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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8. 2024

서건도가 비로소 許하다

모세의 기적

뭍과의 거리가 300m 밖에 안 되는 서건도다.


하여 간조 때는 서귀포 해안에서 그냥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섬이다.


하루에 두 번 조금 시기아니면 썰물 때마다 들어갈 수 있으므로 전에는 조개 잡는 재미 진진했단다.


바닷길이 갈라지는 현상을 두고 모세의 기적 운운하면서 호들갑 떠는데 진도며 제부도에서도 진작에 관광자원화했고.


수중화산인 서건도엔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파편이며 동물 뼈가 발견되었다는데.


고리타분한 사람답게 고고학은 물론 역사라면 동서양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단히 매력있게 여긴다.


썩은섬이라는 이름도 재미있다.


땅이 너무 척박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제주 방언으로 '썩은'이라는 말은 '땅이 너무 척박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잦은 해무로 습도가 높아 살기 척박한 지역이라, 현재 신서귀포 일대가 오래전 '썩은 빌레'로 불려 왔던 것처럼.

바다에서 폭발한 용암이 쏟아져 내리며 대부분 현무암 층이 되는데 반해 이곳 암석은 웬일인지 응회암으로 형성된 터라 암반이 무른 편.


실제로 섬을 이룬 응회암 자체가 삭은 바위처럼 쉽게 부스러지는 성질을 가졌기에 썩은섬일까.


다른 일설은 고래가 물 빠진 다음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서 썩어버렸다나 어쨌다나.


썩은섬의 음이 변해 써근섬이 되고 다시 서건섬, 한자 표기로는 서건도가 되었다

'썩은섬'의 공식 명칭은 '서건도(鋤建島)다.

바닷물이 빠지면 누구나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특히 사리 때가 되면 더 많이 바다가 갈라진다.

널찍하고 단단하게 자갈길이 드러나기 때문에 남녀노소 아무라도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 섬에 들 수가 있다.

올레 7코스 길목에 위치한 데다 섬에 들면 사방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고.

전면으로는 범섬, 문섬, 섶섬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강정 해군기지 방파제가, 북쪽으론 한라산과 고근산이 마주 보인다.




지세며 이름부터 자못 흥미롭다.


당연히 관심이 간다.


호기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바람 시원하고 하늘 청명한 날씨의 부추김에 따라 주저 없이 나선 걸음이다.


물은 쭉 빠졌으나 태풍경보가 내려진 현재 상황에서는 섬 가까이 접근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섬 안에 산책로가 나있고 전망 좋은 데크길도 잘 정비돼 있다지만 그림의 떡.


바닷길 훤히 드러나 있으나 너울파도 심한 이런 날은 멀찍이서 바라만 보다가 돌아서야 한다.


언제든 다음을 기약하고  사진 한 장 찍고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매달 보름 무렵이면 서건도 길 매번 열리므로 하필 태풍 영향권에 든 날 만용 부릴 까닭이 없으므로.


해풍 드센 해변을 벗어나 지름길로 가보려다가 돌아 나오는 길은 더 헤맸다.


비닐하우스 사이 요리조리 빠져나가다가 그 덕에 용과 농장을 다 구경하게 됐다.


연미색 꽃을 단 대형 게발선인장을 닮은 선인장에 매달린 열매는 틀림없이 드래건 후르츠였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서건도에 갔었다.

진도 아니라도 모세의 기적을 체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서건도는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처음엔 물때도 모르고 섣불리 덤벼들었다.

당연히 No thanks! 어림도 없었다.

카라반 시설 아래까지 치는 파도 서슬이 시퍼렜다.

한 번은 썰물임에도 풍랑이 너무 거칠었다.

또 한번은 태풍 여파로 겁이 나서 접근하기 어려웠다.

지난번에 왔을 적엔 뻔히 바라보면서도 못 건너갔다.

곧 밀물이 들이닥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서건도로부터 몇 번이나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새벽같이 눈을 뜬 오늘이야말로 타이밍 적당했다.

한라산 백록담 남녘 암벽 선연히 드러난 쾌청한 일기.

오전 물때도 아주 안성마침, 제대로 여건이 맞아떨어졌다.

신시가지에서 볼 일 다 본 다음, 주저치 않고 서건도로 향했다.

도착하니 올레꾼 전무했으나 마침 물질하는 할망이 멀리 보였다.

잽싸게 다가가 언제까지 간조인가를 여쭤봤다.

노할망은 정확히 12시 44분이 돼야 물이 들어온다고 했다.

현재 시각 12시 반, 서건도에 들어갔다 나와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고개 끄덕댔다.

안심하고 다녀오라는 듯 팔도 크게 내저었다.

어서 다녀오라는 사인이었다.

서건도까지는 너르게 펼쳐진 자갈길이 300여 미터 거리.

사진 대충 찍으며 빠르게 전진했다.

금세 서건도에 닿았다.

드디어 서건도가 가슴섶 열어 날 품어줬다.

돌하르망 해녀가 서있는 출입구, 곧장 계단이 나서고 데크길이 이어졌다.

원체 작은 섬이라 데크 따라 전망대도 들러가며 섬 한바퀴 도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중간 전망대에서 강정 항도 바라보고 범섬과 새섬 섶섬도 조망했다.

새벽엔 금방 세수한 듯 말갛던 한라산도, 또렷하던 고근산도 구름에 잠겨버렸지만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 두둥실.

그러나 마음이 급했다.

여긴 어떤지 모르나 고향인 충청도 서해에서는 빠르게 차오르는 밀물에 의한 사고가 빈번했기에 서둘러 섬에서 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앞섰다.

정해진 트레일로 섬을 빙 돈 다음 미련 없이 후다닥 내려왔다.

그저 섬이 품섶 열어 받아들여 준 것만으로도 흔감, 온 길 되짚어 뭍과 이어진 자갈길로 들어섰다.

올 때는 햇살에 보얗게 말랐던 자갈길인데 그새 물이 벙벙하니 차오르기 시작했다.

거친 자갈돌 골라 딛는 발길이 바빠졌다.

다행히 균형감각은 떨어지지 않아 비칠 거리지 않고 '모세의 기적' 바닷길을 무난히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금방 양쪽 물길이 하나로 합쳐진 건 아니라, 밀물 가만히 차츰차츰 조금씩 밀려들고 있었으니....

도로변에 나와서 건너온 바닷길을 바라보니 물이 제법 차올라 있었다.

그 무렵에야 서건도에 도착한 한 아가씨, 섬에 건너갈 수는 없지만 바닷길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하얀 스커트의 아가씨는 홀로 여행 중이라 모델처럼 포즈 취해보라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주자 퍽 고마워했다.

서건도, 나처럼 그녀도 섬에 가보고 싶었을 텐데 짧은 여정에 설핏 가볼 수 없는 섬이라는 얘길 들려주며 이 말도 덧붙였다.

제주에 그리운 섬 하나 남겨두고 가는 것도 다시 올 약속이 되니 괜찮은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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