 어디나 그러하듯 모진이해변에도 파도에 쓸려온 해양 쓰레기가 깔려있었다.

해풍 몰아치고 빗발은 거칠어졌다.

우비를 꺼내 입고 무지개색 방호벽이 둘러선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혼자 걸었다면 휘휘하겠는데 다행히 수원에서 온 두 자매가 있었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산길 걸으며 정 마리아의 깊은 신심과 애연한 모정에 대해 이야길 나눴다.

그렇게 와서인지 어느새 황경한 묘역에 이르렀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묘역에 성근 빗발 내리더니 차츰 날이 들었다.

안젤라 자매의 선도로 기도를 바친 뒤 묘 주변을 빙 둘러보며 사진에 담았다.

빗물 흐르는 오석 비명에 새겨진 황경한의 히스토리는 이러했다.

태어나 주문모 신부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졸지에 국사범의 자식이 되어 어머니 정난주와 제주 유배길에 오르게 된 두 살배기 아기였던 황경한.

어머니의 피눈물 어린 결단으로 추자도 바닷가 물새울 황새바위에 놓였던 아가는 앙앙 울다가 어부 오 씨 부부에게 거둬졌다.

아기는 자라 어부가 되었을 테고 성년이 돼 결혼하여 건섭, 태섭 두 아들을 두었으며 현재 6대손이 여기서 살아간다는데.

이 모두가 하느님 크신 은총의 섭리 일시 분명했다.

하느님 처분에 오롯이 맡기고 떠난 정 마리아의 결정은 옳았다.


언덕 위에 선 정자에 서니 추자 군도 고만고만한 섬들이 다도해처럼 드러났다.

곧 피어날 연꽃 봉오리처럼 어여쁜 섬. 섬. 섬.

청명한 날씨라면 전망터로는 정녕  으뜸이겠다.


묘역을 뒤로하고 눈물의 십자가를 찾아가는 길.

내리막 언덕길 옆에 황경한의 눈물이라는 작은 샘이 고여있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물.

길가에 진보라 꿀풀 꽃이랑 연보라색 쑥부쟁이 꽃 하늘거렸다.

숲에 억새도 여기저기 제법 피어 있었다.

바야흐로 가을, 나 여기 추자 섬에 와있다.

지금 내가 머문 이 자리, 주어진 현재 이 순간을 최대로 느껴보자.

느낌 가득 품고 돌아가자.

그리하면 충분하다.



정마리아야말로 과연 가풍 있는 대학자 집안의 아녀자답다.

그만큼 하늘님 믿음도 확고했음이리.

신앙 신실하지 않았다면 절해고도에서 뭘 믿고 자식과 생이별을 어이 결심하리오.

그분 하늘에 계시고 필히 지켜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정이리라.

하늘의 도우심 굳게 믿었다 해도 여느 아낙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아들마저 관노로 살게 할 수 없다며 해풍 찬 바닷가 바위에 젖먹이를 떼어놓고 유배길 오른 정난주 마리아의 한뉘는 백색 순교의 삶에 다름 아니었다.


하추자도 모진이 해변을 지나 산모롱이 언덕길 올라 해송 우거진 절벽 위에 섰다.

제주 오름과 다른 추석산 굽이돌아 오르다 보니 약간의 땀이 배어들었다.

사방에서 해풍 세차게 몰아쳐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해 가슴까지 후련해졌다.

굵지 않은 빗방울이 간간 흩날렸다.

전면에 둘러선 저마다 모양 다른 섬들 아기자기 정겹고, 흐린 날씨지만 눈물의 십자가 사연에 걸맞은 맞춤형 기상도였다.

데크로 이어진 계단이 가파르게 바다로 흘러내렸다.

가랑비에 젖어 미끄러운 데다 경사가 심한  데크길이라 조심조심 층계를 디뎠다.

송림 사이로 커다란 바위가 보이자 비로소  눈물의 십자가도 드러났다.


바윗전을 할퀴어대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위세가 가공스러웠다.

정신줄 붙잡으려 기도 염송하며 맨 아래 바위로 내려가 십자가 앞에 섰다.

생각만 해도 쩌르르 아린 통증, 울컥 북받쳐 오르게 하는 사연 아니랴.

한점 혈육만은 평생을 노비로 살지 않게 하려고 젖먹이를 예초리 바닷가 황새바위에 두고 떠나야 했던 모정.

아기 품섶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 넣어두었기에 그 아기는 황경한으로 자랄 수 있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는 변사의 사설이 아니라도 절로 먹먹해지는 신유박해 당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배냇보에 싸인 어린 황경한을 절해고도에 내려놓고 유배길을 재촉한 그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

아명이 명련인 정난주는 대 유학자 정약현의 맏딸이며 어머니는 이벽의 누님 되신다.

정약현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맏형님이셨다.

이벽은 독학으로 서학 교리 익혀 천주교를 창립한 이론가, 그로부터 정약용 형제들과 이승훈 등이 직접 복음을 들어 천주학에 입교했다.

그때나 이때나 명문가는 명문가와 인연이 맺어진다.

귀골선풍인 데다 수재로 17세에 장원급제,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황사영과 혼인한 정난주는 1800년 아들 경한을 얻었다.

황사영을 극히 아꼈을 뿐 아니라 천하의 인재를 고루 쓰던 임금이 승하, 어린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새 집권세력인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 견제책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조선 땅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1801년 신유박해 경위는 이러하다.


조정의 천주교 탄압 실상을 폭로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글 '황사영 백서'를 써서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그 일로 피비린내 나는 천주교 탄압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으며 황사영은 대역 죄인(大逆罪人)으로 참형을 당했다.

아내인 정난주와 두 살배기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길을 떠나게 됐고 그의 모친인 이윤혜는 거제도로 각각 귀양을 갔다.

갯바위에 홀로 남겨져 울던 아기는 정마리아의 기도대로 예초리에 살던 오 씨 부부에게 구해져 어부로 살아갈수 있었다.

국사범의 자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그것은 과거의 흔적을 말갛게 지워버려야 가능했다.  

희비쌍곡선을 그려가는 우여곡절의 한 생애 큰 굴곡없이 평범하게 살아낸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는 걸 진작에 체득한 정마리아다.

명문세가에서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했은 즉, 무엇보다 순박하고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가길 바란 어미의 뜻 헤아려지고도 남았다.

썰물 때가 되면 해변 따라서도 황새바위에 이를 수 있다는데 경사도 가파른 벼랑길은 무척 험했다.


급경사진 산길 오르내리며 절벽 아래 바위로 향하는 동안, 나태를 넘어 냉담에 빠졌던 신심이 새롭게 다져졌다.

먼 훗날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주 섬에 있는 친모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아들 경한이 살아남아 추자에서 잘 살고 있음도 알게 된 정마리아.

그러나 모자는 각각의 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 그리워만 하다가 어머니는 37년간을 관노로 살다 생을 마쳤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의 아내 정마리아가 목선을 타고 제주로 유배 오던 그날은 겨울철이라 보다 파도 심했으리라.


추자도의 황새바위에  아들을 눕혀두고 마지막 작별을 고한 그 장소를 찾아 나선 순례 길, 심곡 애연해진다.


정마리아는 하늘님과 성모님 현존을 믿어 한치도 의심치 않았기에 차디찬 갯바위에 젖먹이 어린것을 떼어놓고 떠났으리라.


하지만 여늬 아낙이라면 그처럼 모진 이성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싶다.


스스로 자식을 떼어놓아야 하는 그야말로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고통 감내해야 했던 그녀.


소년 급제하여 임금의 사랑을 받았던 황사영은 조정의 천주교 박해 실정을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알리는 편지를 썼다가 발각돼 능지처참당했다.


정난주는 당대의 명문가였던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였으나, 황사영백서를 쓴  대역죄인의 아내로 신분 급전직하하며 관노가 된 채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나어린 아들에게만은 차마 노비의 삶을 물려줄 수 없었던 그녀는 아들이 섬에서 어부로라도 평탄하게 살아주기만을 바라며 독한 결심을 한다.


"양반도 노비도 아닌 보통의 양민이 되어 부디 너다운 너로 살아남기만을…." 그녀는 그리 기도했으리라.


37년 간을 제주목 관노로 살아야 했던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심으로 굿굿이 이겨냈다.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며 이웃들의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높은 학식과 교양으로 다져진 인품의 향훈에서 기인했을 터다.



예초리 앞바다 멀고 가까이에 숱하게 떠있는 섬들.


오 남매처럼 다정스레 솟아있는 섬 앞에는 바다의 암초인 숨은 여들이 파도 따라 숨었다 나타나곤 했다.


추자도까지도 일제의 만행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제가 패망 직전 바위 굴 뚫어 진지를 구축, 수탈의 상흔으로 남겨진 진지동굴 열 두 곳이 확인됐다는데.


예초리와 신양리에 천장높이 2미터 이상의 대형이며 ㄷ자 형태로 파 놓았는데 방향은 내륙의 목포 쪽이라고.


예초리에서 버스 기다리며 언덕길 어슬렁거리다가 만난 엄바위와 장승만 신기한가.


추억 어린 학교 가는 샛길도 만나봤고 추자 예술섬도 만났는데 설치미술 조형프로젝트인지 갤러리인지?


섬마을 어딜 가나 바닷가 방파제에 초대형 까만 플라스틱 통들이 늘어서 있었다.


민들이 연근해 황금어장에서 잡은 멸치를 소금 버무려 천연 숙성시키는 멸치젓 통이라 했다.


과거엔 식품을 저장하며 벌겋게 녹스는 드럼통을 사용했다는데 이만만해도 발전이라면  큰 발전이겠다.


멀리서도 확 눈에 뜨이는 색으로 마을마다  통일하다시피 페인팅된 지붕색은 환했다.


제주에서도 보았듯이 영흥 마을 최할망 외손녀 조지아 주립대학에서 의사 및 박사 학위 취득 축하 현수막이 정겨웠다.


이는 하추자에서 추자로 이동 중 담은 마을 풍경들이다.



추자도는 제주도와 전라도를 잇는 뱃길의 중간 기착지이다.

뱃길로 제주와 육지를 오가다가 풍랑이 심하면 바람을 피해 가기 위해 대기하던 피항지였다.

그처럼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자 제주로 가던 여몽연합군이 해상에서 험한 풍랑을 만나 잠시 뱃길을 멈췄던 섬.

또 한 번은 목호의 난을 토벌하려고 제주도로 향하던 최영 장군 역시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 최영 장군은 주민들에게 그물과 어망을 이용하여 고기 잡는 방법을 전해줘 그 덕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지금도 보존돼 있다.

추자도는 제주도로 편입된 섬이지만 지리적으로는 전라도 쪽과 훨씬 가깝다.

직선거리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제주항이나 전남 보길도와는 25km 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흙이나 암석 같은 토양은 물론 말투 역시 육지 그것도 전라도 풍, 제주와는 거의 닮지 않았다.

현무암은 전혀 눈에 띄지 않으며 음식이나 방언도 호남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보다는 육지 쪽에 붙었으며 1821년 영암군에서 1896년 완도군으로 편입되었다.


조선조 말까지 전라도 땅이았다가  일제강점기인 1910년 제주도로 편입된 섬이 추자도다.


고려 원종 12년까지 후풍도(候風島)라 불리던 섬으로 조선 태조 5년, 섬에 추자나무 무성한 탓에 추자도라 불리게 되었다는 썰이 있다.




추자도는 한류와 난류 교차지라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며 조기와 멸치가 유명하다.


상추자도는 추자도에서 가장 먼저 설촌 된 영흥리와 대서리 두 개 마을로 이루어졌지만  면사무소 등 관내 주요 기관들이 자리 잡았다.


하추자도는 면적이 훨씬 더 넓으며 묵리, 신양 1리와 2리, 예초리 등 네 개 마을로 였고 섬 유일의 중학교가 있는 곳이다.


외딴섬이라서 외부와의 이음 고리는 오직 배편이 유일, 섬을 연결하배로는 제주항에서 상추자항으로 매일 퀸스타(해남이 종점) 등 페리가 운항되고 있었다.


블루오션호는 제주항에서 추자를 거쳐 완도로 가는 페리로, 차량 선적도 가능한 배다.


추자 10경의 하나인 장작평사(長作平沙)라 일컫는 아치형 몽돌해변이며 국가어항인 신양항은 하추자도에 있으나 수심이 얕아 큰 배가 접안하기는 어렵다고.


이번은 본래 목적대로 하추자도에 집중됐지만  날씨 청명한 날 다시 와서 상추자도 해안 절경지 여행도 해볼 참이다.


일주 버스가 상추자항 터미널에 닿았으나 여분의 시간이 남아 인근  마을 구경을 다녔는데  벽화 골목과 예전 우물도 둘러봤다.

추자 공소는 웬만한 도시 변두리 성당보다 규모 반듯했다.

조촐한 성전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독 강렬했다.


성당 좌측 성모상,  빗물이 눈물처럼 코끝과 턱 밑에 고여 금방 떨어질 듯 맺혀있었다.


오후 편 제주행 여객선 예정대로 출발,

4시 반, 여유있게 제주로 향하는 퀸스타에 올랐다.


오전엔 빗줄기 성성했으나 오후엔 날이 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제주행 배에 승선했는데 파도가 높아 롤링이 무척 심했다.


섬을 출발하자마자 조류 거칠어지는 난바다, 벌써부터 승객들은 멀미로 야단이었다.


아침과 달리 롤링 자심했으며 심지어 큰 파도에 올라탔다가 아래로 툭 떨어지기도 했다.


이럴 땐 파도와 한 몸 되어 파도를 타라고 했던가.


등받이에 바짝 등을 받치고 배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 차차 섬 윤곽이 나타나더니 한라산이 안겨들었다.


파도가 셌으나 다섯 시 조금 지나 도착했다


제주항에 내리자 제주 날씨는 맑아 황금빛 노을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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