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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ug 18. 2024

박꽃 추억 속의 은하수

박꽃을 이렇게 가까이서 접해 볼 기회가 없었다.

호박꽃은 밭두렁에서 쉽게 만나지만 지붕 꼭대기로 넝쿨 꾸역꾸역 기어올라가 높은 데서 피는 박꽃이다.

저녁이 되면 박꽃은 초가지붕 위에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얗게 돋아 올랐다.

하얀 꽃인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꽃은 소담스러웠다.

소박한 박꽃이란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마치 소공녀의 풍성히 주름 잡힌 윗저고리 옷소매 같다고나 할까.  

새하얗지만 순백이라기보다 전체적으로 연둣빛이 어린 꽃송이는 첫사랑보다 더 풋풋했다.

갓난아기 피부처럼 만져보기조차 저어 될 만큼 연하디 연한 꽃잎 앞뒤로 겨자색 힘줄이 선명히 드러났다.

멀리서만 보았기에 꽃잎이 두터운 줄도, 오글쪼글한지도 몰랐다.

호박잎 비슷한 잎새를 보고 박꽃임을 알았지 만일 꽃만 따로 봤다면 무슨 꽃인지 헷갈렸지 싶다.

신기하기만 한 박꽃은 묘한 끌림이 있어 아침에도 저녁에도 밤중에도 문안드리듯 그 앞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유례없는 폭염으로 볶아친 올여름, 박꽃과의 만남만은 조촐한 행운임에 틀림없다.

박꽃의 꽃말은 기다림이다.

달빛과 별빛 아래서만 피어나는 박꽃답다.

칠석날 밤, 연기 자욱이 모깃불은 하늘로 오르고 밀대방석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견우성 직녀성을 찾아보았다.

외사촌은 나보다 어렸기에 국자 모양을 한 일곱 개의 별, 북두칠성부터 찾아 손가락 끝으로 짚어주었다.

북두칠성을 길라잡이로 여름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직녀성을 찾아내고 한참 밤하늘을 헤매다가 어렵사리 견우성도 찾는다.

옛날 옛적 하늘나라에서 소를 치는 목동인 견우와 천제의 손녀인 지체 높은 직녀가 눈이 맞았다.

혼인하고도 날밤 샌 사랑놀이에 빠져 길쌈도, 소치는 일도 등한시해 버리자 천제로부터 엄중하고도 가혹한 벌을 받게 되는데...

일 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애틋한 인연, 그것도 손 맞잡은 아주 잠시뿐이라 끌어안고 기나긴 회포 풀 겨를도 없다.

견우와 직녀 둘은 전설대로 은하수를 사이에 두었다.

직녀성을 찾던 그때는 미리내 흰물결이 맨손바닥으로 뜰 수도 있을 듯 선연했다.

굵은 띠를 펼치고 보얗게 꿈결처럼 흐르던 은하수.

한참 훗날, 영어 milky way를 처음으로 듣자마자 맞아! 우유가 흐르는 강이란 표현에 무릎이라도 탁 치고 싶었다.

이 나이가 되어도 문득문득 그리운 은하수, 끝으로 은하수를 본 것은 오란차 인디언 마을에서였다.

박은 샘물을 푸거나 곡식을 떠 오는 용도의 그릇, 바가지를 만든다.

붉고 푸른 플라스틱 바가지가 나오기 전까지 박 바가지는 아주 요긴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었다.

박을 반으로 갈라 속은 긁어서 나물로 해 먹고 겉은 솥에 넣고 적당히 쪄서 말려가지고 바가지로 이용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바가지를 지게 짊어지고 다니는 바가지장수에게 집집마다 필요한 바가지를 샀다.

물론 그 이전엔 박을 심어 바가지를 직접 만들어 썼기에 친정에서라도 얻어다 썼지만, 농경사회가 도시사회로 이동되며 등장하게
된 바가지 장수다.

큰 바가지는 콩이나 팥을 담아두었고 작은 바가지는 물바가지로 썼으며 조롱박으로 만든 이쁜 바가지는 절간 약수터에 매달려 있었다.

어드메 산사건 약수터 물맛은 얼마나 달고 시원했던가.

바가지는 쉬 깨어지는 물건이라 조심성 있게 써야 해서 예전 아녀자들은 그리 조신하고 음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더러 쌓이고 쌓인 분을 참지 못하면 부지깽이 대신 손에 쥔  바가지를 내던져 산산조각내기도 했다.

주렁주렁 자식 많이 딸린 아낙은 걸핏하면 말썽 피는 아이 머리를 바가지로 내쳐서 와지끈 툭탁 박살 내버렸다.

사실 바가지로 맞아봐야 소리만 요란스럽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을 떠올리면 자동반사적으로 흥부전이 떠오른다.

맘씨 착한 흥부는 다리 다친 제비를 불쌍히 여겨 정성껏 상처를 돌봐줬다.

매품팔이까지 하며 가난하게 살던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를 심었는데...

영근 박을 양주가 마주 앉아 톱질하면서 "시리렁 실겅 당겨주소, 시르렁 시르렁 렁 실겅실겅 당겨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 밥 한 통만 나오너라"며 박타령을 읊던 흥부 앞에 금은보화가 쏟아지고.

흥부가 판소리 중에 가장 재미지던 화초장타령은 익살의 극치다.

부자가 된 동생 흥부를 찾아간 심술첨지 놀부는 으리뻔쩍한 화초장을 뺏어 등에 짊어지고 귀가한다.

화초장, 화초장 노래하며 도랑을 건너다 그만 이름을 잊고 만 놀부, 고초장 된장 간장 뗏장...아이고 아니로구나~~!

초장화 장화초.... 방장 촌장 접장 송장.... 이것도 아니로구나!

중중모리 장단으로 점점 격앙시키며 주워섬기는 이쯤에 이르면 그 해학성에 웃음보 터져 데굴데굴 뒹굴거나 파안대소 절로.

호젓이 박꽃 핀 저녁,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윤리 규범을 깨뜨려 사회 모순 심화시킨 놀부의 몰락을 통해 나름 대리만족감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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